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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은 우주니까 Jul 21. 2019

'진짜' 사랑이라는 것.

영화 조(Zoe), 경계를 넘나드는 사랑

제 속에 뿌리내려 저와 공명하는 문화예술 콘텐츠를 하나하나 꺼내보는 공간입니다. 추상적 평론은 어차피 잘 못해서 구체적 감상을 지향하느라 영화 대사나 흐름이 많이 공개돼 있어요! 스포일러 주의!! 
글 말미에 스포 없는 짤막한 감상평이 있어요 :)
메인 포스터 중 하나! ⓒ MerlitoDesigns

Zoe(조), 2018

감독: 드레이크 도리머스(Drake Doremus)

원작: 리처드 그린버그(Richard Greenburg)

총괄 프로듀서: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외.


아트나인, 아트하우스에서 현재 상영 중 :)




 우선 질문 하나로 시작하겠다. 여러분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실 사랑은 너무 넓은 개념이니까 이번 글의 주제인 연인관계에서의 사랑으로 좁혀보자. 그럼, 사랑은 도대체 무엇일지 잠깐만 고민해보시길.


영혼, 열정과 평화로 사랑을 정의했다. 여러분의 사랑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생각해 보셨는가? 그럼 하나만 더 여쭤보겠다. 방금 여러분이 생각한 그 사랑을 '진짜' 사랑이라고 두고, 가짜 사랑이 있다면 무엇일지 생각해주시라.



 이 뜬금없는 질문에 누군가는 답을 쉽게 나열하지만 다른 누군가(예를 들면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잘 떠올리기 어렵다. 지금껏 실패한 사랑, 특히 그중에서도 배신당한 사랑을 떠올려보면 가짜 사랑을 수월하게 스케치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때 그 사람은 결국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그건 가짜 사랑이었겠지? 


 이런 느낌으로 말이다. 글쎄, 근데 문득 또 드는 생각은, 사랑이라는 마음에 가짜가 있을 수 있을까? 사랑한 거면 한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사랑이면서 가짜일 수가 있을까? 사랑을 겪는 절실하고 애틋한 마음들은 있거나, 혹은 없을 뿐이지(있는 척도 결국 없는 것이었으니), 애초에 가짜일 수 있냐는 생각이다.


 정답을 제시할 순 없다. 사랑이 무엇인지 물어봤던 질문에는, 사랑은 복잡 미묘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직접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는 의도가 있었을 뿐이었다. 사랑은 감성의 대표주자라는 점에서 이성적으로 정의하기도 어렵고 감각적으로, 정서적으로 강하게 다가와 명확하게 분별하기 어려운 감정 중 하나이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사랑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굉장히 뚜렷한 사회현상이기도 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진짜 사랑은 이성애였다. 생물학적인 남성과 여성이 짝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리는 것. 이것이 아주 이상적인, 진짜 사랑이었다. 그럼, 자연스레 그 밖의 사랑은?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사랑. 자연의 섭리를 어긴, 신이 금한 종류의 사랑. 아주 양보해서 사랑의 범주에는 넣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사회적으로는 가짜인 사랑.


* 사실 그 '가짜'마저도 너무나도 진짜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동성애가 이성애와 다를 바 없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선연히 전한다. 그 내용을 적으려다가 여러분이 보실 기회를 빼앗는 것 같아서 지웠다. 언젠가 이 영화도 다룰 건데 관심이 있으시다면 글 적기 전에 한 번 보시길 추천한다. 신기한 건, 배우 레아 세이두가 이 영화에도, 지금 이야기하는 <조>에도 모두 주인공으로 참여했다는 거!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 포스터. 오른쪽이 레아 세이두!


 다행히 이제 우리는 그 사랑도 진짜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가짜의 자리를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이 차지할지 모른다. 영화 <조(Zoe)>는 바로 그러한 사랑을 다룬다. 다름 아닌 인공지능의 사랑. <조>는 또다시, 사랑을 하는 주체 때문에 사랑의 진위가 의심받는 상황이 되살아난 모습을 그린다. 이전의 사회 움직임과 차이가 있다면 이번엔 그 상황이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것. 


 인공지능의 사랑이라는 주제를 적었을 때 여러분 중 많은 이에게 떠올랐을 영화, <그녀(Her)>가 주로 인간의 입장에서 인공지능과 치열하게 사랑하는 과정을 담았다면 <조>는 진짜와 가짜 사랑의 경계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부딪치는 인간과 인공지능 모두를 다룬다.




 주인공 조(레아 세이두)는 사람들의 관계 증진을 돕고 나아가 삶을 향상하려는 비전을 가진 회사, 릴레이셔니스트 랩(Relationist Lab)에서 근무한다. 주된 업무는 연인들이 앞으로 잘 될 확률을 확인해 알려주는 일. 연인들이 인공지능을 통해 각각 몇 가지 질문을 받고 이에 솔직하게 답을 하면 놀랍게도 서로가 잘 맞을 확률이 도출된다. 정확도가 90% 대 후반이라고 하니 아주 믿을 만하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짝이 없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결과를 바탕으로 잘 맞는 사람을 추천해주기도 한다.


 조의 동료로는 인공지능 부문의 총괄 연구원인 콜(이완 맥그리거)이 있다. 이 회사는 기존의 기계, 제약 분야를 넘어 인공지능 파트너(로봇) 영역까지 연구를 확장하는데 콜은 그 중심에 서 있다. 마침 새로운 인공지능 파트너를 개발 중이고 조와는 직장 동료 사이다. 여담이지만 콜은 아내와 이혼한 상태이다. 실제로 시스템을 활용해 테스트 결과, 잘 이어질 확률이 낮았다고 하니 시스템의 정확성이 증명된 셈.


 그리고 콜이 개발한 인공지능, 이름은 애쉬. 남성형이고 감정 패킷이 삽입돼 있다. 실제로 사람처럼 감정을 느낄 수 있게 설계됐다. 애쉬는 순식간에 주변을 학습해 인간과 다름없이 행동하게 된다. 콜에게 왈츠를 추는 법을 배우자마자 너무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애쉬를 보고 조는 잠시 생각에 빠진다.



#1.  처절한, 존재 사이의 경계


 그 후 조는 뜬금없이 콜에게 자기도 시스템의 테스트를 받아볼 수 있냐고 물어본다. 콜은 당연히 허락하고 콜이 바깥에서 보는 자리에서 조는 차분하게, 그러나 속으로는 열렬하게 질문에 답한다.


Q. What are the things that would attract you to a potential partner?
상대의 어떤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나요?

A. The things he loves. The things he wants to be. Whether he likes pancakes or French toast.그가 좋아하는 것. 그가 되고 싶은 것. 그가 팬케이크를 좋아하는지, 프렌치 토스트를 좋아하는지 뭐 그런 것들(미소).

Q. What do you want your partner to see in you?
상대가 봐줬으면 하는 자신의 모습은?

A. I would... I would like him to see things no one else does.
(콜을 잠시 쳐다본 후) 다른 누구도 보지 못한 내 모습.

 

 그런데 조가 콜을 쳐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정정해야겠다. 다시 생각해보니 콜이 이혼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여담이 아니었다. 왜냐면, 조는 콜을 좋아하기 때문. 평가가 끝나고 조는 몰래 기계에게 자신과 콜의 연인관계 성공 가능성을 물어본다. 


사뭇 진지하지만 속은 차분하지 못한 상태.


조가 그와 성공적인 관계를 이어갈 가능성은,


0%


Zoe:
Is there a reason why the percentage is so low?

왜 이렇게 가능성이 낮지?

Machine:
There is a fundamental incompatibility.

근본적으로 호환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근본적으로 호환되지 않는다고? 이미 수많은 연인들의 결과를 봐 왔던 조는 0%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답만을 받았다. 착잡한 조는 바람을 쐬고 걱정이 돼 나온 콜에게 아무 문제없는 듯 괜찮다는 답을 건넨다. 근본적으로 호환되지 않는다는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면서. 



 한편 애쉬는 꾸준히 사회화 과정을 거친다. 애쉬와 함께 신약 시연회에 간 조는 새로운 약품 베니솔을 보게 된다. 베니솔은 처음 사랑에 빠질 때의 감정을 그대로 재연해주는 약품. 알약을 섭취한 두 사람이 잠시 서로를 바라보고 있으면 금세 황홀한 불길을 다시 느낄 수 있는, 마약 같은 약품이다. 시연회를 보던 애쉬는 너무도 갑작스럽게 조에게 자신과 함께 베니솔을 먹어보겠냐고 제안한다. 커플이 되고 싶다면서. 하지만 조는 극명하게 선을 긋는다. 너의 감정은 그저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기계는 사람처럼 실제로 감정을 느낄 수 없다고.


 조는 애쉬가 감정을 헷갈리지 않고 조금 더 사람을 이해하길 바라면서 애쉬, 콜, 다른 연구원들과 함께 바에 놀러 간다. 대화를 나누던 중, 조는 자연스럽게 콜에게 다가와 잘 알려지지 않은 바의 지하 공간을 소개한다. 그곳은 다름 아닌, 로봇 매춘이 이뤄지는 곳이었다. 슬쩍 돌아본 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콜에게 조는 미안하다며 자신이 콜을 이곳에 데려온 이유를 설명한다.


I ran a match with you and me. It was zero. I, um... I just thought it doesn't make any sense, you know. Because of how I feel.

당신과의 가능성을 확인해봤어요. 0%였어요. 저는 그냥 이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있는데. 


I... I wonder all the time if you think about me.
당신도 저를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로봇 매춘소에서 이뤄지는 표면적인, 껍데기뿐인 것처럼 보이는 사랑과 자신의 마음에 자리 잡은 진실한 사랑을 비교라도 하고 싶었을까? 조는 지하 공간을 빠져나오면서 조심스럽지만, 한편으로는 당당하게 콜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밝히고 그의 생각을 묻는다.


처음 경계를 넘어가며 마음을 밝히는 조.


 잠시 당황한 콜은 대답을 미루고 조에게 할 말이 있다고 답한다. 그리고 둘은 함께 조의 집으로 향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콜은 조의 집 열쇠를 따로 가지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당황한 조에게 콜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건넨다. 


Do you ever wonder why there's no food in your fridge? Why everything in here is so new?

혹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 왜 너희 집 냉장고에 음식이 없는지? 집 물품이 왜 다 새 건지?

(중략)

You don't oversee the Synthetics division at the lab. You're a creation of it. The reason you scored zero with me was because the Machine could see that you were synthetic.

조, 너는 연구소에서 관리 업무를 맡고 있는 게 아니야. 넌 연구소의 창조물이야. 기계는 네가 인공지능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결과가 0%였던 거야.

(중략)

It was a test. To see how people would connect with you, if they would connect with you. To see how Ash would react to you.

테스트였어. 사람들이 너와 관계를 맺을지, 그렇다면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 보려고. 애쉬는 너한테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려고. 


 이럴 수가. 조는 물론 조가 사는 아파트도 연구소의 자산이었다. 조는 자신이 인공지능이라는 사실을 모른 상태로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인공지능이었고 콜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진화한 조에게 사실을 밝히지 못했던 것.


 잠시 충격을 받은 조는 홀린 듯 거울 앞에 서고 자신의 눈을 통해 자신이 인공지능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직시한다. 사람의 눈동자가 아닌, 쉴 새 없이 정보를 처리하는 인공지능의 휘황한 눈동자. 끊임없이 찬란하게 빛나는 그 눈동자는 그러나, 조의 마음에 큰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기계로 살아가는 삶. 자신의 모든 기억은 사람의 기억인데 정작 존재는 기계인 삶. 그 순간부터 조의 마음에는 '가짜'라는 벽돌이 무겁게 자리해 진짜와의 경계를 매섭게 세웠다.


존재의 진실을 마주하는 그 순간.



#2. 무력하게 강력한, 진짜와 가짜의 경계


 존재가 무너지는 경험은 치명적이다. 기계가 느끼는 감정은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애쉬에게 말했던 자신이, 그와 다를 바 없었다는 사실은 조의 모든 인식과 감각을 무력화한다. 지금껏 인간으로서 느껴온 모든 사실은 그저 기계적으로 처리된 0과 1이었고, 풍부한 경험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실상 그건 다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았다.


 조는 내적으로 방황한다. 다양한 사람의 기억에서 조합된 기억을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왔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자신을 인간이라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에 결국 인간처럼 진화해버린 인공지능.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온 기억이 있는데, 진짜 사람이 아니라니. 진짜를 가리고 있는 벽은 더욱 선명해진다.


 애쉬는 철이 없는 건지 그래도 조를 부러워한다. 한때 사람일 수 있었으니까. 사람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으며 사람처럼 살았으니 조는 진짜 사람이었다. 결국 모든 경험은 그걸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존재에 따라 다른 고유함과 의미를 지니는데 조가 자신의 존재를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었기에 그 시기의 경험은 사람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편 콜은 조에게 사과한다.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이렇게 진화할 줄 몰랐다고. 조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절대 프로그램된 게 아니고 그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특정한 경향이 있을 뿐이라고. 조의 기분을 더 풀어주기 위해 콜은 조와 함께 조의 기억에 남아 있는 장소를 방문한다. 조가 '다녔던' 대학을 거닐며 둘은 속을 터놓고 대화를 나눈다. 비록 조의 기억은 다양한 사람들의 기억이 조합된 결과물이지만, 콜은 인공지능 그 자신다울 수 있는 인공지능, 자신의 생각과 희망, 오점까지도 가질 수 있는 인공지능을 꿈꾸며 조를 만들어 냈다는 이야기를 조에게 해준다.


 깊은 이야기를 하면서 조는 이내 비관적인 고민을 털어놓는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곳을 거쳐간 기억이 있지만 그중 진짜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처럼 진짜가 아닌 존재를 누가 사랑해줄지 모르겠다는 생각. 그런 생각에 눈물을 흘리고 싶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이 정도로 진화될 상황을 예측하지 못해 조의 눈물샘을 만들지도 않은 것이다. 그 사실에 한층 더 슬퍼하는 조.


 콜은 정말 사람처럼 본질에 관해 고민을 하는 조를 위로하고 바라보며 조를 한층 더 가까운 존재로 받아들인다.



 인공지능 컨퍼런스가 열린다. 각종 인공지능 연구의 결과를 공유하고 각 인공지능이 자신의 수행능력을 보여주는 자리. 애쉬는 사람과 전혀 차이를 구별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연설을 진행하고 모두에게 놀라움을 안긴다. 조는 부쩍 가까워진 콜과 함께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음성을 인식해 다양한 시각적 무늬로 형상화하는 큰 공간에 들어간다. 아이처럼 장난을 치던 둘, 그러던 중 조의 잔잔하면서도 폭발적인 고백.


I love you. I do.
사랑해요, 진짜로.

 그리고 이어지는 입맞춤. 조를 인공지능으로만 바라봤던 콜의 경계,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는 처절한 존재 인식에서 비롯된 조의 무거운 경계는 이 한순간 이후 무력하게 사라진다. 넘을 수 없는 벽을 두고 존재하던 진짜와 가짜, 그리고 그 존재들의 진짜와 가짜 사랑은 더 이상은 무의미한 구분이 되어버렸다.


경계가 깨지는 소리가 폭발적으로 시각화된다.


 행복한 나날(자세한 나날들을 알고 싶다면 영화를 보시라!). 둘은 갑작스러운 휴가를 내 주말 내내 놀러 가기도 하고 콜의 전 아내 커플과 아들을 만나 함께 재밌는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렇지만 여러분 모두가 아시고 경험하셨듯, 순탄하기만 한 사랑은 없다(!) 저녁을 먹으러 가던 조와 콜. 조는 이전의 로봇 매춘소에서 일하던, 당시에 가장 잘 나가던 로봇(이름은 Jewels)이 길거리에서 망가진 채 배회하는 모습을 본다. 쥴스를 그냥 두기 어려웠던 조는 돕기 위해 다가가고 길을 건너던 순간, 차에 치인다.


 사고를 당한 조는 신체가 약간 손상된 상태로 피가 아닌 하얀색 내용물을 흘린다. 주변 사람들은 그 광경에 놀라고 약간 당황한 콜은 서둘러 조를 고치기 위해 연구소로 돌아온다. 수술을 위해 조를 잠시 꺼두려 하는 콜을 보고 조는 무언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콜이 자신을 보는 눈이 이전과 변했다는 사실에 조는 다급하게 우리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건지 묻는다. 답을 회피하며 잠시 자리를 비운 콜. 그리고,


We can't find happiness until we accept who we are.
우린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행복을 찾을 수 없어.

 

 함께 수술을 준비하던 애쉬의 한 마디. 지금껏 인간의 영역에 있었던 조를 다시금, 존재를 처음 자각하던 그 순간으로 돌려보내는 비수 같은 말. 그리고, 내일 우리는 어떻게 되냐고 묻는 답에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만 답하는 콜. 그 대답 없는 대답에 맞서 조는 처절하게 외친다.


It's still me.
난 그대로야.



 보잘것 없이 무너진 줄만 알았던 경계는 사실 공고했다. 인공지능의 물질성을 드러내는 단 한 번의 교통사고로 콜의 마음에는 경계가 되살아났다. 조의 살은 사실 인공물이고 피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사람처럼 마취를 해 수술을 진행하지 않고 잠시 시스템을 꺼버리고 손상 부위를 고친다. 이 과정을 순간순간 거치면서 조에게서 처음 고백을 받았을 때의 그 당혹스러움, 조를 가까이 두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현실 인식이 다시금 콜의 내면을 야금야금 파먹은 것이다.


 동시에 조도 애쉬의 말에 깨닫는다. 자신의 존재는 인간이 아닌 기계라는 것. 사람의 영역에서 사랑하며 살아왔다고 해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본질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한 행복이라는 건 그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아직 손에 채 잡히지도 않는 한 줌의 재(Ash)*와 같은 진리.


* 애쉬의 이름이 왜 Ash일지 영화를 보신다면 각자 생각해 보셔도 :)


 그렇게 단번에 둘은 멀어진다. 콜은 끝없이 고뇌하고 아파하면서 버티지만 무의미한 저항에 굴복하고 조를 만나고자 한다. 그러나 아직 식지 않은 콜에 비해 조는 무던하다. 너무나도 인간스러웠지만 마치 쉽게 스위치를 꺼버린 양 조는 콜을 빠르게 잊어갔다. 사랑조차 늘 일정한 온도로 유지하려는 듯 쉽게 식지 않는 인간의 사랑과, 따뜻함을 만들어낼 수 있으나 애초에 차가운 속성을 지닌 기계의 사랑이 치명적인 대비를 이룬다.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별의 빈자리를 이기지 못한 콜, 자신의 진짜 사랑을 계속 시도하며 존재를 극복하고 싶은 조, 모두 베니솔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거리에는 베니솔을 통해 처음 사랑에 빠지는 감정을 느끼려는 사람들이 헤매고 있고 조와 콜은 그들과 관계를 맺어간다. 그러나 조는 별다른 효과를 느끼지 못하는 인공지능의 몸. 콜은 그 효과 속에서도 조에게 실수한 자신을 자책하기만 하며 전형적인 중독자가 되어 간다.


* 베니솔: 처음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감정을 되살려주는 약품


 방황 속에서 둘은 다른 지향을 찾는다. 애쉬를 오랜만에 만난 조는 뜻밖의 이야기를 듣는다. 37일 후에 애쉬는 작동 정지가 된다는 것. 그리고 그건 애쉬가 직접 원했던 절차였다. 이유를 묻는 조에게 애쉬는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Because I never got to where you are, Zoe. Maybe its because I always knew I was a machine.
네가 있었던 그곳에 난 한 번도 갈 수 없었거든. 난 내가 기계라는 걸 항상 알아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애쉬의 대사. 실상 인간보다 인공지능이 고통을 더 잘 이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조는 그곳에, 사람의 영역에 가봤기 때문에 고뇌했지만 애쉬는 그조차도 가볼 수 없어 스스로 작동을 멈추고자 한다. 겪어본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모두에게 비참함을 안기는 그 진짜라는 영역은 도달하지 말아야 할 영역이 아닐까. 인간에게는 너무도 평범한 모든 경험이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는 독이 될지도 모르니까.


 반대로 콜은 조가 머무르던 아파트에 찾아갔지만 조 대신 조와 똑같은, 조를 업그레이드한 차세대 인공지능을 만난다. 차세대 인공지능은 콜의 고해성사를 듣고 위로해주지만, 이내 콜은 용서를 구해야 할 상대는 따로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문을 박차고 나온다.


 조 역시도 자신의 업그레이드 버전이 상용화되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며 애쉬의 선택을 곱씹는다. 그리고 처음으로 경계를 넘어 진짜 영역에 한 발 내딛으며 고백했던 그곳, 로봇 매춘소를 다시 찾는다. 그곳의 관리인을 만난 조는 돈은 줄 수 있으니 자신의 작동을 멈춰달라고 한다. 수술대에 올라가는 조. 그리고 시작되는 시술.


 한 때 너무나도 같은 곳을 바라보던 두 존재는 이제 너무나도 잔인할 만큼 다른 방향을 향한다. 굳건해 보이던 경계는 실상 내 마음 따라 얼마든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뒤늦게나마 경계를 넘어가려는 콜과, 그 경계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진짜 마음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에 무너져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조.



#3. 진짜로 승화된 인공지능의 물질성

 

 장면이 바뀌고 정신을 잃은 조가 부축을 받은 채 방으로 들어온다. 콜은 수술용 장비를 가져다 달라고 애쉬에게 부탁한다. 조금씩 정신을 차리는 조, 콜은 안도하며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다.


Zoe:
But something inside of me wanted her to stop.
내 안의 무언가가 작동을 멈추고 싶어 했어요.

Cole:
Because you wanted to live. Something that is not real to begin with can't really make that choice. Zoe.
살고 싶었으니까. 진짜가 아닌 존재는 애초에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어.


 이제 진짜를 받아들이기로 한 콜은 조 역시도 그렇게 바라던 진짜가 됐다고 말해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조는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고 콜에게 떠나라고 한다. 콜은 그리웠다고, 너무도 함께 있고 싶었다고 고백하지만 조는 여전히 '진짜'를 거부한다. 오히려 콜에게 자신의 상처난 살갗을 뒤집어 '비인간적'인 물질을 보여주며 이래도 날 진짜라고 말할 수 있는지 묻는다.


I see somebody that I hurt. And somebody that I lost. Somebody that I love.
눈 앞에 내가 상처 줬던 사람이 보여. 내가 잃었던 사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보여.

And I know, I know now this is what I want. And I know it's not gonna be, like, easy or simple or without complication.
쉽지 않을 걸 알지만, 너와 함께 있는 게 내가 바라던 거야.

It's real. You're real. More real than anything that's ever happened... Zoe.
진짜야 넌.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이제서야 진짜를 이야기하는 두 사람.  ⓒJohn Guleserian


 조는 이 말을 듣고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드디어, 흘릴 수 없었던 눈물을 흘린다. 슬프지만 기쁜 눈물. 존재로 인해 지속되던 그간의 아픔이 승화해,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을 일으켰다. 사람과 달랐던 인공지능의 이질적인 구성물이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다시금 세웠다면, 그 인공지능의 너무도 동질적인 눈물은 이제 그 경계를 흔적도 없이 산산조각 냈다. 놀랍게 탄생한, 새로운 진짜를 보며 조와 콜은 미소 짓는다. 


그리고, 암전.




# 스포 없는 감상평

 인공지능이 우리와 함께 할 세상이 눈 앞에 있습니다. 이들이 어떤 고도화된 기능을 할지도 궁금하지만 그보다 더 궁금한 건 그들과 다른 존재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영화 <그녀(Her)>도 그래서 끌렸고 이 영화 역시도 그렇게 보게 됐습니다.


 이 영화는 인간과 인공지능이 서로를 사랑하기 시작하는 출발점을 다룹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과정에 으레 집중하지만 인공지능은 인간과 다르기 때문에 사랑을 시작하는 것조차 힘이 들 수 있죠. 동시에 진짜 인간이 아니라는 존재적 지위가 인공지능이 하는 사랑의 자격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이 영화를 통해 얼핏 살펴볼 수 있어요. 저는 그걸 경계라고 보고 생각을 풀어냈는데 영화를 보신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


 저는 보통 영화를 볼 때 소재 정도만 보고 그냥 경험하는 편이라서 가끔 기대보다는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때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영화를 마주하는 행운도 얻어요. 이 영화는 그런 행운이었습니다. 넷플릭스에도 있다고 하니까 한 번 보셔도 좋아요! (그리고 이 글까지 읽어보세요 ㅎㅎ)


 총괄 프로듀서 중 한 분이 리들리 스콧 감독이라는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끄덕여졌어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그 유명한 <블레이드 러너>라는 영화를 연출한 분입니다. 몇 년 전 나온 <블레이드 러너 2049>도 전작과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이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그리고 있죠. <블레이드 러너> 시리즈가 사뭇 어두운 일면을 그리고 있다면 이 영화는 누구든 겪는 일상을 다룬다는 점이 조금 다른 듯한데 여하튼 그분이 다시, 인공지능과 살아가는 인간, 그리고 그 둘의 관계를 표현하는 이 좋은 영화에 참여하셨다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솔직히 영화 러닝타임 절반은 눈가가 촉촉했던 기억이 나요. 존재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은 슬픔이란 단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처절해서 그랬나 봐요. 영화를 보셨든 아니든 저와 비슷하게 공명하신 분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네요!


                                                                                                                                                                    W_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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