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자가 맞나 보다

연희동 낭만주의자

by 현이


연희동으로 이사 온 지 두 달 정도 된 오늘이다. 날씨가 조금 풀렸겠다, 오랜만에 일어나서 러닝을 간다.

아파트 바로 뒤에 홍제천 산책길이 있어 고민 없이 그쪽으로 향한다.


출발하는 길에 참새인지 모를 작고 보송보송한 귀여운 새들을 봤다. 핸드폰을 안 들고 나와 사진을 못 찍었는데 새끼 참새인지 다른 새인지 궁금했다(다시 만나기를). 홍제천을 유유히 돌아다니는 오리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한 가족이 있었는데, 어르신이 아이에게 오리가 발을 저으며 친구에게 간다고 말하는 모습이 다정해 보였다. 이곳은 크고 작은 사람들과 다양한 생태계가 가까이서 공존하는 듯하다.


시작점부터 홍제폭포를 찍고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오는 루트를 완수했다. 작년 가을 - 겨울에 공덕 쪽 공원을 뛰곤 했었다. 그 후로 날이 추워져서 이렇게 긴 거리를 뛰어본 건 오랜만이다(진짜 긴 거리는 아니고 내 체력을 감안하면 긴 거리. 푸하하). 생각보다 체력이 받쳐준다는 게 조금 놀라웠고 기분이 좋았다. 숨을 일정하게 고르며 달리면 생각보다 먼 거리를 달릴 수 있다. 호흡이 가빠질 즈음에는 생각했다. 난 언제든 멈출 수 있어. 그리고 생각했던 지점에 도달했을 때 무리하지 않고 오늘의 달리기를 마치었다.


이렇게 운동을 하면 참 좋은 걸 아는데, 왠지 이렇게 시간과 몸이 허락될 때만 나가고는 한다. 과거라면 반성이라는 걸 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그때 할 수 있는 걸 한다는 데에 뿌듯함을 느껴본다.

오늘의 나, 좀 멋진걸? 이렇게. (푸하하)



햇빛 드는 연희동!


홍제천을 뛴 후 동네 단지로 올라왔다. 주말에 내가 좋아하는 것은 동네 빵집에 들르는 일이다. 주말과 다음 주 평일 아침으로 먹을 빵을 산다. 빵을 살 때 욕심 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한 주 동안 알차게 먹으면, 음식을 남기지 않았다는 뿌듯함과 매주 빵집에 들르는 소소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서다. 요즘에는 이곳에서 호밀빵을 자주 산다. 회사에서 부담 없이 먹기에 딱 좋은 빵이다(물론 이곳 다른 빵들도 아주 훌륭하다). 이렇게 어떤 부분에서는 무엇을 고를지 크게 고민하지 않을 만큼 선택지를 좁히는 것도 꽤 괜찮은 것 같다.


오늘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커피도 주문해 봤다. 그라인더에 원두를 갈아서 드립으로 내려주시는 커피였다. 베이커리라서 커피는 안 마셔 보았는데 원두 이름이 왠지 호기심을 자극했다. ‘베이비블렌드’라니. 그리고 요즘 좋아하는 산미 있는 원두라니. 조심스럽게 ‘아이스도 되나요?’ 라고 물어보고 주문했다.


실은 예전에는 드립커피가 머신으로 내린 커피보다 덜 진해서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서른 살인 지금 시점에서는 비교적 가볍게 마실 수 있는 드립커피가 더 좋을 때가 종종 있다. 카페인 부담이 덜한 느낌이랄까. 어른이 되었는데도 취향이 계속 변할 수 있다는 건 재미있는 일일까? 이렇게 가끔 취향의 변화를 느끼면 조금 신기할 때가 있다. 예전엔 먹지 않던 걸 먹고 하지 않던 걸 하고 그런 것들 말이다. ‘절대‘라는 말은 매우 신중해야 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변화가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드립커피!

빵과 커피를 양손에 들고 동네를 걸어 집으로 향한다. 그러다 갤러리 앞에 서있는 누군가를 보고 나도 걸음을 멈춘다. 예쁜 그림이 있나?


연희동이 흥미로운 동네인 이유 중 하나는 길 곳곳에 작은 갤러리들이 있다는 점이다. 유동인구도 그렇게 많지는 않고 연남동처럼 젊은이들로 붐비는 곳도 아닌데 조용한 동네 길거리에 갤러리가 자리하고 있다. 작품들도 주기적으로 바뀌는 것 같다. 옆에 있는 어르신과 함께 밖에서 구경했다. 눈 내리는 숲 어딘가에 빨간색 자동차가 정차해 있는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그림을 보고 다시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아 나는 역시 낭만파 인가 봐 ‘


연희동을 내 식으로 묘사해 보자면 서울 다른 지역들보다 느리고 한적한 분위기다. 어르신들이 많고, 그만큼 마트 풍경은 정겹고, 카페든 식당이든 어딜 가든 ‘동네‘같은 느낌이 있다. 연희동은 교통이 훌륭하지는 않고 트렌디함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하지만 내가 동네 곳곳에서 마주하는 ‘작고 소중한’이라는 감각이 내면 어딘가 평온함을 가져다준다. 그게 연희동에서 지내는 즐거움이다. 낭만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산책 한 번 다녀와서 이렇게 줄줄이 일기 한 편을 쓰는 걸 보아하니 낭만주의자가 맞는 것 같다.


아침 먹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