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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rey Dec 21. 2022

자기 전에 골라 꾸는 꿈

내 방 안 ‘조구만’ 영화관이 건네는 위안

이번주엔 거의 매일 밤마다 빔 프로젝터를 틀고 영화나 드라마를 봤다. 이상하게도 자기 전에 벽에 화면을 쏘고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를 틀어 놓으면 그게 그렇게 위로가 된다.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거나, 위로받고 싶을  괜히 아집 부리듯 더더욱 그런다. 비실비실한 마음에 근육통이 찾아왔을  알맞은 처방으로는 밤에 보는 영상 만한  없다. 힘든 날을 보냈을 때나 하루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날일수록  ‘영화 시간 찾게 된다.    제쳐 두고아직 물기 남은 머리로 욕실에서 나와 영화 생각부터 한다. 늦은 , 창문  닫고 블라인드 내리고 테이블 위에 받침대를 깐다. 이제는 낡아서  때마다 죽어가는 모터 소리를 내는 유선 프로젝터를 켜면 가장자리에 먼지가 들어간 렌즈 너머로 환상이 투과된다.  
 


 �(딱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까지만 부자연스럽게 쾌활한 인공지능 목소리로)


 돌아온 걸 환영해요 레이! 여기는 아주 개인적이라서 안전한 사념의 비디오 낙원! 당신이 원하는 이상향-자아 투영 대상-가상의 성취를 찾아내세요! 우린 다- 갖고 있답니다! –


그러면 나는 또 비디오 세상을 켜서 맨정신으로 꿈을 본다.



1  쉬-헐크와 히-헐크

얼마 전에 드디어 <쉬 헐크>를 다 봤다. 전날 많이 못 자서 피곤했는데도 굳이 꾸역꾸역. <쉬 헐크>의 편당 실 RT는 20여분 가량이다. 남은 회차를 쭉 트니까 2시간 밖에 안 걸렸다.
 

똑똑하고, 외롭고, 염세적이고, 인정욕구가 넘치는 전문직 헤테로 백인 여성에게 초인급 괴력 파워가 생겼다! 결과물은? 대형 로펌 특수부서의 얼굴이 되어 기득권층과 기업을 대변하는 오은영 박사님! 그녀가 입는 옷은 기갈왕 디자이너가 특수 제작한 임파워링 파워 수트와 행사용 글램룩이고 4화 이후 주요 플롯은 젠 월터스의 내가 금방 사랑에 빠진 남자들이다….

글래머러스한 미들 체급 긴 머리 헐크가 벽 한면을 가득 채우고, 그가 남자들과 싸움을 벌이는 내내 늙어버린 빔 프로젝터 모터가 이따금씩 기침하듯 왱왱댄다….
(이렇게 보면 기계의 삶은 인간만큼이나 유한하군…)

  
 아니 헐크라면서요. ㅠㅠ.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인 화이트 페미니즘에서 더 전진하지 않는 그의 2016년도식 쿨걸 무브를 콤콤한 마음으로 지켜보며 나는 두 시간 동안 이불속에서 곰실댔다. 시즌 1이라서 그렇다고 해줘… 개과천선한다고 해줘….


감상을 거칠게 요약하면, 쉬헐크 중후반부는 PC 한 칙릿 소설 같다. 성공한 도시여자가 인정과 사랑을 갈망하며 현실에 얻어맞다 결국엔 자기를 받아들이고 만족을 찾는 내용인 게 칙릿이랑 꼭 닮았다.
(그리고 그 과정엔 유명세의 취득 + 핫가이와의 로맨스 + 대리만족을 의도한 메이크오버가 있다….?)


 메이크오버 파트가 상당히 길어서 <SHE-Hulk Wears LUKE JACOBSON> 뭐 이런 느낌도 난다.
 (루크 제이콥슨은 이 드라마에서 슈퍼 휴먼 전용 의상을 만드는-완전 게이 스테레오 타입-누굴 풍자한 것인지도 모르겠는-패션 디자이너다)
 
 <쇼퍼홀릭*>의 작가가 2000년대 초반쯤 <워커홀릭>이라는 책도 썼었는데, 거기엔 런던의 성공한 일중독 변호사가 갑작스럽게 귀촌(?)해서 가정부로 일하는 내용이 나온다. 쉬헐크의 감성도 왠지 그것과 약간 비슷하다! 다만 2020년대 버전이니 더 여성주의적이고 더 자본주의적이다. 그리고 성해방은 더욱 가속되고 2020년대의 만남은 더욱 가벼워졌기에 더 많은 남자와 데이트한다.
 
 마지막 화 엔딩 씬은 법정에 복귀한 쉬헐크를 인터뷰하러 온 미디어 회사의 리포터 시점으로 끝나는데, 드라마는 취재진의 입을 빌려 제니퍼 월터스를 ‘법의 디바 쉬헐크’라고 부른다. 법의 디바란 말이죠. 이 디즈니 괴물들아! 이미 이 드라마에는 디바 속성인물이 너무 많다. 쉬헐크의 절친도 디바고, 쉬헐크의 라이벌 타이타니아도 디바고, 그녀의 의상 만들어주는 남자도 디바고, 왠지 모르겠지만 여기선 소서러 슈프림 웡도 디바 같다…

 
 그러면 이제 코믹스 작화톤으로 만들어진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 내 인중은 또오오 길어지고. 음… 나는 여기서 뭘 봐야 하지… 하는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예쁘게 힘센 쉬헐크의 미모..? 타티아나 마슬레이니 의 연기력…?(그녀가 연기 달인이라는 건 강조하지 않아도 <오펀 블랙> 본 사람들은 다 안다!)
 법원 계단을 배경으로 찍은 로우앵글숏에서, 펜슬 스커트 아래로 드러난 매끈한 녹색의 종아리가 상당히 섹시하다는 거…?   


아니면 같이 남자들을 미워할 수도 있다. 오퍼시티 98%쯤으로 공들인 팬보이와 인셀의 묘사는 풍자 이상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며 시간을 잡아먹었다. 인셀이 인셀인 것이 하루 이틀인가… 정말 인셀이 싫다면 마블 스튜디오는 왜 계속 제임스 건이랑 일한거지...? 아무튼 마지막화는 마블이 레딧에 들어갔다 나온 토사물 같은 모습인데, 궁금하신 분은 직접 보는 게 낫다. 정규 에피라기보단 망한 SNL 스킷 같아서 약간 슬프다. 미국인들은 이렇게까지 메타하고 쿨한 것을 좋아하는가?


이렇게 내가 입을 삐죽거리며 보면서도 자본으로 빚은 CG의 질은 매끈했고, 마블 스튜디오식 반가운 아는 얼굴 때려 넣기 그냥저냥 맛있는 라면처럼 뇌에 들어갔다. 게다가 (쉬헐크가 맞닥뜨린 고난들) 어쨌든 저것도 너무도 여자의 인생이기는 했다!
 
 다음 시즌엔 어떻게 될까. 왠지 마블 놈들은 솔로무비를 안 만들어줄 거 같다. 대신 시즌 2랑 다른 이름의 드라마를 또오 만들고 막 쓸 것 같아서 걱정 아닌 걱정이다. 급진좌파 데어데블이 젠 월터스를 전장연 시위에 데려가고 사랑의 힘으로 못 말리는 기득권 엘리트 히어로를 인권변호의 세계로 안내하지 않을까하는 엄한 기대도 해봤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맷 머독이 금빛으로 마감된 새 헬멧 색깔처럼 리버럴 자본주의에 얼큰하게 물들 확률이 더 높아 보인다. 상상하니 속이 쓰려서 그냥 생각을 멈추고 데어데블 시즌 1이나 다시 보기 시작한다….



 2   OTT 시대의 컬렉션

아무래도 나는 매주 공개되는 새로운 에피소드를 충실하게 본방사수하는 종류의 시청자는 못된다. OTT가 기대작을 한주에 1화씩 공개하는 전략을 도입한 후로는 늘 다음과 같은 패턴이 생겼다. 1화가 재밌는 작품은 EP3 쯤까지 챙겨 봤다가 흥미가 시들해져 미뤄두고, 풀 시즌이 공개되면 두어 달 뒤에 마저 몰아보는 식이다.
 
 이런 패턴으로 2022년도 하반기엔 <하우스 오브 드래곤>, <문나이트>, <하우 아이 맷 유어 파더>, <돌페이스> 진도를 끝까지 뺐다. (와중에 드라마에 ‘-진도를 빼다’는 표현을 붙이는 것은 적당한 어휘 사용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여기 적은 것들은 다음 시즌이 나오면 볼 것들이지만 한편으론 야심한 밤에 마음을 위로해주는 그런 작품들은 아니다.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에 들어가서 흥미로워 보이는 걸 한참 찾다가 결국 이도저도 못 고르면 봤던 걸 또 본다. 주로 <패딩턴>, <오만과 편견>, <엑스맨>, <너의 모든 것 YOU> 시즌 1(시즌 2로 넘어가면 러브 퀸이 사이코라는 게 드러나기 전까지만 본다… 가슴 아프거든…) 그리고 부끄럽지만 <브리저튼> 시즌 2.

취향의 미감과 복지가 되는 얼굴로 가득 찬 무던한 이야기들, 위의 영상물들은 나를 다치게 할 일 없는 검증된 인물상과 플롯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나스타샤>, <해리포터>, <라라랜드>는 일년에 한두 번만 트는 비장의 무기(?)다. 아무 때나 보지 않고 진짜 그 적당한 감정선에 들어가고 싶을 때를 기다렸다가 나름 아껴 트는 영화들이다.


자자, 이쯤에서 생각해 봐요.
여러분도 저마다 그런 영화 컬렉션이 있을 걸요. 가상 세계에 대한 향수는 진짜 강력하다. 봤던 영화를 또 보는 데서 느끼는 위안에 대해서는 10장도 너끈히 쓸 수 있지만 변태 같으니 이만 줄여야지.

 

내 경우는 특별한 장면에 다시 폭 빠져 옛 친구를 만나러 가듯 약속된 위안을 얻고 싶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그래서 적당한 시즌에 네버랜드를 찾아가는 피터팬의 동료 1 같은 마음으로도 그 영화들을 주기적으로 면회 간다. 익숙한 증상에 처방약을 이미 아는 것처럼 내게 필요한 바로 그 감정선을 또 느끼고 싶어서 그런 것도 있고.

 


3   코미디의 유익함

가끔 정말 현실에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거나, 약간 가볍게 우울한 마음에 절었을 때는 시트콤에 기댄다. <미란다> 같은 거!
 
 시도 때도 없이 괴랄한 춤을 추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골 때린다는 표정을 짓는 뻔뻔한 미란다와 함께하면, 눈물 젖은 티셔츠를 쥐어짜서 대형 선풍기 바람에 말리듯 내 안에 있는 진지함을 탈탈 털어낼 수 있다. 수십 명이 지켜보는 공공장소에서도 하의 탈의를 하는 미란다에 비하면 내 고민은 얼마나 작고 귀여운가!


 <미란다>가 벌이는 모험은 미치광이 슬랩스틱 악몽 같다. 그리고 엄청 웃긴다. 미란다의 소소한 일상의 모험을 관음 하다 보면 우리 모두가 결국엔 행복해지고 싶어서 애쓰고 사소한 것으로 시기질투하는 고만고만한 사람들이라는 걸 실감해서 어느새 실없는 웃음을 짓게 된다. 세상살이의 심각함에서 조금 멀어져서 약간의 거리가 생기니 정신 건강에도 유익하다.
 
이렇듯 코미디는 비대해진 자아의 성찰에도 좋다! 비슷한 갈등을 겪는 인물을 통해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이 상황을 객관적인 측면에서 보게 해 주고, 우리를 종종 사로잡는 못된 친구들인 미움과 우울과 허무에 맞서 해학과 수용의 힘을 불어넣어 준다.


여러분, 그러니 코미디! 좋은 코미디를 많이 봅시다.
오래도록 사랑해줘서 이 좋은 장르가 계속해서 생산되게끔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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