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아주 일상적인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여기 어떤 여자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사지와 두뇌를 갖고 있는 사람이죠. 휴대폰 속 화면을 바라보고 있어요. 습관적으로 엄지를 움직여 쇼츠를 넘기면서요.
이제 여자가 보고 있는 화면 속 짧은 영상을 흘긋 봅니다. 거기엔 밝은 웃음을 가진 또 다른 여성이 신체를 이리저리 돌리며 제법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어요. 그러곤 예쁘장한 얼굴로 섬뜩한 말을 하죠. 하루 10분 만에…. 팔뚝 살 돌려 깎는 방법을…. 허벅지살 도려내는 비법을…. 뱃살 삭제하는 꿀팁을…. 바로 알려 드릴게요!
다들 아시겠지만 이건 사람을 신속하게 회 뜨는 법을 알려주는 영상이 아닙니다. 도려낸다느니, 깎는다느니, 오린다느니, 찢는다느니, 소멸시킨다느니. 이런 용례는 몸의 부피를 줄이는 방법을 자극적으로 비유한 표현일 뿐이지요.
돌이켜보면 여성들의 대화 속에서 신체 일부를 훼손하거나 삭제하는 화법은 빈번하게 등장하곤 했습니다. “으, 허벅지 이만큼 잘라내고 싶다.” “아, 나도.” 학창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심심치 않게 이런 대화가 무심히 툭 튀어나오던 순간을 떠올려봅니다. 한 사람이 의자에 앉아 허벅지 위로 손날을 들어 크기를 가늠하듯 이리저리 움직이며 한탄하면, 꼭 약속된 것처럼 공감 능력이 뛰어난 일부 사이에서 공감과 동조하는 반응이 이어지는 날들이 있었지요. 마치 신체의 일부를 쪼갤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더 나아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현대의 사회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매우 비판적으로 응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기준에 도달하지 않은 신체를 수선해야 할 옷처럼 무심하게 취급하는 시선에도 익숙해지도록 은근히 강요받지요. 심지어 이 시선은 점점 세분되어요. 몸에 대한 이상적인 기준은 트렌드를 형성하며 계속 바뀌고 복잡해지죠. 그 사이에 이상적인 비율에 맞춰 신체를 재조형하는 방법은 부위별로 더욱 세분됩니다. 마치 고기를 도축하는 영역이 더욱 쪼개지는 것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네요. (물론 그러한 폭력적 시선에 줏대 있게 저항하거나 불응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무심한 자에게 평화가 있나니.)
그와 별개로 그동안 객체화 된 여성의 몸은 패션, 뷰티, 방송, 의료, 피트니스 등 여러 영역에 걸쳐 그 자체로 거대한 비즈니스가 되었습니다. 욕망의 대상이 된 일부는 높이 높이 올라가서 별이 되고요. 그렇게 치열한 경쟁과 증명을 거치고 나서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고 기억되는 건 그 세대의 가장 빛나는 보석으로 선택받은 여자들입니다. 사진이 된 예쁜 여자들을 쳐다보며 우리는 저마다 그의 몸과 얼굴을 보고 말이나 생각을 얹죠. 환한 미소 뒤에서 까맣게 타는 속도 모르고. 그러고는 언젠가 누군가 이런 말을 하겠죠.
“나이 들었네.”
우리는 미를 위해 적극적으로 애쓰는 것이 미덕이 된 세상에 살고 있어요. 에둘러 말해 '자기 관리'라고들 하지요. 아름다움을 향한 의지는 선망 섞인 한탄에서 그치지 않고 화학적 혹은 외과적 방법을 동원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주사를 놓고, 멍이 들도록 두들기고, 피부를 가르고, 무언가를 삽입하고, 뼈를 부수고. ‘더 나은 나’를 위해서라면 해체와 조립의 행위도 다 변화를 위한 과정이 되죠. 기이하다고요? 맞습니다. 그래도 허영이나 어리석음이라는 평가로 냉소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아름다움을 관음한 책임을 나눠 갖지 않나요? 저는 이 부분이 일종의 현대인이 짊어지고 갈 원죄라고 생각해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선에는 크던 작던 수동적인 폭력성이 존재하고, 결국에 우리 중 일부는 그 유혹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더욱 아름답고 완벽한 나'라는 목적 아래 발생하는 여성의 자기혐오에 대한 풍자극, <서브스턴스>는 *바디 호러 장르를 빌려 유혹에 가장 근접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분열을 응시하는 수작입니다.
*바디 호러: 호러의 하위 장르로, 기괴하게 변형된 인간의 신체를 통해 공포감을 조성하는 특징이 있음.
서브스턴스는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통해 현실을 재연합니다. 영화의 키가 되는 아이템인 약물을 먼저 예로 들어볼까요.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은 미승인 약물이 음지에서 거래되고, 짧은 시간 안에 즉각적인 변화로 사용자를 유혹하고, 그렇게 해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게 단순하게 더 나은 버전의 당신이라고 선언하는 점에서 -정말로 ‘수’가 ‘엘리자베스’ 보다 모든 면에서 나았던가요- <서브스턴스>의 설정은 여러 면에서 몸 상품화가 만든 웃지 못할 현실의 해프닝들과 닮았습니다.
이런 장면들을 통해 우리는 '간단 미용 시술'에 사용되는 약물 투여를 연상할 수 있어요.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신체 훼손은 그 독성으로 인한 부작용과 피해를 호소하는 온라인 괴담 속 케이스를 떠올리게 만들지요. 하지만 '뷰티 시크릿'에 있어 비결과 부작용이 온전히 분리된 것이던가요?
이 영화에서 제가 특히 좋아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바로 수의 성공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엘리자베스의 반응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영화 중 후반부, 인기 토크쇼에 출연한 ‘수’는 진행자에게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의 뷰티 시크릿을 말해줄 수 있겠냐고요.
한편 집에 고립된 채 광기의 프랑스식 만찬을 만들던 엘리자베스, 티비를 보던 중 감정적으로 폭발하고 맙니다. ‘수’가 하루하루를 연장한 대가로 자신은 머리가 하얗게 세고 다리가 곪은 채 숨어있는데 말이에요. 엘리자베스는 노파처럼 변한 몸을 흔들어대며 화면 속의 수를 향해 비아냥거리지요.
“말해, 네 미모의 비결을 말해보라고!”
영화는 빛나는 ‘수’의 뷰티 시크릿이 약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수의 근원은 모체인 자신이죠. 수의 아름다움과 생을 연장할 수 있는 기초도 엘리자베스입니다. 서브스턴스는 그저 정신적이며 육체적인 분열을 활성화시켰을 뿐이에요. 단 한 번의 샷이면 충분했습니다. 수의 어리고 대담한 신체도, 사랑스럽고 쾌활한 태도도, 잔혹하리 만치 맹목적인 판단도 다 엘리자베스로부터 나왔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
각각의 몫으로 할당된 일주일을 마친 후 스위치한 엘리자베스와 수는 서로를 혐오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활동하지 못했던 기간 동안 다른 버전의 ‘her’가 한 짓에 분노와 놀라움을 표현하죠. 그런데 이때 두 사람의 표출 방식이 대비적입니다. 둘로 나뉜 엘리자베스와 수의 자아를 각각 잘 보여주는 대사가 있는데요.
가령 엘리자베스는 제발 멈추라고 스스로 되뇌며 자학하고, 몸에 온갖 음식을 쑤셔 넣으며 자신의 몸을 훼손시킵니다. 반면 수는 “CONTROL! YOURSELF!!!”라고 고래고래 패악을 부리며 ‘저 여자’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엘리자베스의 스킨에서 고름이 흐르고 골수가 마를 때까지 체액을 뽑아가며 공격성을 표출하죠.
엘리자베스가 서브스턴스의 위험을 아주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머리를 찧으며 자해하던 엘리자베스가 결국 전화기를 들고 흐느끼며 서브스턴스 제공자와 통화하는 장면에서, “이젠 멈추고 싶어요.”라는 대사가 나오는데요. 그 순간 구부러지고 말라붙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든 데리고 살아가려는 시도가 잠시라도 처절하게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답고 폭력적인 수를 가여워하고 사랑스러워하는 마음이 결국에는 엘리자베스를 파국으로 끌고 가지만요.
#컬러
<서브스턴스>는 색상의 상징과 대비를 적극적으로 사용합니다. 엘리자베스의 키 컬러는 푸른색-보라색-녹색이고, 차분하고 절제된, 그러나 약간은 음울한 느낌을 줍니다. 반면 수의 키 컬러는 발랄한 네온 핑크입니다. 의상에는 뱀과 같은 파충류를 연상시키는 문양이나 레더 소재를 입기도 하는데요. 이것은 수가 엘리자베스에서 탈피한 존재라는 힌트를 주지요.
엘리자베스가 원색을 주로 착용하고, 수에게 배치된 색들이 모두 합성색이라는 점에서도 각각 원형과 변형을 상징한다 볼 수 있겠지요� 수가 아무리 나이 든 엘리자베스를 지우고 싶어 해도 원형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한편 노란색은 엘리자베스가 최후까지 착용하는 코트의 색깔이자 서브스턴스에서 일어나는 분열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전통적으로 노랑은 색채학에서 경고의 의미를 가지니, 영화의 시작부터 관객들에게 거대한 스포일러를 하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이제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
#공간
자신감을 되찾으려 노력하는 엘리자베스가 고등학교 동창과 데이트를 앞두고 거울 앞에서 메이크업을 수정하다가 얼굴을 쥐어뜯던 씬은 서브스턴스가 만들어 낸 최고의 장면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약 30분 동안 복도와 거울 앞을 오가며 문 밖을 나서려고 애쓰지만….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장면, 영화를 넘어 거의 관찰 카메라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나요?
주인공의 모든 변환과 가장 은밀한 파괴가 이뤄졌던 공간이 화장실이라는 것도 묘하죠. 화장실은 프라이빗한 공간인 동시에 오염과 정화의 루틴이 공존하고, 몸에 걸친 모든 것을 해제하는 곳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을 취약한 환경에 놓이게 하는 일상적 공간이지요. 주인공이 가장 심리적으로 취약해지는 공간이 육체의 취약성을 만드는 공간과 일치하도록 만들어 놓은 명료함이 좋았습니다.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시선의 축은 [화장실=거울], 그리고 [스튜디오=카메라]로 양분됩니다. 화장실에서 자기 자신을 뜯어보는 엘리자베스와 수의 모습은 여성이 체화한 은밀한 남성적 응시(male gaze) 연상시킵니다.
반면 스튜디오 공간으로 들어가면 실내에 설치된 카메라의 시점으로 인물을 보게 되지요. 철저하게 상업화된 피사체의 가치를 가늠하게 하는 시선으로 변환되는 성격이 강합니다.
내용 면에서는 비슷하게 80년대 스타일의 에어로빅 비디오를 찍고 있지만 촬영 방식 역시 미묘하게 달라집니다. 피사체가 데미 무어일 때는 풀샷, 웨이스트샷 위주로 갑니다. 약간의 거리감을 두고 신체 전체를 조망하고, 건강한 느낌을 주는 전체적인 밸런스를 심어주는 동시에 주변에 배치한 30-40대 여성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눈길이 가는 무어의 모습에 주목할 수 있게 해 주죠.
반면 마가렛 퀄리를 훑을 때 카메라는 조금 더 게걸스러워집니다. 끝도 없는 줌이 들어가고요. 맨 살 위에 착용한 바디 수트의 곡선을 실컷 관음할 수 있도록 유도하면서 말입니다. (이미지가 너무나 섹시하기 때문에 풀샷으로 대체해야만 하겠습니다)
2020년대의 인물인 '수'가 유행이 한참 지난 피트니스 부문인 에어로빅 쇼의 스타 자리를 탈환하는 전개 또한
80년대 전성기를 구가한 '엘리자베스'의 욕망이 투영된 결과로 볼 수 있겠습니다�
# 몬스트로 엘리자수
최종 변환된 몬스트로 엘리자수는 두 사람이 결국 하나라는 서브스턴스의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번 분열한 자아의 결과물인 엘리자수, 어떻게 보면 세 버전 중에서 가장 유아적인 욕망까지 내려간 결과물 같기도 하죠.
신데렐라를 연상시키는 푸른 드레스를 착용한 엘리자수를 보세요. 귀걸이를 매달 곳이 없어서 대충 귀가 있던 자리에 뾰족한 귀걸이를 바늘처럼 찔러 넣는 디테일에서 저는 감탄했습니다. 맨살에 쇠붙이를 찔러 넣었는데 엘리자수는 움찔하지도 않아요. 그저 반짝이는 보석에 탄복한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찰랑거리는 귀걸이에 반사된 빛을 보려고 고개를 흔들고 있습니다. 동화 같은 음악이 은은하게 깔리고, 짤랑거리는 효과음도 흘러나오고요.
그 장면에서 엘리자수는 참 순수해 보였습니다. 꼭 대중에게 환영받을 거라고 믿는 거 같았죠. 실제로 그 순간에는 묘한 사랑스러움이 있었고요. 그 장면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사랑받기 위해 수없이 통증을 겪어온 여자들에게 신체 훼손은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하지만 무대에 오른 엘리자수의 조악한 종이 가면이 팔랑, 하고 떨어지자 사람들은 요란하게 비명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피칠갑을 한 피날레가 시작되고, 엘리자수의 몸이 부수어지는 동안 객석에 분출되는 다량의 피는 그 자리를 차지한 모든 사람에게 뿌려지죠. (저는 이 부분이 앞서 주장한 '현대인의 원죄'라고 해석하고 싶어요�)
이렇게 한 때 오스카를 수상했고 ‘인생을 빛나게 하라’는 메시지로 매주 아침 TV 피트니스 프로그램을 장기 호령했던 왕년의 대배우는 할리우드의 어느 길목에 파편처럼 흩어집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사념만큼은 질기게 남아서 명예의 전당에 안장되지요. 최후의 미소에는 회한도, 분노도 아닌 해소의 감정이 담겨 있었어요. 부서지고 잊히기 전에 자기 자신을 쪼개어 극한까지 몰고 갔으니, 누가 그를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요?
#영화와 영화 밖
<서브스턴스>의 리얼리티를 강화하는 가장 큰 축은 엘리자베스를 소화한 배우 데미 무어입니다. 9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한 무어는 <사랑과 영혼>, <지, 아이, 제인> 등의 대표작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업계에서 무어는 연기 활동 자체보다 가십으로서 소모되었습니다. 브루스 윌리스와의 첫 번째 결혼, 그 후 연하의 애쉬튼 커쳐와의 두 번째 결혼과 겹쳐 무어가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전신 성형을 했다는 가십이 계속해서 재생산되었고요. 그 결과 무어에게는 ‘젊음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여배우’라는 이미지가 붙게 됩니다. 가끔 근황이 전해지면 연예지는 조소하는 논조로 데미 무어의 외적 변화에 주목했죠. 감독 코랄리 파르자가 무어에게 <서브스턴스> 프로젝트를 제안하기 전까지 그녀에게는 마땅한 재기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2025년 1월, 데미 무어는 골든글로브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수상 소감에서 무어는 자신이 팝콘배우(상업적 영화로만 소모되는 얕은 배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언급했었죠. 이제는 우리 모두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
코랄리 파르자 (Coralie Fargeat) 1976년 출생, 프랑스 출신
대표작 <서브스턴스>, (2024), <리벤지>, (2017)
<서브스턴스>는 프랑스의 여성 감독 코랄리 파르자의 오리지널 각본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파르자는 현재 장르 영화 씬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예 감독 중 한 명으로, <서브스턴스>는 데뷔작 <리벤지>에 이은 두 번째 장편 영화입니다. 사실 <서브스턴스>는 파르자가 2015년 제작한 단편 SF영화에 베이스를 두고 있습니다. 원안에서는 ‘리얼리티 플러스’라는 뇌 이식 칩을 통해 사용자가 이상적인 체격, 외모, 목소리로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설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하네요.
코랄리 파르자는 <서브스턴스>의 각본을 쓰고 연출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촬영, 편집 제작에 관여했습니다.(영화계는 새로운 작가주의 감독의 탄생을 보고 있군요!)
실제로 드레스를 입고 엘리베이터에서 붕괴되는 씬에서 감독은 액션캠을 쓰고 직접 수를 연기하기도 했습니다. 또 엄청난 양의 가짜 피를 뿌리는 피날레 씬에서는 본인도 호스를 붙잡고 피가 튀는 위치와 디테일을 조절한 끝에 해당 장면을 원 테이크만에 성공시켰다고 하죠.
또한 영화 속 LA를 경제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하기도 했습니다. 실제 촬영은 프랑스에서 진행했다죠. 로케이션 지출을 아낀 덕에 집중해야 하는 장면들에 비용을 효과적으로 집행할 수 있었다고요. 작은 스튜디오에서 명예의 전당 바닥 세트를 지어 부감으로 찍고, 야자수를 몇 그루를 구해서 할리우드의 상징적인 모습을 표현했다고 해요. 꽤 영리한 방법이지요.
25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최대 화제작 중 하나였던 <서브스턴스>. 여우주연상, 각본상 등 여러 부분에서 수상을 점쳤지만 결과적으로 분장상만을 수상하면서 후일담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한편 <서브스턴스>의 성과는 국내에서 특히 두드러졌습니다. N차 관람 열풍을 이끌며 누적 관람객 56만 명을 돌파한 결과 수입배급사 찬란의 최대 흥행작에 오르기도 했지요. 올해 하반기에도 <어글리 스텝시스터> 등 흥미로운 바디 호러 영화가 공개를 앞두고 있습니다. <서브스턴스>가 쏘아올린 기대는 어디까지 갈까요?�
이 글은 영화 에세이 메일링 서비스 <김레이의 제철영화: 겨울 편> 원고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