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래된 도끼병이 있다.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이상한 감각.
2.
제발 자리를 비워줘…. 연희동 언저리에 위치한 미드센추리 풍의 칙칙한 카페에 앉아서 창가 바 자리를 탐내는 중이다. 노트북을 올려두기 위해 차선의 차선으로 얻은 한아름 정도의 까만 이인석 테이블을 차지하고도 여전히 만족을 모르는 채로. 현재 시간은 4시 45분이고 오늘치의 해는 반차라도 내셨는지 도로 얼굴을 비출 기색이 없다. 희미한 광량이라도 가까이 두고 싶어서 자꾸만 고개가 올라간다.
굴곡진 유리잔에 담긴 시큼한 커피는 파우더리하고 피로를 몰아내기엔 턱없이 연하다. 향이 그럭저럭 좋으니 그나마 위안인가. 건조한 안구를 꾹 눌러 감으면서 흐릿한 글자들이 제대로 타이핑되고 있는 건지 확인하고선 시선을 도로 올려 가방을 치울 기미가 없는 달콤한 말씨의 커플과 조용하고 구부정한 아가씨의 뒤퉁수를 간절하게 올려다본다. 돌담처럼 왼쪽으로 올라붙은 아가씨의 말린 어깨로 짐작하건대 가방으로 영역 표시한 울타리가 내려갈 일은 없을 것이다. 벌써 두번째로 자리를 옮긴 유학생들이 내 옆에 연인처럼 가깝게 앉아 노트를 펼친다. 담소 나누는 소리가 자글거리는 라디오 같다.
재생 무슨 원료로 만들었을 법한 얇은 필름 재질의 빨대를 입술로 지근지근 누르며 생각한다. 차선은 싫은데. 예전에 독립 영화관을 찾아갔다가 근처에서 우연히 찾아간 널찍한 카페를 생각하며 버스를 타고 꾸역꾸역 연희까지 왔는데. 나의 휴일은 타인의 휴일이기도 하다는 간단한 규칙을 까먹고 있었다. 입구에 매정하게 걸린 ‘만석’ 팻말에 벙찐 눈썹을 애써 원위치 시키고 스타벅스가 아닌 곳을 찾아온 결과 나는 온통 검은색과 회색조로 된 공간에서 광원처럼 빛을 내는 워드창을 띄우곤 복잡해진 마음을 솜사탕처럼 씻고 있다….
이렇게 보내면 안됐는데. 유일하게 혼자 보낼 수 있는 귀중한 날을 미적거리다가 허비하다니. 잔잔하던 마음에 거센 파도가 인다. 헤픈 쇼핑객처럼 고요를 갈망하는 나의 보상심리를 몰아 담기에 14시간이라는 자루는 턱없이 작다. 매운 실망감에 나른하던 정신이 진동하고, 실수로 전자레인지에 돌린 포일처럼 화가 번쩍 튄다….
벌떡 도어를 열자 얇게 피는 연기만 있다. 환기한다. 여기까지 적고 나니 화라고 명명하는 것이 공정한가? 싶다. (설명: 내 인성의 연료는 잠이고 이 모델은 연비가 낮다. 한편 근-회복 진영과 뇌-회복 진영이 턱없이 부족한 배급표를 두고 내전을 치르는 중이다…) 내 안의 온화한 녀석, 느긋하고 제멋대로이며 의아할 정도로 낙관적인 자아가 부쩍 험악해진 오후의 나에게 잔든건을 한다. 진정해. 너 이번주에 처음으로 8시간 잤잖아. 좀 일찍 자라.
오늘의 멋진 점을 상기해보기로 한다. 일단 잤다. 많이. 아픈 곳도 없다. 복부에 반점처럼 돋았던 두드러기도 조금 들어갔고, 기운이 돌 때까지 따뜻한 차를 여러 번 들이켜기도 했지. 요리를 하지 않았고 아주 맛있는 샐러드를 배달시켰다. 어떻게 조리한 건지 구운 야채의 밀도와 염도와 수분감이 탄성 나올 정도로 조화롭다. 오늘은 고구마와 단호박이 한 덩이씩 더 있었으므로 에너지를 덜 쓰고 더 넣은 셈이다. 그러곤 스트레칭하고, 어물쩡대며 오늘 치의 도시락도 싸고, 회화 앱을 켜고 외출 준비하는 동안 입에 붙지 않는 표현을 중얼거리면서 하늘색 원피스를 가운처럼 몸에 두르고 나왔다. 이렇게 연희동까지 흘러와 차선의 차선 좌석에 앉은 나는 이 대목에서 합리화에 성공한다. 해가 떠있는 시간에 동면에서 깬 곰처럼 어슬렁거린 동작도 사실 회복에 쓰는 것이었다고, 소근거리던 유학생 아가씨들의 볼륨이 높아져서 고개를 드니 다정한 커플들이 드디어 둥지를 떠나려는 모양이다. 중화권에서 온 두 마리의 매가 날쌔게 빈 의자를 차지하는 것을 본다. 너희도 자연광이 필요하구나.
이어 장시간 뜨거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아가씨도 출입구를 나선다. 얌체처럼 자리를 옮기고 나니 미세하게 따뜻해진 온도에 약간의 기쁨이 돈다. 연하게 녹은 커피를 마저 새 음료를 시키러 일어난다.
*25년 여름에 적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