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한 글을 얼마 만에 적는 건지. 머릿속 잡동사니 바구니를 정리하지 않고 한 달 정도 방치했다는 걸 방금 인지했다. 어쩐지 갑갑하고 자주 지치더라니. 2025년의 1/3이 지났건만 이제야 한 해의 사이클을 마치고 다시 초입에 들어온 기분이다. 흐물텅한 시간 감각을 가장 많이 두드리는 건 계절의 온도와 풍경이다. 봄이라 부르기에 아주 적절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해가 길어졌고 바람은 부드러우며 가로수에 돋은 연두색 깃털은 점점 짙고 튼튼해진다. 이른 아침이나 느지막한 저녁에는 아직 서늘해서 외투를 걸쳐야 하지만 대체로 가벼이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보드랍고 맑은 날들. 외투 깃을 여미던 날들을 여전히 떠올리게 하면서도 혹독하지 않은 날씨들이 반갑고 귀하다. 뭐든 시작하기에 유리한 부스터 같아서.
요즘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기상 후 달리기를 해보고 있다. 이렇게 유행에 동참하는가 싶어 조금 민망하지만 빠릿빠릿 걸어서 10분 어슬렁어슬렁 걸어서 15분 거리의 헬스장에서 오전 유산소를 하는 것보다 6분 뛰어서 샛강역 둔치를 달리는 게 시간적으로 더 효율적이라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생각의 패턴을 파악하고 정리 습관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목적도 있는데… 아침잠이 많기에 적어도 8시에는 나가보자는 시도로 알람을 맞춰두고는 번번이 실패한다. 이상하게 일찍 일어나도 그렇다. 아침을 뭘 먹네, 방 정리를 하네, 적절한 두께와 색상의 운동복을 고르네. 아, 빨래 돌리고 갈까? 그런 불투명한 생각 블록을 쥐고 있는 사이 시간은 훌쩍 흘러서 금세 10시, 11시가 된다. 오늘도 공쳤구나. 성공하는 날보다 실패하는 날이 누적되면서 나름의 파훼법을 (머리로만) 터득한다. 이건 생각을 않고 나가야 되는구나. 세수하고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선크림을 바르고 손에 잡히는 무던한 운동복을 걸치고 이어폰을 귀에 쑤셔 박고 곧장 나서야 된다. 나머지 의식은 해가 깨워줄 것이다.
바깥공기가 폐를 채운다. 우선 걷는다. 공사장과 터널을 지난다. 여의도로 진입하는 다리가 보인다. 애증의 KBS 건물에 걸린 대형 현수막에 새로 런칭한 프로그램 포스터가 걸려있다. 이번엔 드라마 <24시 헬스클럽>이다. 타이타닉 구도를 취한 남녀가 꼭 밀착해 있는 이미지가 보인다. 잭, 날게 해 줄 건가 보죠…? 양손에 원판 끼운 바벨을 쥔 씩씩한 아가씨가 초점 없는 미소를 지으며 우측 15도 각도 위의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무게 중심과 힘점이 위험할 정도로 멀어진 어정쩡한 자세가 영 신경 쓰인다. 그 뒤에는 트레이너 역할의 남자 배우가 보조를 해주려는 듯 부드러운 목각처럼 서 있다…. 아니 자세가 이렇게 불안한데 왜 회원님 안 보고 먼 산 보고 있지요. 하여간 밀착한 두 청춘남녀의 신체가 무색하게 로맨틱한 상호작용이나 끌림은 느껴지지 않고 표정에선 희망찬 미래를 설계하게 되어 진공스러운 행복을 연기하는 Hug 신혼부부 홍보물이 연상된다. 사실 제목도 좀 그래…. 24시간 아무 때나 상시 호르몬 사업하라고 하는 거 같아서 다소 숭하다. 김난도 교수의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에서 언급된 키워드들이 관공서의 문서철을 모험하고 1년 동안 심의와 숙성을 거쳐 저출산 대책 미디어 프로젝트로 태어나면 이런 기획으로 빛을 보는 걸까. 여하튼 드라마 보지도 않고 정상가족 재생산 프로파간다일 거라고 의심해 버린다. 피디는 좀 억울하겠죠. 그렇지만 이 드라마를 보고 국가 인구 계획에 협조해 주어야 할 MZ들은 아마 방영 시간에 TV 앞에 앉아있는 대신 연애 프로그램을 보거나 웹소설 보면서 유사 연애하고 있을 거 같은데.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는 아닌지. 혹 어쩌면 기성세대가 청년 세대를 어떻게든 독해하고 다시 써보려는 눈물겨운 노력일지도 모른다. 더 도라이 같은 소리 해보자면 공영 방송 드라마의 주 시청층인 중년 여성의 억압된 성적 욕망이 헬스 ‘클럽’과 헬스라는 ‘건전한’ 행위를 매개로 대리 해소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그 사이 다리를 반정도 지났다. 이젠 내가 생각이 많고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걸 받아들인 채 사는 중이다.
이런 사람들은 좀 힘을 뺄 필요가 있다. 땀을 좀 흘리면 생각이 좀 걷히겠지. 걷는 속도를 높이고 계단을 내려가면서 러닝 거리 측정 어플을 켠다…. 뛰기 전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의 컨디션과 환경을 체크한다. 그림자가 진 공터에 드문 드문 사람이 있다. 땅은 잘 말라 있고 내 근육의 온도는 아직 서늘하다. 그럼 뛰어야죠.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답니다. 자전거 트랙 옆에 조그맣게 난 붉은 길을 박차고 뛰기 시작한다. 맞은편에서 선글라스를 낀 라이더들이 로드 자전거를 타고 슈우웅. 지나간다. 정면 봐야지. 이상하게 상대가 느리게 지나갈수록 또렷하게 앞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노래 한 곡이 끝날 때까지 뛰어 보려다가 숨이 가빠지기 전에 속도를 줄인다. 사실 더 뛸 수 있으면서. 무리하는 게 싫어서 느릿하게 뛰다 빠르게 걷다 하며 타협하고 몰아붙이는 시늉을 몇 번 해본다. 그렇게 최대 체력의 10%만 쓰고 국회를 여의도 역 근처 지점에서 다시 우회한다. 대부분의 장소가 으레 그렇듯 시간과 공간 특성상 평일 여의도 샛강 공원 근처에는 특정한 유형이 분포하므로 아래와 같은 NPC를 마주칠 수 있다. 샐러리맨, 중노년 사람들, 장비를 갖춘 그을린 피부의 러너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화이트 셔츠에 쥐색 슬랙스를 입은 여의도 증권맨들이 점심 산책 나와서 침착하게 아아메를 핥고 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들. 그러다 물비린내 풍기는 흙길 사이를 뛸 때, 팬지꽃처럼 채도 높고 선명한 점퍼를 입은 중년 여성들을 마주치고 비스듬히 빗겨 나서 뛴다. 건강하고 근심 없이 화사하게 웃는 표정이 소녀 못지않다. 언젠가 샛강역 앞에서 인근 주민 할머니에게 붙잡혀 호구조사 당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며느리께 아직은 아파트를 증여해주지 않을 거라고 자랑스레 말하던 꼿꼿하고 송곳처럼 마른 할머니…. 숨이 차지만 사람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꾹 참고 시야에 사람 없어질 때까지 달린다. 귀에 꽂은 에어팟에서 AI 스러운 목소리가 시간을 알려준다. 달린 시간 이십, 오 분. 1킬로당 육, 분. 사십, 팔, 초. 알겠다고…. 여기서 한 바퀴만 더 뛰면 나아질 거 같은데. 출발지점에 다시 도착해서 호흡을 가다듬는다. 사실 체력 남는데. 한 번만 더 돌까? 그러곤 뛰지 않은 반대 방향을 쳐다본다. 괜히 좀 더 긴 루트처럼 보인다. 아냐. 피곤할 거 같아. 짧게 뛰고 자주 오자. 나는 결코 무리하지 않으며 지루할 만치 내 몸을 사린다. 그리하여 늘 갔던 지점까지만 가고 돌아온다. 아직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