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는책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즈 uze Jul 19. 2019

<솔직함의 적정선>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로 고민할 때

이런저런 에세이들이 참 많이 나와 있다. 그중에는 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만화가, 웹툰 작가 등 글과 그림 재주를 고루 갖춘 이들의 책도 많아서 서점 가판대가 화려하다. 백두리 작가의 이 책도 그간 접했던 몇몇 책처럼 담백하거나 유머러스한 분위기겠지 가볍게 생각하며 열었지만 끝에는 만만찮은 무게감을 느끼며 덮었다.      

<솔직함의 적정선> 백두리 글, 그림. 사이행성 펴냄


느낌 좋은 일러스트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다음엔 뭔가 의미심장한 제목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솔직함의 적정선이라...’ 솔직함. 적정선. 나란히 있는 걸 거의 본 적 없는 두 개의 단어가 조합되어 있어 처음에는 쉽게 입에 붙지 않지만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쭉 같이 가야 할 운명의 한 쌍처럼 여겨진다. 다들 속으로 뱅뱅 돌리고 있었던 두 가지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 또 연결시켜 마음속 사전에 올려주니 속 시원하다.     

 

얼마나 감추고, 얼마나 드러내야 할 것인가. 이 사람에게 어느 정도 솔직해야 할 것인가.      


가족, 친구, 연인 같이 가까운 사이부터 직장 상사, 아파트 이웃처럼 애매한 사이, 택시 기사 아저씨와 식당 아주머니 같이 찰나에 스치는 인연까지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늘 고심하게 되는 화두다. 작가는 일상에 기반해 촘촘하고 치열하게 써낸 73개의 에피소드들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판단하는 솔직함의 다양한 얼굴들, 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단계로 세분된 적정선의 지형도를 보여준다. 가슴 한 켠을 쓱 훑고 지나가는 듯 드라이한 분위기의 일러스트는 텍스트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깊이를 더해준다. 그가 이끄는 솔직함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생각에 잠기게 된다.      



작가는 솔직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솔직함에 대한 고민은 곧 소통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상대에게 내 감정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어떻게 표현하며 어디까지 공유해서 어떤 관계가 될 것인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더불어 문제가 있어도 타인과의 관계처럼 곧바로 드러나지 않는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 문제이기도 합니다.” -서문-

  

솔직함과 짝을 이루는 적정선에 대해서도 고민을 거듭한다. 작가에 따르면 적정선은 경계선을 정확하게 그어 범위를 규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모호함, 평균점과도 공통점이 있다. 이 셋은 비슷해 보이지만 희미하게나마 다르다고 한다.      


“모호함은 다른 이의 방향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휘둘리고 자신만의 별다른 특징은 없어 보인다. 특징이 없는 바람에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아 어디에도 끼워 넣기 불편한 존재다. 평균점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만큼 존재감이 적다. 무난하게 잘 묻어가고 그럭저럭 문제없이 흘러가지만, 남들의 속도를 보며 중간쯤 쫓아가느라 개성이나 매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에 비해 적정선은 다르다. “적정선은 절대 튀지 않지만 조용하고 묵직하게 어디서나 존재감을 뿜어낸다.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유연한 태도를 보이는데 그 중심에는 자신이 있다. 다른 이들과 함께 길을 가면서 상황에 따라 방향을 쉽게 바꿀 수 있는 속도로 자신만의 계획을 세워놓는다.”     


나라는 존재가 없는 모호함, 나를 남이 정해준 평균점, 다른 이에게 맞출 줄 알지만 나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적정선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적정선의 중심에는 내가 있다.  


솔직함과 적정선에 대해 자신만의 생각이 있어도 늘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 1부 ‘나의 적당함 너의 적당함’에서 작가는 종이 한 장 차이로 냉탕, 열탕을 오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P60 “적당함을 찾는 것은 봄 옷차림을 고르는 과정 같다. 내 마음이 하고 싶은 것과 내 몸이 직접 느끼는 것, 사람들 각자마다 생각하는 기준, 현실에서 보여주는 기온의 수치, 실제와 다르게 관념 속에서 생겨난 이미지를 포함한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담아내는... 이거다 싶은 게 없다.

그래서 묻는다. 대체 뭐가 적당한 거야?”  -적당함-

  


2장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거든요’에서는 솔직함의 점수, 간 보기, 솔직함과 TMI의 경계, 제한적 솔직함, 거침없는 솔직함, 수평적 관계에서의 솔직함 등 다양한 시선에서 솔직함, 그리고 적정선을 탐색해본다. 그에 따르면 “올바른 관계는 물줄기가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상태가 아닌, 좌우를 왔다 갔다 하며 물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 상태다. 위아래가 없는 수평관계라야 솔직한 생각을 말하기 좋다. 수평관계가 되는 방법은 우선 솔직한 마음부터 털어놓는 것이다. 앞뒤가 결국 하나인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이어지는 3장 ‘꿀꺽꿀꺽 말을 삼키는 중입니다’에서는 어디까지 솔직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거나 숨기다가 스스로 불안하고 외로워지는 모습을 담았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공감이 되었던 장이었다.

      

P160~161 별로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말한다고 나의 우울함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다들 살기 버거운데 내가 하는 이야기들은 어리광처럼 들릴 거라고 혼자 단정 지었다.(중략) 마음의 아픔은 상대적으로 판단할 수 없으니 내 것과 다른 이의 것이 비교 대상이 아님을 알면서도, 남들이 볼 때 나의 아픔은 별 게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울한 감정은 대화에 넣지 않기로 했다.(중략) 행복감의 정도도 검토했다. 그들은 지금 답답한 현재와 보이지 않는 미래로 팍팍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눈치 없이 신나는 내 감정만 내세울 수는 없었다. (중략) 행복한 감정도 대화에 넣지 않기로 했다.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점점 말을 줄였다.      


이 장 ‘혼자 하는 숨바꼭질’에서 작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마음이 아직 단단해지지 않은 어린 나이에 힘든 일을 겪은 뒤 한때 숨을 편히 쉬지 못하는 증상을 겪었으나 인정하지 못했다고. 괜찮아지지 않으면 안 됐고, 괜찮아질 거라고 믿어야만 버틸 수 있었던 하루하루가 몸에 새겨져 자기 상태를 부정했다고 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다고.      


슬픔이 떠오르려 할수록 더 크게 웃었던 작가는 어느덧 다른 사람들 역시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괜찮은 척, 아무런 일 없이 지낸다고 생각해 밝은 얼굴 뒤로 어떤 상처와 아픔이 있을지 먼저 살폈다고 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때그때 느껴지는 감정을 되도록 솔직하게 밝히고, 거침없이 생각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도 다른 면에서는 피하고 싶어 묻어놓은 무언가가 존재했기에 균형이 맞았을지도 모른다고.      


이런 사람이 한 명 정도는 떠오를 것이다. 늘 아낌없이 이쪽 말을 들어주며 조언하고, 잠깐 스쳐가는 표정까지 세심하게 캐치해 주는 사람. 그래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인사와 함께 돌아선 뒤 그때서야 ‘오늘도 내 말만 했구나. 먼저 보자고 했었는데 나한테 할 말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그런 사람들. 상처와 아픔을 속으로 더 깊게 숨기고 웃기만 하는 사람들.      


이 장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작가는 말한다.


P178 “본인이 선택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또는 주변이 만들어놓은 이미지에 갇혀서 두렵지 않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이 오기도 하지만, 두려움을 말한다고 해서 내가 이뤄놓은 것들이 당장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차마 말하지 못했던 내 외로움과 불안감을 이렇게 털어놓는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고 위로받을 수 있길 바란다.

마지막 장 ‘뱉고, 토하고, 털어낸다는 것’에서는 이것저것 마음에 걸리고 주변을 신경 쓰느라 입안에서 돌리고 돌려 억지로 삼켰던 솔직한 말, 꾹 참아왔던 말을 발설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가 터진다. 낯선 이에게 털어놓기, 알코올의 힘을 빌린 취중진담, 뇌에 에러가 난 순간 갑자기 쏟아진 다듬어지지 않은 말들, 내 생각이 맞다는 강한 확신에서 비롯된 밀어붙이기, 불합리한 상황이 부르는 짜증... 여태 세심하게 적정선을 탐색했건만 어쩌다 보니 평소 한도를 넘은 솔직함이 빚어낸 참사들. 이미 일어났으니 뭐든 본인이 쓸어 담고 치워야 하는 민망한 상황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닌 척,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뒤에 숨겨진 진짜 감정에 관심이 많고 이를 그리고 있다는 백두리 작가. 늘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은 마음과 이런 나를 인정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동시에 꿈틀대는, 어쩔 수 없이 약한 우리의 모습을 계속 그려나간다고 한다. 특히 밑의 글에 공감 가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좋을 것 같다.      


어떤 것은 꼭꼭 숨겨도 눈치 없이 드러나고.

어떤 것은 조금씩 새어 내보내는데도 누구 하나 알아채지 못한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미지 출처 / 사이행성 공식 카드뉴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정신병에 걸린 뇌과학자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