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 서적의 대명사가 '조직 내에서 일 잘하는 법'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 하면 내 시간과 노력을 빼먹는 이들을 피해 갈 것이냐, 나아가 이노무 회사에서 빨리 나가서 1인 브랜드로 자리 잡을 것인지 알려주는 책들이 더 많다. 그만큼 남들도 주목할 만큼 '일잘러'라면 누군가 와서 빨대를 꽂을 확률이 높으니 알아서 피하자는 분위기가 대세인 것. 문제는 실무자형 인간의 경우 이런 공격에 가장 취약하다는 점이다. 백상아리가 우글거리는 바닷속에서 피 냄새를 풍기고 있는 모양새랄까. 결말은 늘 본인에게는 새드엔딩이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해피엔딩이다. 마무리 회식에서 너 나할 것 없이 옆에 와 '수고 많았다'고 치켜세우며 술 한 잔씩 따라주면 잠깐 잊혀지지만, 원치 않았던 그림자 노동으로 받은 상처는 어느덧 차곡차곡 쌓여 덧나고 만다. 게다가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호의가 거듭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실무자형 인간의 슬픈 점은 자발적으로 일을 번다는 것. 그 원인은 스스로 설정한 기준과 이에 따른 디테일을 준수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21세기에는 영 보기 힘든 장인정신에 기반한 자신감이다. 물론 본인의 일에 자부심을 갖는 건 좋은 일이다. 대체적으로 업무 성취도가 높은 편인 실무자형 인간은 거듭되는 성공 경험을 통해 자기 스타일이 먹힌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래서 사업의 비전부터 전략 수립, 기획과 실행, 평가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걸쳐 세부적으로 가다듬은 자신만의 업무 프로세스를 정리, 발전, 진화시켜 매 업무에 적용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지경에 이른다.
문제는 철저히 자기 위주로 맞혀놓은 그것을 자꾸 회의 때 꺼내놓는다는 것. 자료조사는 이렇게, 그 팀은 내가 아는데 뭐가 문제고, 행사 프로그램은 저번에 했던 것이 반응이 좋았고 어떻고... 대부분 아무 생각도 없고, 뭐든 하기 싫은 상태에서 모여든 사람들 속에서 이것저것 군말을 붙이는 실무자형 인간은 딱 눈에 띈다. 상사나 동료들이 '그럼, **씨가 좀 알아서 해보세요'라고 말하는 건 당연한 일. 이때 신바람이 나서 초기 기획서부터 맡기로 했다면 차라리 낫다. 어차피 하는 고생, 이름이라도 남을 테니까. 더 안 좋은 경우는 그야말로 '실무'만 맡는 경우인데 이는 구성원들, 특히 동료 중에 '큰그림파 인간'이 있을 때 딱 맞아 들어간다.
'큰그림파 인간'은 '실무자형 인간'과 마찬가지로 보스부터 인턴까지 다양한 직급에서 발견되는데 주로 한창 조직 내에서 생존 기술을 터득한 3년 차 이상에서 많으며 같은 직급일 때 가장 위험하다. 이름에서 느껴지듯 자신의 능력 및 포부는 너무나 하이퀄리티이기 때문에 조직 내에서 걸맞은 일은 전체 큰 그림을 그리는 정도는 되어야 하며 나머지 일은 실무에 능한 다른 이들이 맡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런 인간들은 자기가 볼 때 의사결정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주로 상사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정보를 수집한 뒤 돌아와서 별 것 아닌 이야기도 의미심장하게 흘리면서 업무 시간 대부분을 보낸다. 지금 맡은 일은 어찌 되었냐고 물어보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그런 일은 이번 프로젝트의 전체 방향성에 마이너한 요소일 뿐이다"는 식의 멘트를 날린다. 큰 그림을 보란 말인데 다 개소리임. 그러나 인정 욕구가 강한 만큼 눈치가 빠르고 얕은 재치가 있는 편이라 진짜로 가끔 아이디어 몇 개로 안타를 치기도 한다. 남들 노가다 뛸 때는 잠수 탔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해 존재감을 뽐내는 스타일로 실무자형 인간한테는 그야말로 천적이다.
실세들과의 토킹 어바웃 말고는 다 비천한 일로 치부하는 '큰그림파 인간'에게는 실무자형 인간이 설파하는 업무 프로세스 및 이에 따른 사항들은 보고서 폰트를 나눔고딕으로 할 것인가 맑은고딕으로 할 것인가 정도의 수준으로 들린다.(물론 폰트가 중요한 조직도 있다) 무엇보다 쭉 듣고 있다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며 문제는 전체 콘셉트'라고 말하면 굉장히 쿨하게 들리며 '큰그림파 인간'은 이런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회의가 끝나고 나면 어느덧 실무자형 인간은 전체 프로젝트의 절반 이상을 혼자 떠맡는 동시에 '큰그림파 인간'을 포함한 나머지 팀원들에게 공유하기 위한 '현장 실무 매뉴얼' 작성 책임까지 짊어진 상태임을 깨닫게 된다. 아주 대놓고 '실무 담당자' 인증을 받은 셈.
분통 터지는 일이지만 그들 전부를 '진상'이라고 싸잡아 욕하기 전에 생각해 보자. '반면교사'라고 내가 보기엔 일머리도 형편없는 주제에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는 것 같지만 그들의 말에도 새겨들을 건 있다.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 과정 전체를 중요시해야 성과도 좋다는 의견도 맞지만 때로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서 선택과 집중을 하자는 의견이 맞을 수도 있다. 어느덧 내가 필수적으로 추가한 업무상의 몇몇 요소들이 그저 오래된 습관이나 집착이 아닐까 돌아볼 필요가 있다.
경험이 더 이상 확실한 무기일 수 없는 시대가 왔다. 우리가 혁신적이라고 평가하는 일들은 대개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오래된 프로세스를 깔아뭉개고 등장했다. 혹시 내가 그렇듯 혁신 뒤에 남는 존재가 되는 건 아닐까 고민해 보는 것도 좋겠다. 당신은 분명히 일을 잘 하지만,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다음 회의에서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아 답답하더라도 말을 좀 줄이고 의자에 손을 단단히 붙일 것. 그렇게나 큰 그림을 잘 그린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한번 구경이나 해보자.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