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일만 해도 하루가 저물어

함정 또는 한계 2 주어진 일만 하면서 스스로는 부지런하다 착각하는 것

by 유즈 uze

최근 방영되었던 예능 프로그램 <일로 만난 사이>에서 전남 무안의 드넓은 고구마밭에서 일하다 지친 차승원이 벌렁 드러누워 유재석에게 이렇게 말한다. “재석아! 너도 취미 없지?” “없지.”라는 대답에 그는 덧붙인다. “그렇지. 사람들이 나도 되게 부지런한 줄 아는데 사실 게을러. 일 말고는 딴 게 없어.”

일은 열심히 하는데 그 외의 시간에는 멍하니 보내는 것. 워커홀릭들이 다 그렇지 않냐고 하지만 유재석이나 차승원처럼 한번 집중하면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프리랜서라면 괜찮다.


문제는 조직 내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언제든 누구와도 호환이 가능한 실무자형 인간도 이런 경향을 보인다는 것. 실무자형 인간은 일을 참 열심히 한다. 단 ‘회사일만’ 열심히 한다.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자진해서 밤새워 보고서를 만들고, 새벽에 출근해 준비를 서두르는 사람들이 업무만 끝나면 좀비가 되어 주말 내내 집 침대와 한몸이 된다. 평일에 집으로 직행하는 건 당연한 일. 덕분에 복부비만, 고지혈증, 편두통, 불면증, 대상포진, 오십견, 목디스크, 자궁근종 등 스트레스와 직결되는 각종 질환의 보유자들이기도 하다.

그 사이에 숟가락 얹는 동료들은 평일에는 칼퇴해서 동호회 모임에 가거나 업계 행사에서 만난 다른 회사 사람들을 만나 네트워크를 넓힌다. 주말에는 브런치, 사이클링, 전시, 억새축제 등 뭐가 됐든 핫한 것을 하고 인스타에 올린다. “어머! 김대리님. 가족들이 참 좋아하겠어요!”


학교 교육 받는 20여년, 80세 이후 20년 빼고 근 60년을 일해야 하는 100세 시대에 먹고 살려면 평생 자기 커리어를 진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안다. 그게 어렵고 고단한 길이니 다들 수백대 일의 기적을 노리고 공시 준비를 하는 것이고.


직업심리학계에서 잘 알려진 학자 존 크롬볼츠는 개인 커리어의 80%는 예상치 못한 유발적 요인으로 결정된다는 ‘계획된 우연성 이론(Planned Happenstance Theory)’을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어떤 이에게는 우연적인 사건이 기회로 전환되기 때문에 장래 필요한 재학습과 도전, 기회를 찾는 작고도 다양한 실천을 통해 자기 커리어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뭐라도 쓰일지 모르니 배워두고, 누구라도 나중에 만날지 모르니 적어도 척지지는 말자는 이야기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만들어주는 그 우연성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특성을 가진 사람에게 일어나기 쉽다고 한다. 새로운 성장 기회를 찾는 호기심이 첫째요, 둘째는 실패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는 지속성, 셋째는 자세와 상황을 항상 바꾸는 유연성, 넷째는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라 믿고 이를 자신의 기회로 만드는 낙관성, 마지막으로 다섯째는 결과를 알 수 없어도 행동한다는 모험심이다. 어째 지속적으로 성실하긴 한데 경험에 기반한 매뉴얼에 집착하고, 인정욕구에 몸부림치며, 결과를 모르면 의기소침해지는 실무자형 인간과는 딱 맞아떨어지진 않는다.


무엇보다 이 다섯 가지 특성은 조직 내에서는 그닥 발휘할 여지가 없다는 것도 함정. 특히나 장래를 위한 준비는 회사에 다니면서 차근차근 해야 하는 것이며 이때 자신만의 가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업무상 경험을 뛰어넘는 재교육이 필요하고, 이런 노력의 결과 전직을 할 때는 평소 가까웠던 사람들보다는 안면 정도만 있는 건너 건너 지인이 주로 다리를 놓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친한 사람도 죄다 같은 회사 동료인 실무자형 인간보다는 명함 수집이 취미에 칼퇴하고 학원 다니는 다른 누군가가 더 유리하다는 이야기.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소속된 직장의 이름으로 자기를 설명하는 시대는 지났다. 자기계발 쪽에는 병행 커리어(Parallel Career)라는 말이 있다. 싱글 커리어(Single Career)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일본에서는 복업(復業)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취미, 동호회, NPO, 사교모임 등 업무 외 사회활동들이 포함된다고 한다. 배우 아니더라도 여러 개의 페르소나가 필요한 것. 역시 회사에 살고 회사에 죽는 실무자형 인간에게는 힘든 영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