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정쩡'한 게 문제야"
'작품'보다는 '콘텐츠'과라서 차라리 다행이라 느끼는 이유
일하다 만난 지인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이런 말로 결론이 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난 직업 분야를 한 번 바꿨는데 이 말은 주로 글과 그림, 사진, 영상 등 창작물을 '매개'로 하는 첫번째 분야 지인들과의 대화 속에 주로 등장한다. 순수 창작의 세계는 어느 정도 유명세가 쌓이지 않는 이상 전업 직업으로 삼기도 쉽지 않기 때문에 그쪽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들은 주로 이를 기반으로 한 출판, 영상, 미술 등 '산업' 안에서 일하면서 기회를 노린다. 에디터, 카피라이터, 스크립터, 마케터, 기획자, 디자이너... 크리에이티브도 필요하지만 또 적당히 실질적이어야 시스템 내에서 주어지는 수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직업들이다. 그래서인지 '작가님'들과 돈만 아는 나머지 것들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 과정에서 난 어느 쪽인지 계속 고민하며 진로가 갈리는데, 그때 주로 하는 말이 "나는 어정쩡하다"는 것.
이미 순수와 대중의 경계는 허물어진 지 오래이고, 작가들 역시 트렌드는 물론 대중의 잠재의식을 꿰뚫기 위해 철저한 자료조사와 기획과정을 거치는 시대. 그러나 아직도 한끗 차이는 존재하며 사실 그 한끗이 영원히 넘을 수 없는 마지노선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여러 플랫폼을 통해 수많은 웹소설 작가들이 데뷔하고 있지만 아직도 주요 일간지의 신춘문예를 비롯한 각종 공모전을 두드리는 사람들의 수 역시 엄청나다. 누구든 창작해서 발표할 수 있는 1인 크리에이터의 시대라지만 그럴 수록 더욱 희소성이 빛나는 '그들만의 리그'는 분명히 존재한다.
문제는 여기 들어가기 위해서는 참으로 고독하고 배고픈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점. 창작에 충실하기 위해 대부분 직장을 그만두지만 다니면서 작가의 꿈을 이루는 사람들도 있다. 여튼 독하게 정진해야 하는 건 맞는데 이때가 나 같은 어정쩡한 인간이 아웃하는 시점이다. 내 경우 첫번째 요인은 재능 부족. 일단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이 없다. 뭐든 소재와 이와 관련된 참고자료들이 있어야 한다. 그거야 모든 작품이 다 마찬가지 아니겠냐 하겠지만 '**월드'까지 안 바래도 어느 정도 이야기가 진전이 되어야 하는데 분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번에 브런치 북 프로젝트 할 때 걍 한 번 끼어봤는데(담당자님들 죄송..ㅠㅠ) 그래도 최선을 다해 엮어본 브런치 북 일독 시간이 꼴랑 35분이라는 점에 좌절했다. 확실한 주제가 정해져 있고 이에 대한 인터뷰, 취재 등이 버무려진 기사형 글 정도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포맷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두번째 요인은 첫번째 요인과 궤를 같이하는데 뭐든 돈으로 바꿔먹는 게 아니면 손이 안 나가는 습성이다. 그간 느껴오던 걸 쓰는 글이면 별로 손이 안 가니까 괜찮은데 본격적으로 뭘 써볼라 치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되는데 그게 잘 안된다.(돈 받고 하는 일은 엄청 빨리 한다는 게 함정) 뭐라도 해볼까 마음 먹었다가도 이 시간에 자격증 공부나 프로그램 툴 익히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사실 이런 속된 기질 덕에 수십년 직장 생활을 할 수 있긴 했다. 스스로 만들어 내기 보다는 남의 것을 알아보고 즐기며,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하기 보다는 주위 공기를 읽어내는 얕은 재주 덕에 사회에서는 그럭저럭 살아남을 수 있었다. '노오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지만 적어도 오롯이 자기가 승부해야 하는 창작의 세계에서 생존할 만큼의 재능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나마 이제 온갖 포맷의 창작물들이 '콘텐츠'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시대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작품'이라고 하기엔 함량미달인 내 결과물들이 그 이름으로 명명될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다. 그뿐인가. 소설과 시와 영화와 만화를 부러움이나 좌절감 없이 즐길 수 있어서, 자로 재듯 정확하게 측정할 수도 없는 재능의 한계를 고민할 필요가 없어서, 잡을 수도 없는 시간 속에서 하루 하루 나이 들어가는 현실을 더 불행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지난 주 서점에 갔다가 한 지인의 새로운 소설을 신간 코너에서 발견했다. 2년 전 한 문학전문 출판사에서 받은 신인상이 가장 비중있게 내세워진 커리어였지만 난 그가 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견뎌야 했던 일들의 일부나마 알고 있다. 한 달에 한번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을 마다하고 프리랜서로 매일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하면서도 꾸준히 썼던 성과가 이제서야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비중 있는 출판사에서 나오자마자 마케팅까지 활발하게 밀어주는 상황을 보며 누군가는 단순히 '부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간의 과정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다. 한 권 기분좋게 구입하면서 리뷰라도 써야지 생각하다가, 그만큼이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거나 견디다 못해 그만 두어 버린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온다.
적어도 불확실한 지금을 감내하면서 자기만의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면 그대로 밀고 나가시길. '어정쩡한' 저 같은 사람이 응원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