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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uze Feb 22. 2020

"어떻게든 버텨. 나오는 그날까지"  

1년은 신선하고 3년은 날아다니지만 5년은? 장기근속의 딜레마

요새 내 사정(그러니까 반백수 생활이 길어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지인들은 뭔가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애써 접어두는 듯한 눈빛을 한다. 뭔가 할 말은 많은데 '알아서 잘하겠지'라거나 '지는 오죽하겠어'라며 말을 삼키는 부모님의 그것과도 조금은 닮았는데 특히나 일을 대하는 자세나 노동의 패턴, 처한 환경 등이 비슷한 연배라면 더욱더 애틋해진다. 남 일 같지 않은 거지.


유유상종이고, 가재는 게 편이고, 끼리끼리 모인다고, 내 지인들은 일을 열심히 그리고 많이 하면서도 계속 욕심을 부리다가 남의 일까지 떠맡아 허덕허덕하는 워커홀릭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자세로 수십 년간 일해서 이제 나이가 30대 후반부터 50대에 이르렀고, 한 직장에서 적으면 5년 많으면 15년이 넘었는데 아뿔싸... 그냥 일만 하다 보니 시간이 갔을 뿐인데, 그 세월이 자기 발목을 잡게 된 것을 뒤늦게 깨닫고들 있는 '장기근속자' 군이다. (한 회사에서 오래 다녔든, 여기저기 짧게 옮겨 다녔든 나이 먹으면 다 장기근속자 취급을 받게 된다) '오래된 경륜에서 비롯된 지혜를 청년세대와 나누는 일' 같은 건 적어도 대기업에서 정년퇴직을 한 소수의 엘리트 시니어에게나 허락되는 일일 뿐 그럭저럭 실무자 및 중간관리자로 일하다 막연해져 버린 40, 50대 직장인에게는 해당사항 없음이다.  


물론 경험을 통한 숙련이 빛을 발하는 분야도 있을 테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산업 환경에서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 조금씩 자기 노동의 영역을 기술의 손에 넘겨주고 있다. 이런 추세에서 이전에 쌓았던 경험은 잘해야 직관이나 직감 정도의 효용가치를 인정받을 뿐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상태의 신선함보다 오히려 아랫길로 치부된다. 신선함을 누리는 일은 게다가 예산 절감 효과도 있다. 경력직 나간 자리에 쌩신입을 뽑는 게 당연하고 이로 인한 공백은 눈치 없이 '아직' 다니고 있는 다른 경력직들이 메운다. 이렇게 서서히 물갈이가 되는 것이 또 어찌 보면 순리이기도 하다. (윗분들은 이걸 조직이 젊어진다..라고 표현한다. 본인이 나가면 훨씬 더 빨리 더 많이 젊어질 텐데...


이 과정을 당사자로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속은 당연히 편안치 않다.  푹푹 떨어지는 체력으로 자기 일도 힘겨워진 상황에서 위와 아래 동시에 의식하느라 눈치껏 떠맡은 여분의 업무에 보이지 않는 감정노동까지 하다 보면 하루하루 진이 빠진다. 가장 괴로운 것은 어느덧 스멀스멀 자리잡기 시작하는 회의와 권태, 허무감이다. 그동안 나름대로 업무 능력이나 경험을 쌓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냥 '오래 다니셨네'라는 뉘앙스도 애매한 한 마디 말로 수렴되는 상황을 맞으면 '이게 다 뭔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단지 '오래 다닌 사람'이 되려고 여기 있었던 건 아닌데 말이지. 어느덧 새로 들어온 신입에게도 위축되는 느낌마저 든다. 그들의 서툰 실수나 좌충우돌마저 부러워하면서 혹여라도 '예전에는' '나 때는' '옛날에는' 이란 말을 안 쓰려고 병적으로 조심하면서 카페라테도 주문하지 않는다.


역설적인 것은 이렇게 오래 다닌 것에 눈치 보고 조바심치는 사람들은 대개 일을 잘하는 축이라는 점이다. 일을 잘하기 때문에 그만큼 길게 다닐 수 있었고, 앞으로도 더 잘하고 싶기 때문에 어느덧 익숙해진 업무 루틴과 변함없이 제한되어 있는 재량권에 좌절하게 된다. 계속 동기부여가 되려면 이미 잘하게 된 일을 기반으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더 큰 의사결정권도 가져야 하지만 전망은 어둡다. 심지어 더 환장할 일은 이런 결말이 그간 쉬엄쉬엄 자기 할 일도 제대로 안 하면서 세월만 보내던 비슷한 연배의 동기는 물론 그의 일까지 떠맡아 꾸역꾸역 해온 자신에게 공평하게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조직에서 일정 정도의 나이가 들면 개개인의 차별성은 사라지고 그저 도매급으로 함께 묶인다. '근속 20년 차 40대 차장급'. 이렇게 그룹별로 구분된 뒤 조직의 개선, 혁신, 리뉴얼, 리빌딩, 이노베이션의 국면에서 자원 절감이나 분위기 환기 차원에서 요긴하게 구사할 카드로 쓰인다. 특히 돈을 벌어오지 않고 인프라를 유지, 관리하는 사무직이라면 예외는 없다. 오죽하면 임원이 임(시직)원의 줄임말이라고 할까. 이런 추세는 경영 합리화 노력을 주기적으로 하는 큰 조직에서는 필연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나이 든 사람들은 중간이나 작은 규모의 조직에서 더 롱런할 가능성이 많다. 다만 상대적으로 적은 임금에 많은 업무량, 인원 부족(같은 이유로 젊은 층은 중소기업 및 조직을 기피한다), 프라이버시 침해 등을 감당해야 하는 경우가 많지만.  


나의 지인들 역시 이런 일들을 겪는 중이다. 경영 악화로 임금 중 일부가 삭감되거나 무급 휴가를 반강제로 권유받기도 하고, 오너를 초밀착 수행하면서 24시간 감정노동에 시달리거나 방문객 커피 준비부터 사업계획서 총괄까지 조직 내 대소사를 다 맡아하기도 한다.  일을 재미있어했고, 잘하게 됐고, 그래서 오래 다녔기 때문에 당연히 나이를 먹어서 겪는 상황이다. 어쩔 수 없다. 언젠가는 떠날 수밖에 없다. 다만 관건은 어떻게 떠날 것이냐인데...


경제경영서나 자기계발서에서 권장하는 해피엔딩은 회사를 다니면서 뭔가를 준비해서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멋지게 사표를 쓰고 이직, 전직, 창업, 창직하는 것이겠지만 쉽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아는 일. 설상가상 나이가 먹으면 체력도 떨어져서 루틴한 업무만 수행하기도 벅차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집에 가서 드라마 좀 보고 자는데, 이 세상은 또 '대책 없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고 질책하고... 솔직히 답이 없다.

 

난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을 한 40~50대 지인들에게 그냥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면서 한 달 한 달 벌라"고 말해주는 편이다. 이래저래 돈 들 일 많은 낀세대가 프리랜서로 나와 n잡러로 일해봐도 월급 이상 벌긴 꽤나 힘들다. 정해진 출퇴근 시간도 없이 밤낮으로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지레 지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애써본들 당장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그냥 맘이라도 편하게 지내자는 것이다. 모르는 일이다. 한 달씩 모아 6개월, 1년, 또 1년. 그렇게 모이다 보면 50을 지나 60까지 진짜 평생 다닐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안 되면? 몸도 마음도 도저히 안 되겠다고 비명을 지르게 되면 그때는 또 다른 결정을 내리면 된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지레짐작으로 전전긍긍, 자기 마음 같지 않은 주변을 아래, 좌우 할것 없이 사방 섭섭해하고 원망하다가 튕겨져 나가는 것이다. 향후 대책도 없이.


그냥 잘 있으라니 말도 안 된다고? 그렇다고 매일 언제 닥칠지도 모르는 미래를 생각하며 불안해하면 또 뭐가 달라지나. 회사가 정말 나를 자르고 싶어한다고 해도 운명의 그 날 전에 미리 이야기해 줄 리도 없다. 낌새를 먼저 눈치챈 동료들이 귀띔해 줄 가능성도 희박하다. 무엇보다 이미 너무 오래 다녔다며 불안해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덕분회사가 굴러간다'고 자신하는 이들보다는 현실감각이 있어 조금씩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있는 상태라는 걸 알기에 가능한 충고다. 지루하고 짜증나지만 머물러 있는 게 낫다고 판단된다면 박음질하듯 한 땀 한 땀 이어가면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도 필요하다. 늘 '최악'과 '마지막'을 대면하는 그때를 위해 아껴두는 평정심.




그래요, 직장 내 40대 이상 사람들은 늘 이런 마음으로 산답니다. 그렇게 선선히 운명의 그 날을 대비하는 선배들이 있으니 후배들은 좀 행복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으니 참 먹고사는 일은 각자 자리에서 어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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