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사태가 발발한 뒤 가장 먼저 문을 닫은 곳 중 하나가 바로 도서관이다. 장소 특성상 곳곳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한데 모여 앉아 책 돌려 읽고 공부하면서 호흡을 나누게 되는 집합시설인 데다 대부분 국가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공공기관이다 보니 거의 반년이 넘어가는 시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도서관의 문. 그래도 생활방역체제로 전환되면서 슬슬 도서관도 개방되어 5월 말 정도에는 띄엄띄엄이라도 앉아서 열람이 가능해지나 보다.
그전에 자리에 앉지는 못하지만 대출은 가능하다는 문자를 받고 잽싸게 동네 도서관에 다녀왔다. 혹시라도 앉을 까 봐 의자를 모두 치우고, 열람실로 가는 길목은 아예 셔터까지 내려 휑한 분위기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들어갈 수는 있었다. 체온 체크하고 명부 작성하고 나니 드디어 입성! 고민할 것도 없이 최근 들어온 책만 따로 모아둔 신간 서가에 가서 요새 읽고 싶었던 책들을 욕심껏 골라 빌렸다. "그래, 서점에서 봤을 때 금방 사지 않고 기다리길 잘했어! " 좋아하면서...
근데 뭐라고? 잠깐... 주변에 아직도 방망이 깎는 노인 심정으로 책을 내는 출판사 지인들도 많은데 이 배신자 같은 결론은 뭐지? 사실인지 소문인지 알 수는 없으나 어쩌다 주워들은 업계 소식에 따르면 잘 알려진 한 작가는 "도서관에서 당신의 책을 빌려봤는데 참 좋더라"는 한 독자의 댓글에 "왜 사지 않고 빌려봤냐"고 일침을 가했다고 한다. 그래도 독자인데 너무 야멸차다 싶기도 하지만 책 한 권 내는 데 드는 수고로움을 생각하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라서 다음부터 혹시라도 책 냈다는 사람을 만나면 도서관에서 빌려 봤다는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 다짐했던 에피소드였다.
대학 졸업하고 지금껏 모르는 내용을 얄팍하게 아는 척 가공하는 업종에 종사하다 보니 자료 조사 차원으로라도 책을 접할 일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소장해야 직성이 풀리는 애정 장르도 있다. 그래서인지 많이 읽지도 않는 주제에 소유욕은 만땅이라 그간 쟁여둔 책도 꽤 되고, 지금도 새 책이든 중고책이든 보기만 하면 사고 싶다.
그러나.. 현재 나의 독서 패턴 & 리뷰 상황을 고려한다면 솔직히 책 한 권 사지 않고도 독서생활 운용이 가능하다는 슬픈 결론이다. 굳이 지출을 하고 싶다면 월 정액제의 도서 앱 서비스 정도를 고려해 볼 정도일까. 시내 및 집, 학교 주변의 오프라인 서점을 이용하던 청소년 시절을 지나 1990년대 후반부터 생겨난 온라인 서점들의 상술에 꾸준히 놀아난 팔랑귀 고객 단계를 거쳐 뒤늦게 지역 도서관에 드나들기 시작하고, 전자책(이북) 입문에 이르기까지 그간 겪어온 과정을 돌이켜 보면 지금의 결론은 좀 허무하다. 적어도 괜찮은 책을 발견하면 언제든 지갑을 열 준비가 되어있는 독자로서는 말이다.
1. before 온라인 서점 / 각종 대형서점, 중소서점, 동네서점에서 책을 사다 쟁였다.
2. 온라인 서점 등장 / 오프라인보다 싸네! 포인트도 쌓이네! 배송도 해주네! 마구 이용하기 시작했다.
3. 도서 정가제 이후 굿즈 등장 / 평생 써도 남을 만큼 많은 북 파우치, 그냥 파우치, 머그, 북커버, 에코백에 하다못해 선풍기, 라디오까지 사들였다. 특히 이북 리더기를 구매한 이후에는 인쇄본보다 적은 금액을 구매해도 굿즈를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엄청 많은 이북을 사들였다.(차감되는 마일리지도 결국 내 돈인 것을...)
4. 온라인 서점에서 운영하는 중고서점 등장 / 짧게는 한 3개월 정도 기다리면 새 책을 싼 가격(막상 들여다보면 또 싸지도 않음 ㅠ)에 살 수 있다는 점에 흥분하면서 또 마구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갖고 있던 책을 야금야금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5. 지역 도서관 출입 / 집 주변을 시작으로 직장 주변, 시내 등 어느덧 자치구별로 총 3개 지역 도서관 카드 보유자가 되었다.
6. 온라인 서점 도서관 서비스 이용 / 온라인 서점 제휴 신용카드를 만들었더니 서점 내 온라인 도서관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8. 월 정액제 도서 앱 서비스 등장 / '밀리의 서재'까지는 반신반의했는데 예스24 북클럽 서비스까지 나오니 좀 솔깃해져 망설이고 있다.
아직까지 보고 싶은 신간이 나오면 구입하는 편이긴 하다. 월 정액제 무제한 구독 서비스까지 등장한 것이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당연한 결론이라는 기사도 봤지만 자꾸 없어지는 동네 서점들, 본전도 못 맞추는 출판사들을 보고 있으면 씁쓸하기도 하고... 그러나 기껏 구입해서 읽지도 않고 쌓아두다가 바로 그 책이 온라인 서점 도서관과 지역 도서관 신간 코너에 짜잔 나타나고, 중고서점까지 진출하는 걸 번번이 목격하면 '이렇게 늦게 읽을 거면 안 사도 됐을 텐데...' 속물 같은 후회를 하게 된다.
책은 예전에도, 지금도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대표적인 미디어다. 그래서 기사 등으로 관련 검색을 한 뒤 좀 더 파고들어 파악해야 할 때 책을 선택하곤 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진 것 같다. 웹, SNS, 영상 등과 경쟁하느라 책도 달라지고, 또 책을 대하는 사람들, 주변 환경도 달라진 것 같다. 적어도 나와 책과의 관계는 계속 변화 중이다.
1. 책을 '상품'으로 보게 되었다
외출할 때 한 두 권 들고 나가서 가까운 중고 서점에서 판매하는 일에 재미를 붙이니 가끔 사들이는 실물 책(?)을 읽을 때도 조심하게 된다. 사용감 없이 읽어야 가격을 높게 받겠지 싶은 것이다. 원래도 책을 접거나 줄을 긋거나 필기하는 것을 싫어해서 따로 메모를 하면서 깨끗한 상태로 보곤 했는데, 이게 중고 서적 판매자로서는 좋은 습관이었다는 웃픈 발견이었다.
2. 여러 권을 한 번에... 이것도 큐레이션?
누구나 주로 읽는 분야가 있기 마련이고 또 출판시장 전체의 트렌드도 있다. 저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주제로 나오는 책들은 상당 부분 내용이 겹친다. 그러니 한 권만 사서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게 어떨 때는 좀 시간이 아깝다. 한 권만 사기보다는 여러 권 동시에 훑어보는 게 더 효율적으로 느껴진다. 이 때문에 관심 주제에 대한 책들은 어느 정도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빌려 대조하는 버릇이 들었다.
3. 각종 도서관이 너무 잘 되어 있다 ㅠㅠ
몇 년 전부터 출입하기 시작해 이제 별 일 없으면 가는 곳이 되어버린 도서관.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험 준비생 및 백수들을 위한 소중한 안식처다. 너도나도 공부할 공간을 필요로 하는 통에 서울시, 각 지자체마다 도서관에 공을 들인다. 2017년에 문을 열었다는 마포중앙도서관(마포구청역 근처임)에 가본 적이 있는데 서울시 자치구 중 최대 규모라고 했다. 시설도 좋고 사물인터넷 기술을 적용한 미래체험 프로그램들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많은 자리가 다 차 있다는 게 더 놀라웠다. 하긴 내가 사는 동네 도서관도 있을 건 다 있고 게다가 내가 즐겨 보는 분야 책들은 별로 인기가 없어서 신착도서 책장만 잘 뒤져도 웬만한 신간들은 커버할 수 있다.
연장까지 치면 24일 대출할 수 있으니 시간도 넉넉. 심지어 관내 도서관이 모두 5개 있는데 도서관마다 5권씩 빌릴 수 있어 최대로 치면 한 달에 25권을 빌릴 수 있다는 결론이다. 카드는 통합되어 있고, 반납도 관내 어떤 도서관에서나 해도 된다. 비슷한 규모의 도서관 라인업을 가진 또 다른 자치구 도서관 카드가 두 장 더 있으니 정말 작정을 하면 한 달에 80권 정도 빌릴 수 있다는 이야기.(실제로 서울의 모든 자치구 도서관 기준으로 최대 대출 권수를 계산해본 블로그를 본 기억이 있다.)
여기에 난 어쩌다가 '책이음'카드라는 것도 만들었는데 이건 거주지와 상관없이 전국의 참여 공공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는 카드다. 현재 참여 공공도서관이 전국적으로 2193개라니 원한다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책을 빌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굳이 그럴 것까지는 없겠지만. 그뿐인가. 상호대차 서비스도 있고 도서관이 문을 닫은 밤 시간에 신청하면 지하철 역에 설치된 무인대출기에 갖다 넣어 주는 서비스도 있다.
무엇보다 전자책을 읽게 되었다는 점에서 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같다. 온라인 서점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많은 공공도서관에서도 전자도서관 규모를 늘리고 있어 신간 회전율이 꽤 빨라졌다. 온라인 서점에서 개설한 전자도서관의 경우는 신간 예약 경쟁이 심하긴 하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대충 풀리는 데다 그 밖에도 읽을 만한 책들이 많다. 지금도 꾸준히 나가고 있는 베스트 & 스테디셀러 위주 구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용하는 전자도서관은 총 장서 수가 4600권 정도인데 신작이 주기적으로 추가되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강의를 듣거나 일을 하다가 필요한 책이 있으면 각종 전자도서관부터 시작해서 도서관 사이트, 중고서점 사이트까지 검색해보고 그래도 확보할 수 없으면 그제야 구입을 결정하게 된다. 정보에 밝으면 싸게, 심지어 공짜로 살 수 있는 건 모든 상품 구매의 기본이지만, 책의 경우는 좀 일말의 죄책감이 느껴진다. 은행에서 대출받고 연체해서 이자내는 사람이 최고의 고객이듯 이래서야 읽든 말든 일단 사고 보는 충동구매 독자들이 출판사나 서점에서는 더 좋은 고객 아닐까.
몇 년 전 마음의 부담을 좀 덜고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자는 메시지를 담은 에세이들이 한창 화제를 모을 때 출판사 지인들은 하나같이 파스텔 풍에 일러스트가 그려져 한껏 화사한 분위기의 에세이 매대를 가리키며 주 독자층을 겨냥한 마케팅이라고 했다. 평소에 책을 잘 사지는 않지만 그래, 오늘 한 권 사볼까 싶을 때, 1만 5천 원 정도 투자할 마음이 들게 하는, 일종의 팬시상품 같은 거라고.
그 추세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만 뭐라 할 수 있을까. 책에 볼펜으로 줄을 긋고, 메모를 해도 좋으니 한 번 사면 소장하는 사람, 드라마나 유튜브에 나왔다면 일단 사는 사람, 읽기만 하면 부와 행운을 끌어당기는 힘이 깃든다는 비전의 책을 주문하는 사람이 뭐가 나쁠까. 어쨌거나 실질적으로 책을 사는 소비자이긴 하지 않나. 나처럼 요리조리 공짜로 볼 궁리만 하는 사람보다야.
어쩐지 출판계 지인들이 "너는 우리 타깃 독자가 아니야"라며 하는 말마다 무시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래도 간간이 책을 사들이고, 더 드물게는 리뷰도 쓰니까 아주 도움이 안 되는 존재는 아니겠지 생각해본다. 다들 책 많이들 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