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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uze Jun 20. 2020

<평가받으며 사는 것의 의미>

불공평한 평가에 분노를 터뜨리기 전에 생각해봐야 할 것들

우리는 늘 평가당하고 평가한다. 직장 상사의 말 한마디에 울컥하고, 인스타그램 피드에 ‘좋아요’가 늘지 않으면 시무룩해진다. 남들이 자기를 평가절하한다고 분통을 터뜨리다가도 첫인상 하나로 누군가를 단정하고, 학벌이나 재산, 외모가 변변찮다며 얕잡아 보기도 한다. ‘결국 승자독식이 유일한 답인가’ 싶어 진절머리가 난다면 이 책을 한번 읽어볼 것.     

 

<행복의 패러독스>란 책으로 알려졌던 영국 출신 작가이자 편집자인 지아드 마라는 평가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호한 판단기준, 편향되고 비합리적일 수밖에 없는 판단 체계와 이런 잣대에서 벗어나고 싶은 불가능한 소망 등을 실험심리학의 관점에서 들여다본다. 실험심리학은 개개인의 경험을 관통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특징을 발견하게 한다는 게 저자의 설명. 책 전체에서 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발휘하는 직관과 실제 현실 간의 격차를 보여주면서 평가를 둘러싼 편견 및 선입견들을 보여준다. 심리학뿐만 아니라 철학, 인류학, 사회학 등 관련 분야는 물론 필립 로스의 소설 <휴먼 스테인>, 미드 <브레이킹 배드>와 <웨스트윙>, 미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어록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사례를 들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작가는 우선 1장 ‘가면을 쓴 사람들’에서 사회적 고통을 유발하는 요소가 가득한 이른바 ‘지뢰밭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관습과 기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조심하면 할수록 나쁜 평가를 받을까 봐 두려워하며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고통에 시달리는 상황 말이다.     

 

사람들의 행동을 끌어내고 규제하는 건 법과 규범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법률이나 금지 규정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그보다 행동을 근본적으로 결정짓는 건 문화를 지배하는 절대적 기준들이고, 그것을 감시하는 건 사회적 평가다. 소셜미디어의 추문은 사회적 평가가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다. 하지만 그 외 온라인 밖의 일상에서도 우리는 오해받거나 비판적 시선에 노출되는 일이 없도록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각자 지닌 기량과 지식에 따라 자신에게 걸맞은 사회적 기술을 단련한다는 게 저자의 말. 대부분은 쿨한 모습과 곤란하고 서툰 모습 사이에서 섬세하게 인상을 관리하는데 이는 2장 ‘평가의 기술’에서 다뤄진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선동가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사례가 인상적이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같은 편’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맹목적으로 헌신하게 만든다고 한다. 예를 들어 기다리는 사람들의 기대감과 집단적 무의식을 강화시키기 위해 유세현장에 좀 늦게, 극적으로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는 즉각 사람들의 걱정거리를 하나씩 들춰내면서 “이게 과연 누구 때문에 생긴 고통인가” 되묻고, 줄줄이 적들을 읊어댄다. 자주 지목되는 적은 언론. 트럼프는 어느 유세장에서 지지자들에게 뒤편에 있는 기자석을 향해 다 함께 돌아서서 쏘아보도록 주문한 적도 있다고 한다.     


저자가 인용한 사회심리학자들은 한결같이 따뜻함과 경쟁력을 함께 갖추고 있을 때 가장 높은 평판을 누리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건 참 모순적인 한 쌍이다. 인기와 권위, 인정과 카리스마, 사람들이 좋아하면서도 존경하고,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인물. 그야말로 ‘내 여자에게는 따뜻한’ 영화나 드라마 속 비현실적인 주인공 상이다. 결국 선량하면서도 유능하다는 역설적 관계에서 현실 속 사람들은 후자를 키우기 위해 전자를 희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회적 평가가 부와 지위의 승패를 가르는 세상에서 도덕성은 차선인 것이다. 그렇다면 유능해지기만 하면 될까. 불행하게도 과감히 한쪽을 포기해도 평가자, 즉 남들의 시각은 신뢰할 게 못 된다고 한다.      


3장 ‘신뢰할 수 없는 평가단’에서는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과정이 얼마나 엉성한지 보여준다. 알고 보면 가치관이라는 명목으로 포장된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기준과 함께 잠재적 편견, 도덕적 결점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 결국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서로에 대해 공정하거나 중립적인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고 한다. 저자는 이런 편견을 몸소 체험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8세 때 내전을 피해 베이루트에서 런던 남부의 펄리라는 소도시로 이주한 아랍계 이민자인 저자는 대학 졸업 후 취업을 위해 1백 군데가 넘는 출판사에 이력서를 보냈지만 번번이 낙방하다가 ‘기독교식’ 중간 이름인 ‘폴’을 사용하자 마자 채용되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많은 심리학 연구결과들이 타인에 대한 평가는 이미 무의식적 절차를 통해 완료되고 그 후에야 결론을 뒷받침하는 증거수집이 이뤄진다는 걸 보여준다. 그렇다면 남들의 시선에 연연할 필요가 있을까? 반문하면서 평가에서 놓여난 삶을 열망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4장 ‘평가에서 자유로워지기’에서는 매일같이 마주치는 사람들이 아무리 끈질기게 평가해도 개의치 않는 강력하고도 창의적인 충동, 타인의 기대에 순응하지 않는 저항적 정서의 이면을 보여준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꿈꾸었던 반항적인 영혼. 그러나 이런 길은 쉽지 않다고 한다. 저자는 후천적으로 학습된 문화에 필사적으로 의존하면서 특정 사회환경 내에서만 스스로를 완성할 수 있는 게 ‘인간의 운명’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평가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인간이란 없다. 저자는 이 점을 꿰뚫어 본다. 자유롭고 싶은 욕구는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 관객들에게 계속 지배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 같은 욕구의 이면에는 사실 모든 이들의 찬사 따위 필요로 하지 않는 듯 보임으로써 최고의 찬사를 획득하고 싶은 진짜 속마음이 놓여있다. 이 점에서 자유와 평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저자에 따르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누가 보고 있든, 어떤 생각을 하든 상관없이 평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닦겠다는 반항적 욕구를 향해 가는 것이다. 주위를 살피며 동의를 구하는 일 없이 자신만의 계획을 추진할 때에만 좋은 평가를 받을 자격이 주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모순이 더 명확해진다. 자유를 너무 성공적으로 추구하면 관객들의 시야에서 아예 벗어나게 되는 만큼 다시 돌아와 이들을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욕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는 복잡하고 미묘하다. 자유롭게 살면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 것.       


저자는 실제 삶 속에서 이 둘은 서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뒤엉켜 있다며 그 훌륭한 예로 필립 로스의 소설 <휴먼 스테인> 속 주인공 콜먼 실크의 행적을 섬세하게 따라간다. 미개한 사회가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도록 내버려 두는 대신 직접 개척하겠다는 의지로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 등을 돌리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하고, 또다시 배신하는 한 남자의 일대기. 저자는 자신이 선택한 새로운 정체성을 쌓아 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한 그의 역사를 돌이켜 보며 어느 누구도 자신이 진정 새로 태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쉽게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게 된다고 한다. 그 목표를 이루는데 잔인성이 필요한 것은 물론 결국 ‘자신의 역사가 자신의 숨통을 조여 오는’ 공격까지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같은 자유를 향한 꿈이 없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도 한다. 평가에 잠식되거나 나만의 방법으로 독립하지 않는다면 타인의 평가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마련이기에.


마지막 5장 ‘최후의 평가’에서는 이미 죽은 자들의 예를 통해 우리의 삶이 결국 어떻게 평가받는지에 대해 다룬다. 모든 사람의 삶은 시작, 중간과 끝이 있고 그 이상 어떤 의미를 찾아 누군가에게 전달할 때는 ‘이야기’라는 형태를 빌려야 한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반문한다. “사실 내 지난날의 에피소드나 전환점들에 대한 이야기도 전부 믿을 수가 없는데, 타인이 나에 대해 하는 이야기는 얼마나 더할까?” 압축 및 극화되면서 왜곡이 일어나는 유명인사들의 삶만큼이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도 장례식에서 왜곡되기는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수많은 전기영화나 추도사, 회고록 등이 미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실제보다 더 많은 서사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듯 사회적 평가 역시 당사자가 자신의 이야기에 어떤 걸 넣고 뺐는지, 또 무엇을 강조했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면서 저자는 철학자 줄리언 바지니가 주창한 ‘에고 트릭(Ego trick)’이라는 개념을 참고하라고 조언한다. 이 개념의 핵심은 자기 속 수많은 자아는 비밀로 하고 조개 속 진주처럼 서사적 일관성을 갖는 하나의 모습을 대외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엉망인 분절된 경험과 기억의 조각들을 강력한 통합성을 가지고 하나로 창조하는 게 트릭이다.”    

  

각자 자의적으로 편집한 셀프 이미지를 내세우며, 서로 불완전한 평가를 주고받는 세상. 작가는 그것이 결국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며 이로 인한 외로움, 소외의 문제임을 꿰뚫는다. 평가가 언제나 일방향으로 편향적이고 이기적일 수밖에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습에서 놓여나 아웃사이더로 살 것인가. 또는 진심이 받아들여지길 바라며 기다려야 하는가. 또는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사회적으로 검증된 가면을 써야 할까.  

    

그는 이 책을 쓰면서 결국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해도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결실을 맺을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그 시도가 추구하는 타인과의 연결성이 훼손된다 해도 말이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당신에 대한 나의 평가 역시 완전하거나 정확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이해하고자 다가가는 게 어떤 면에서는 더 멀어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마치 계속 후퇴하는 지평선을 향해 다가가듯 아무리 다가가도 결정적인 면에서, 우리는 결코 가까워질 수 없다.”


저자는 이렇게 서로에게 무지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도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빈틈이 있어야 우리는 각자 더 나은 존재로 발전할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자신에 대해 하는 생각과 타인이 나에 대해 가진 생각 사이의 격차를 느끼고 불편해하기보다 이 격차를 활용해 더 나은 자신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신뢰할 수 없는 평가를 그만둘 수도 없을뿐더러 공정하거나 정확한 평가를 받지도 못한다. 하지만 평가하는 법을 알게 된다면, 그것을 의식하는 것을 언제 중단했는지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에 대해 전부는 아니더라도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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