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의 성을 읽고
1. 도입
카프카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우리를 깨물고 찌르는, 다만 그런 책들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가 읽는 책이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쳐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책을 읽어야 할까.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카프카의 책을 읽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불쾌함, 기괴함, 난해함 등을 느끼고 이러한 느낌은 ’ 카프카적인 ‘이라고 이름 붙어져 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나는 대체 카프카에게 삶이란 무엇이었길래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공허하고, 이질적이고, 난해한 것인지, 한 자루의 도끼 같은 그의 책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남겨보겠다.
2. 카프카에게 ‘성’이란
‘성’은 작품의 제목이자, 주인공의 목표이다. 성에 의해 토지 측량사로 임명받은 K는 마을에서 이질적인 이방인으로 인식되고, 그는 성의 관리자를 만나기 위한 투쟁이 작품의 줄거리이다.
작품을 읽다 보면, K는 정말 토지 측량사가 맞을까라는 의문이 들곤 한다. 또한 그는 이방인일까, 마을 사람일까에 대해서도 모호한 느낌이 든다. 카프카에 삶에서 그가 독일인과 유대인 사이에서 뚜렷한 정체성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K 또한 그런 방황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이 흑백요리사에 나온 요리사 에드워드 리의 비빔밥이었다. 그것이 겉보기에는 고기 덮밥같지만, 그 속은 비빔밥이었던 그의 요리는 에드워드 리와 이균사이에서 방황했던 그의 삶을 고스란히 표현한 음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심사위원에게 덮밥이라 부르기에도, 비빔밥으로 부르기에도 애매하게 느껴졌기에 1위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카프카에게 성은 자신이 무언가로서 인정받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실존또한 스스로의 가치에 부합하는 선택과 의지를 바탕으로 그곳으로 나아가는 것이기에 에드워드 리가 이균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것과 카프카의 염증은 비슷한 취지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은 그것 하나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들에서 끝없는 계층이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결코 그와 그의 아버지 사이의 관계를 떼어놓고 말할 수는 없다. 그보다 오래 살았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의 모든 것을 통제하였으며, 그는 아버지의 강압적인 행보에 반항하고 싶었지만 끝내 맞서지 못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에게 K가 성의 관리자와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버지와의 수직적 관계(성과 마을의 수직적 관계)에서 벗어나 아버지와 당당하게 대면하고 싶다는 그의 꿈을 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 넓은 범주로 나아간다면, 성은 ‘부조리’이다. 그리고 부조리는 우리의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삶에 대해, 세상에 대해 수많은 부조리를 느끼고, 시간에 따라 그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달라지곤 한다. 카프카도 이 점을 염두하였는지 성에 대해 이와 같은 대목을 남겼다.
“클람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는데, 그 윤곽은 대략 맞을 거예요. 그러나 윤곽만 맞는 거죠. 클람의 이미지란 가변적인데, 맥주를 마시기 전과 마신 후의 모습이 다르고 (중략)“
“그뿐만이 아니라 성에 이르는 길은 몇 개나 있어요. 어떤 때는 이 길이 유행이어서 대부분의 관리들이 그 길로 달려가고, 어떤 때는 다른 길이 유행이어서 (중략)”
이처럼 부조리에 대한 윤곽은 사람마다 비슷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삶에 따라 그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조리에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점이 잘 드러나 있다.
그렇기에 카프카에게 ‘성’은 그의 ’ 정체성‘, ‘아버지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더 복합적인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저마다 지니고 있는 성도 비슷하면서도, 다른 의미들을 가질 것이다. 마치 최진영 작가의 <단 한 사람>에서 나오는 ’저마다의 나무를 지니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나무라는 부조리에 대해 대응하는 3대의 인식과 태도의 차이를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즉, 우리에게 부조리가 ’ 성‘의 이미지를 지닐 필요는 없다. 그것은 ’ 나무‘여도 되고, ’ 구토‘여도 되고, ’ 이방인‘이어도 좋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부조리함에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이니까.
3. 어떻게 살 것인가
참으로 어려운 물음이기에 그간의 역사 속에서 많은 학자들이 의견을 달리했고, 생애를 바쳐 이것만을 고민한 사람들도 다수 있다. 카프카는 자신의 세계에 대해 공허하고, 무의미하다고 느꼈을 것 같다. 그의 작품들의 허무주의적으로 느끼는 이들이 많은 것도 이와 연관될 것 같다.
“이곳은 겨울이 길어요. 매우 길고 단조로운 겨울이죠. (중략) 내 기억에는 봄과 여름이 얼마나 짧은지 길어야 이틀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 날들 중에서도 가장 좋은 날에도 가끔 눈이 내리기도 해요.”
성에 나오는 이 대목처럼 카프카에게 세계는 차가워고, 인정 없었으며, 그러한 날이 계속 지속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카프카는 그런 세상에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이는 다음 대목들을 통해 더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소홀히 했다는 거죠?” 여주인이 물었다. “그들은 클람에게 묻지 않았죠.” K가 말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를 무슨 계시인 양 분석하며 그러한 해석에 자기 삶의 행복을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거야. 그보다 잘못된 일은 없어.”
비록 세계는 그를 버렸을지언정, 그는 스스로를 버리지 않았음이 너무나 강렬하게 느껴졌다. K는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세계에 맞서, 스스로가 살아있음을, 존재함을 강력하게 외치고 있다. 이것이 상실과 죽음이라는 부조리 맞서는 삶에 대한 의지는 아니였을까 싶다.
그렇다면 K는 성에 닿을 수 있을까? 사실 이것은 별로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꼭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어야 행복한 것은 아니며, 이루지 못했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우승을 한 뒤에 허무함에 슬럼프에 빠지는 운동선수나, 일명 졌잘싸라는 그 과정에서 잘했으면 충분하다는 마음가짐처럼 결과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간 목표를 향한 반항에서 느낀 열정과 자유로움이기에,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은 엄청난 통찰력을 제시했음이 다시금 느껴진다. 인생은 시험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시험은 나의 삶을 평가할 수 없다. 그것은 나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니 말이다. 그러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이다. 내가 진정 어린 노력을 다했다면, 시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며, 고작 시험이라는 안경으로 나를 바라보는 세상 또한 나의 가치에 비해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그러니 나를 위해 살아보자.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다. 할 수 있을 만큼 초심만 잃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