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살이 5일 차
아빠는 술을 좋아하신다. 자주 드시다가 자주가 매일이 된 지도 오래됐다. 다행히도 술버릇은 없으시고 그냥 주무신다. 젊으실 때는 눈도 안 풀리시더니 지금은 술 드시면 눈도 풀리시고 가끔은 필름이 끊기기도 하신다.
내가 아빠와 술을 인지하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고등학교 1학년쯤으로 기억한다. 술을 드셔도 취한 걸 잘 못 느끼고 지내던 어느 날. 혼자 집에 있는데 아빠가 술을 드시고 오셨다. 비틀거리셨다. 화장실에 토를 하시는 소리를 들었다. 아빠가 방으로 들어가신 뒤 엄마가 알면 혹시나 또 아빠에게 잔소리를 하실까 봐 청소를 했다. 그런 모습은 처음 본 거라 어린 나이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울면서 집에서 나왔다. 엉엉 울면서 친한 친구를 불러서 털어놨다. 그 친구가 묵묵히 듣더니 편지를 쓰라고 했다. 그 마음 그대로 바로 집으로 들어가 편지를 썼고 다음날 학교 가기 전에 아빠에게 주고 갔다. 그러고 2~3일 정도는 술을 안 드셨다. 며칠뒤 다시 예전처럼 술을 드셨다. 그 이후 나는 그런 편지는 다신 쓰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언니와 나에게 아빠한테 술 먹지 말라고, 엄마가 말하면 잔소리가 되니 너희가 말하라고 많이 시키셨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아빠한테 언니랑 번갈아가며 말했다. 그렇게 성인이 되고까지 아빠한테 술 먹지 말라고만 했다. 단 한 번도 그 마음을 이해한 적도, 이해하려고 한 적도 없었다.
성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며 어렴풋이, 술을 드시는 아빠를 희미하게 이해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 아빠도 힘드셔서 드시는구나. 그냥 좋아서, 술이 좋아서 드시는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겠구나. 회사에서 밖에서 많은 일들을 혼자 푸는 방법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 시기쯤 나는 엄마가 아빠한테 술 먹지 말라고 눈치를 줘도 아빠에게 아무 말하지 않았다. 드시라고, 드시되 양을 조절하시라고, 하루쯤은 쉬시라고만 말했다.
그래서 친정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걱정이 있었다. 작은 집에서 아빠는 술을 드시고 엄마는 잔소리를 하시는 분위기에서 나랑 딸은 어떻게 해야 하지? 이걸 내가 해결할 수 있을까?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도 내 마음대로 안되는데, 감히 수십 년을 살아오신 걸 내가 바꿀 수 있으랴. 그래서 오기 전에 부탁을 했다. 약간의 협박(?)까지. 아빠는 술을 격일로 드시거나, 술 양을 줄이시고, 엄마는 이왕 아빠가 드실 때 잔소리 하지 말고, 눈치 주지 말아 달라고. 만약 이게 안 지켜져서 힘들면 다시 휴직을 하거나, 방을 구해서 나가겠다고.(얹혀사는 주제에;;)
지난 주말에 이사 와서 토요일은 온 가족이 모여서 한잔 했고, 일요일은 점심을 드시며 아빠가 반주로 한 병을 드셨다. 그때부터 사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나의 부탁과 협박이 씨알도 안 먹히면 어쩌지 하고.
월요일은 아빠, 엄마, 나 3명에서 맥주 500 한 캔을 소주잔에 나눠 먹었다. 그냥 재미 삼아 목 축일 겸 먹은 거였고 화요일에도 아빠는 술을 드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화요일은 엄마가 아빠에게 맥주 한 잔 하자고 하셨는데 아빠가 거절하셨다. 세상에 이런 일이!!
오늘은 아침부터 저녁에 모여서 한잔하자고 셋이 약속했다. 엄마는 장을 봐오시고, 아빠는 장 보실 돈을 엄마에게 주셨다. (나는 뭐 했니..?)
딸 어린이집에서 밥 두 그릇 먹고 온 이야기.
나 복직서류 쓰고 온 이야기.
엄마 어릴 적 상처 이야기.
아빠 어릴 적 이야기.(아빠는 부모님의 부부싸움을 본 적이 없으심)
나 어릴 적 상처 이야기.
등을 나눴다.
나 어릴 적 엄마 아빠에게 좋았던 점, 상처가 된 점을 얘기하며 좋았던 건 딸에게 물려주기 위해, 안 좋은 건 내 선에서 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말씀드렸다. 엄마는 눈물을 흘리셨고, 아빠는 묵묵히 들으셨다.
자식을 낳기 전엔 진지하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부모가 되고 보니 내 안에 내면아이가 있음을 알았다.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털어놔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오늘 얘기를 나누고 나는 후련한데 부모님은 놀라신 건 아닐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또 글로 남길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
글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