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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포아빠 Aug 07. 2019

다마스 두 대를 꽉 채운 서류가 실려왔다

간신히 여의도 서식기_여덟 번째 : 부끄러운 자료요구 이야기

국회가 일을 하는 데 있어 정부로부터 자료를 받아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권한이다. 정부에 대한 견제와 감시라는 3권 분립의 한 축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 있어 자료를 통해 사실과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그 시작이고, 정확하게 문제를 지적하고 개선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일반 국민들도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정부의 자료를 받아볼 수 있지만, 국회의 자료요구권은 그보다 더 강력한 권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국회의 자료요구권이 최고법인 헌법 제61조에 규정이 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헌법은 물론이고 국회법 제128조, 국회에서의 증언 및 감정에 관한 법률 제4조 등에도 자료요구권이 나온다. 법률을 찾아보면 정부는 국가안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은 엄청난 사유가 아니고서는 일정한 기간 내에 요구를 받은 자료를 제출하도록 되어 있다.


예전에는 자료요구 문서를 만들어서 의원의 인장을 찍어 팩스로 보낸 후 해당 부처에 전화를 걸어 팩스를 받았는지 확인하고, 자료를 기한 내에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과정으로 일이 진행됐는데, 대략 2010년 이후부터는 '의정자료 전자유통시스템'이라는 것이 구축이 되어서 쉽게 자료요구 사항을 등록하고, 자료를 요구받은 정부부처도 이를 확인해 자료를 제출하는 일이 가능해져 자료요구가 더 용이하고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국정감사 기간 등에 국회의원실을 출처로 쏟아지는 뉴스를 보면 "ooo의원실에서 정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이라는 소개로 시작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바로 국회가 자료요구권을 통해 정부가 숨기고 싶거나 스스로 밝히지 않는 정보와 사실 들을 받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활동을 통해 정부의 예산낭비나 비효율성을 바로잡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는데, 결국 국회의 자료요구권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의 활동에 대해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법에 규정되어 있는 것처럼 국회의 자료요구권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지는 않다. 정부 부처들은 국회의 자료요구에 대해 '작성 중', '자료를 찾기가 어렵다', '제출한 전례가 없다'는 등 다양한 이유를 들어 자료제출을 지연하거나 거부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최근에도 다음 기사에서 보듯 정부가 치부를 감추기 위해 자료제출을 하지 않아 국회의 활동을 방행 하는 일이 일어난다. 때문에 국회의 국정감사나 상임위 회의에서는 자료제출 여부에 대한 문제로 국회의원과 장관들 간의 신경전이 오가기도 하고 회의가 파행되기도 한다. 정부 정책과 활동을 제대로 검증하고, 더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주장과 추측만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비생산적이고 쓸모없는 경우가 많다. 정부의 자료를 통해 정확한 사실과 통계에 기반해야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자료요구를 둘러싼 긴장이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때문에 정부가 성실하게 자료를 제출하는 것은 견제와 균형이라는 3권 분립의 정신을 준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겨레신문 2016. 11. 27일 기사

                                                                                                          

자료요구를 둘러싸고 국회의 '갑질'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기도 한다. 과다한 요구로 업무부담을 늘린다는 것인데 이 또한 일리 있는 지적인 경우가 있다. 이는 개선하고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기본적으로 국회의 자료요구권은 국민의 이익을 위해 존중되어야 하고, 정부가 불편하고 부담이 되더라도 성실한 자세로 감수하는 방향에서 바라보는 것이 제도의 취지에 맞다. 부작용과 문제점을 개선하는 것과 국민이 준 권한을 활용하는 것은 구분되어야 하고 "정부가 할 일도 많은데 국회가 못살게 군다"는 식으로 정치혐오를 유발하는 왜곡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료요구가 국회 일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보니 나도 이와 관련한 경험과 에피소드를 가지게 됐다. 내가 이런 일도 했다고 자랑하고 싶은 일도 자료요구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이고 또 말하기 부끄러운 실수의 경험도 있다. 오늘은 자료요구에 대한 부끄러운 경험을 통해 배웠던 일화를 소개하고 싶다. 2007년 정식으로 직급을 받아 정책비서가 됐다. 우리 의원실은 정무위원회 소속이었는데 '정치에 관한 일'이라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보듯 국무총리실, 금융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국가보훈처, 국민고충처리위원회(현재는 국민권익위원회) 등 하나로 묶기 어려운 다양한 기관들이 소관기관이었다. 


나는 내 책임으로 국무총리실 소속인 '경제인문사회연구회'라는 기관을 맡게 됐는데 KDI, 통일연구원, 교통연구원, 형사정책연구원 등과 같은 국책연구기관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지금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26개 연구기관이 소속된 것으로 소개가 되고 있는데 그때도 비슷한 숫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금융위원회나 공정거래위원회와 같은 중요기관은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책임을 지는 업무가 생긴 것이므로 잘해야겠다는 의욕과 의지가 충만했다. 서툴고도 서툰 상태에서 언론보도나, 연구자료들을 살펴보면서 무언가 한 건을 잡아보고자 애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역시나 자료요구였다. 


연구기관들은 연구를 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기관 자체적으로도 연구를 수행하지만, 대학이나 학자들에게도 용역을 주는 일이 많다. 연구용역을 발주하는 데 있어 그 심사나 계획이 공정하거나 치밀하지 못하고 대충대충 친소관계를 통해 이루어져 세금이 낭비된다는 지적이 있었다. 경쟁입찰보다는 수의계약이 많다는 것이 그 근거로 제시되기도 했다(수의계약은 경쟁을 통하지 않고 기관이나 공무원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계약자를 선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 문제를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경제인문사회연구회에 소속 연구기관의 연구용역에 대한 3년 치 계약서를 요구했다. 했던 사람만 계속하는 건 아닌지, 각 연구의 특성이나 적합성이 고려되지 않고 일률적이고 관성적으로 처리되지는 않는지를 살펴보겠다는 심사였다. 연구회에서 연락이 왔다. 소속 연구기관이 많고, 3년 간의 연구용역 과제도 많아서 자료를 취합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에 대표적인 계약서만 추려서 보내면 안 되겠냐는 거였다. 


선배들이 자료를 받아내기 위해 정부 관계자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것을 자주 목격하고, 정당한 요구에도 정부가 자료를 제대로 내놓지 않는다는 인식도 없지 않았던 나는 자료를 주지 않으려는 태도에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부터 했다. 여기에는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는 의욕도 한몫을 했다. 여러 차례의 연락에도 양보를 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나를 설득하려 노력하던 담당자도 결국엔 알겠다고 했다. 자료의 양 때문에 요구받은 기간 내에는 제출할 수 없다는 것만 수용을 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자료를 보냈다는 연락이 왔다. 양이 많다는 것은 예상을 했기 때문에 메일이나 우편 같은 평상시의 방법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담당자는 퀵으로 보냈으니 두 시간 정도면 받아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고맙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두 시간이 지나 의원회관 안내실에서 전화가 왔다. 퀵서비스에서 날 찾아왔다고 들여보내도 되냐는 거였다. 퀵 서비스가 오면 내려가서 받는 것이 보통인데 사무실로 오겠다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오토바이 기사님이 자료 뭉치를 들고 오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5분 후에 건장한 남자 두 명이 이삿짐업체에서 쓰는 파란 플라스틱 박스 네 개를 낑낑거리며 가져왔다. 난 그 거대함(?)에 놀랐다. 열어보니 연구기관마다 두꺼운 서류철을 수 개씩 보낸 거였다. 박스를 가져온 분들은 다마스 두 대에 싣고 왔다고 했다. 난감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의원회관이 넓지 않아서 열 평 정도 되는 공간에 9명이 오밀조밀 모여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료를 놓을 곳조차 마땅치 않았다. 의원실 선배들도 '이게 뭐야'하는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애써 침착한 척을 하며 "제가 자료를 좀 보려고 보내라고 했어요"라고 둘러댔다. 


그 좁은 사무실에 두꺼운 검은색 서류철이 가득 찼다. 가뜩이나 좁은데 사무실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내가 무슨 정부 연구용역만 죽어라 살펴볼 임무만 맡은 것도 아니어서 이 자료들을 다 못 보는 것은 당연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끄러움을 숨길수가 없었다. 이거 진짜 내가 잘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연구회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했다. "제가 원래 자료요구에서 의도했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괜히 폐만 끼친 꼴이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정도일 줄은 모르고 제가 고집을 피웠습니다." 다행히 그분도 국회로부터 이런 고백(?)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알겠다면서 사과를 받아주었다. 


자료요구만 가지고도 여러 번 쓰고 남을 무궁무진한 경험담 중에도 최악의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초창기의 이 경험은 이후에 자료를 요구하는데 큰 영향을 줬다. "자료의 양이 필요 이상으로 방대하거나, 자료제출과 관련하여 사전에 협의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을 달라"는 내용을 꼭 자료요구서에 담았다. 그리고 연락이 오면 쓸데없이 업무에 부담을 줄 의도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요청에 대해서는 대부분 수용했다. 이후에 반드시 받아내야겠다고 생각하는 자료에 대해서는 여러 번 공무원들과 실랑이도 하고 싸우기도 했지만, 그때와 같이 내가 잘못 생각했거나 소모적으로 부담만 주는 일이라는 판단이 드는 일에 고집을 피우거나 언성을 높인 적은 없는 것 같다. 지금도 당시 담당자들께 미안하고 또 고맙다. 호된 경험으로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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