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포아빠 Aug 07. 2019

아이를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들

미국 겉핥기_여덟 번째

"adorable"
 

유모차를 끌고 마트에 가거나, 거리를 걷거나, 박물관을 가거나 어디를 가든 딸을 본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끊임없이 들었던 말이다.


"어도러블"이라고 발음을 안 하고 "도러블, 도러블"이라고 해서 못 알아듣는 나는 돌아버릴 것 같았지만, 여하간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부모에게 "너무 사랑스럽다"라고 한 마디씩 하고 가는 문화는 부모와 상대방 모두 경계하고 경직된 경험을 많이 하게 되는 사회(아파트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초등학생 여자 아이에게 관심을 표한답시고 "몇 층사니?", "몇 호사니?" 물어봤다가 그 아이로부터 경계를 받은 것은 물론, 집에 들어와서 아내에게도 그런 질문하면 오해받는다고 경고도 받은 기억이 난다)에 살다 온 사람으로서는 낯설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미국에서 아이는 '까방권'을 가진 존재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아이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은 미국뿐 아니라 동서고금,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마찬가지 이겠지만 아무리 바쁘고, 무표정한 표정으로 있던 사람들도 아이를 보면 얼굴이 환해지고, 축복하고, 배려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미국 국회의사당(U.S CAPITOL)에서

미 의회를 돌러보는 투어 프로그램에 갔을 때의 일이다. 아이가 유모차를 타고 있는 것을 확인한 견학 담당 직원은 우리에게 노란색 종이 한 장을 주었다. 계단을 이용해야 하고, 무리에서 이탈하면 안 되는 일반 관람객과 달리 엘리베이터를 통해 이동하는 등의 편의를 우선적으로 제공받을 수 있는 일종의 통행권이었다.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을 안내하기 만도 벅찰 텐데, 아예 우리의 이동을 도와주는 전담직원까지 있었다.


한 층에서 설명이 끝나고 같은 시간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계단을 통해 이동할 때, 우리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했다. 관람객들이 다음 장소에 먼저 도착했어도 우리를 기다려야 했고, 우리는 맨 앞에 가서 설명을 들었다. 아이의 속도에 모두가 맞춰야 했던 것이다. 그 누구도 불만이 없었고, 모두가 아이를 보며 "adorable"을 외치기에 바빴다.


견학의 초입에 상영되는 의회 소개 영상을 보는 극장의 안내직원들도 온갖 감탄사를 남발(?)하면서 다른 모든 관람객보다 이 아이 한 명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환대해주었다.



미국에서 유모차를 끌고 오랜 시간 걸을 일은 별로 없었다. 차를 타고 다닐 일이 많으니까. 그러나 어딜가든 유모차가 문을 통과할 일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위 사진에 보이는 버튼은 유모차를 끌고 다닌다는 것이 하나도 불편하지 않다는 경험을 하게 해 줬다. 이 버튼은 문이 자동으로 열리게 하는 버튼이다. 이 버튼을 누르면 문이 천천히 자동으로 열린다. 이 사진은 내가 머물렀던 학교에서 찍은 것이지만, 내가 가본 미국의 건물들은 100% 출입문에 이런 장치를 설치해두고 있었다.


사진에서 보듯 이 버튼에는 휠체어 표시가 되어 있다. 장애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아이와 노인 그리고 장애인과 같은 약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배려하는지 알 수 있는 작지만 분명한 사례다. 유모차가 건물을 드나드는데 이 버튼만 누르면 문이 열려 큰 힘 들이지 않고 쉽게 출입이 해결이 됐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루하고, 짜증이 날 수 있는 이 시간을 차분히 기다린다. 어느 건물을 들어가든 문을 열고 난 후 닫히는 문을 등이나 다리로 버티면서 유모차를 낑낑대며 들여놔야 하는 서울에 도입이 시급하다.


이렇게 아이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사람들이 아이에게 무관심할 때가 있다. 식당이나 버스 같은 공공장소에서 아이가 울거나 하는 행동으로 소란을 일으키고, 말썽을 피울 때다. 째려보는 사람 거의 없다. 그냥 자기 할 일을 한다. 시끄럽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이니까 그렇다. 부모 입장에선 이럴 때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그건 온전히 자기 마음의 발로일 뿐 주변의 시선이나 눈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그런 부모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부드러울 뿐이다. 이 무관심은 곧 너그러움이다.


내가 살았던 솔즈베리의 동네 카페와 학교에서, 아나폴리스의 해군사관학교에서, 필라델피아의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아이를 본 사람들의 눈빛과 표정은 하나같이 사랑이 넘치고, 행복이 가득하다. 그들의 삶이 항상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이들은 시험 기간 중에 스트레스를 받던 대학생이고, 절도와 규율을 지켜야 하는 사관생도이며, 상사와 학생들로부터 시달리기도 하는 교직원들이었다. 그 누구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과 행동이 방해받고, 기념촬영을 하는데 아이가 난입(?)을 해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오히려 더 즐겁게 생각하는 마음은 그저 상대가 아이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이라고 아이를 때리고, 버리고, 제대로 양육하지 않는 일들이 왜 안 일어나겠는가. 뉴스에도 각종 아동학대 뉴스가 미국발로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그러면 미국에선 부모가 그 아이를 영영 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한국인 부모가 아무런 악의도 없이 아이를 혼자 집에 남겨두고 볼일을 보러 나갔다 왔다는 이유로 아이가 입양되고, 부모는 다시는 아이를 볼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너무 하다 싶기도 했다), 내 주위에선 마트 카트에 타있던 아이가 실수로 떨어졌는데, 그 부모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으며 고된 조사를 받고, 일정기간 감시까지 받아야 했다. 아이니까. 아이는 귀하다. 그걸 아는 사회가 강하고 좋은 사회다.

작가의 이전글 미국인의 '탑' 사랑, 끝이 없어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