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포아빠 Jul 11. 2019

간신히 여의도 서식기 1_ 나는 3순위였다

국회, 인턴에서 보좌관까지

2004년 9월 4일. 

내가 국회에서 처음으로 일하기 시작한 날짜다. 

그날이 토요일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주 5일제가 완전히 실시되지 않았던 때라서 '놀토'가 아니라 '일토'였다.

그 덕에 국회사무처에 가서 정식으로 등록을 할 수 있었다. 


4학년 1학기까지 마치고 휴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후, 2004년 여름 여러 의원실에 인턴 지원을 했다. 당시는 병장이던 군대에서 매주 주말마다 2002년 민주당의 경선 드라마를 흥미롭게 지켜봤고, 제대 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었으며, 대통령 탄핵까지 정신없는 정치상황들 속에서 2004년 열린우리당이 과반수를 차지하는 여당으로 17대 국회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정확히 헤아려 보지는 않았지만 대략 20군데 정도 지원을 했던 것 같다. 몇 군데에서 서류가 통과되어 면접을 보긴 했지만 "같이 일하자"는 소식은 듣지 못하고 있었다. 


나에게 일할 기회를 준 의원실에서도 6월에 의원 및 보좌관과 면접을 본 직후에는 불합격했다는 메일을 보냈었다. 아직까지 그 메일을 보관하고 있는데,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

ㅇㅇㅇ 의원실입니다. 

먼저 인턴 모집에 지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턴 모집에 지원자가 많고, 훌륭한 분들이 많아서 검토에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답장이 늦어진 것도 보내주신 서류를 신중히 검토하려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지원서를 검토한 결과 저희 의원실에서 근무하기에는 너무 많은 장점들을 가지고 계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같이 일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많은 발전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의원실에서 근무하기에는 너무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안 되긴 하지만 최대한 상대의 기분을 배려해주는 답을 받고 단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 달 가까이 지난 시점에 일하러 오라는 연락이 온 거다. 당시엔 그저 기뻐서 감사한 마음만 컸는데, 일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의원실에서 근무하기에는 너무 많은 장점을 가졌다"는 내가 어떻게 의원실에서 일할만큼의 적당한 장점을 가진 사람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 이유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가까워진 보좌관을 통해 듣게 됐다.

의원실에서 면접까지 보고 괜찮은 사람을 추렸는데, 내 앞에 두 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한 명만 뽑는 일이었으나 앞에 두 명이나 있다는 것은 100등, 1000등을 한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1순위였던 사람이 더 맘에 드는 자리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다면서 오지 못하게 됐고, 2순위였던 사람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합류하지 못하게 됐다. 여기까지 일이 진행된 후 의원실에서는 내게 바로 전화한 것도 아니었다. 의원실의 고민이 시작됐다. 3순위인 내게 전화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채용절차를 처음부터 시작할 것인가.


고민을 했던 이유는 명확하다. 내게 정량적으로 평가되는 그 어떤 스펙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서연고'는 물론 '서성한중경외시'에 해당하는 학교의 학생도 아니었고, 그 흔한 토익점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정확히 말하면 점수가 없지는 않았으나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점수였다), 그저 정치와 사회에 '관심이 많을 뿐', 이를 증명할 경력도 없는 '휴학생'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얼마간의 고민 후 내게 전화가 왔다. 그런 결정을 왜, 누가,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찌어찌 그렇게 나는 국회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불합격 통보를 받은 후 다른 의원실에도 지원하면서 한겨레 신문 편집국에서 대장복사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몇 주되지 않았던 나는 양해를 구하고 국회로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첫 출근,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난생처음 걸어 본 국회 지하통로다. 태권브이가 산다는 그 지하통로. 인턴으로서 등록을 하기 위해서는 국회사무처에 서류를 제출해야 했기에 지나가게 된 곳. 국회 본청과 의원회관, 도서관을 함께 이어주는 그 통로를 내가 들어가 보다니. 이제는 너무 뻔질나게 지나다녀서 별 감흥이 없는 그 통로가 당시에는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에 있다는 흥분을 주었다. 

그렇게 나는 이 출입증을 얻었다.

지금은 국회 건물과 사무실에 신분증을 찍어야 들어갈 수 있지만, 당시에는 신분증을 보여만 주고, 열쇠로 사무실 문을 열었던 때이기 때문에 이렇게 종이를 코팅한 신분증이었다. 당시 인턴이 아닌 9급 이상의 보좌진들의 출입증은 노란색이었다. 일종의 신분 구별이었다. 신분증의 이름마저 노란색에는 '공무원증'이라고 쓰여있지만 파란색에는 '출입증'이라고 되어있다. 때문에 인턴들에게는 '노란딱지'로 바꾸는 것이 일종의 로망이었던 때다. 


이제는 신분증 자체가 종이에서 전자카드 식으로 바뀌었고, 인턴과 다른 보좌진을 구별하는 것이 차별이라는 보좌진협의회 등의 노력으로 같은 디자인과 색상의 출입증으로 바뀔 만큼 시간이 흘렀지만 이 출입증마저도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내게는 대단한 것처럼 느껴졌다. 국회 생활이 시작됐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