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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포아빠 Aug 23. 2019

미국 관공서는 복불복이다

미국 겉핥기_열한 번째

긴 세월 살지는 않았지만, 미국 생활을 하면서 몇 번은 관공서에 가서 일을 보게 된다. 흔히 미국에 대해 규칙을 잘 지키는 나라라고 하지만, 미국의 관공서는 시스템이나 매뉴얼이 아니라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처리하고자 하는 일이 어떤 직원과 대면하느냐에 따라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하는 일이 발생했고, 똑같은 일도 만나는 공무원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또 세계 최고 수준의 전자정부를 경험한 한국인으로서 그만큼 따라오지 못한 미국의 행정이 불편하기도 했다.


장을 보러 가는데도 차를 타고 가야 하는 나라에서 운전면허를 발급받는 일은 생활을 하는데 필수적인 일이다. 짧게 여행을 가는 것이라면 우리나라 경찰서에서 발급받은 국제면허증으로 해결되겠지만, 생활을 하는 입장에서는 국제면허증으로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내가 머물렀던 메릴랜드 주는 한국의 운전면허증을 소지하고 있으면 운전면허 시험을 보지 않고도 간단한 절차를 거쳐 면허를 발급받을 수 있는 제도를 운용하고 있었다. 면허를 발급받는 데는 3시간 동안 술과 약물에 대한 온라인 교육 후 시험장에 가서 간단한 시험을 보고 합격하는 것이 필수적이었고, 이 합격증과 함께 한국에서 면허를 소지하고 있다는 증명서(한국에서 미리 발급받았다), 메릴랜드 주에 거주하고 있다는 증명(은행의 카드 사용 명세서와 같은 우편물) 등 요구되는 서류를 갖춰서 관공서에 가면 됐다. 


먼저 온라인을 통해 술과 약물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술과 약물을 하고 운전을 하면 안 된다는 기본적인 내용부터, 술을 자동차 안에 놓고 운전할 경우 한 병(캔)이라도 포장상태에서 이탈해 있으면 술을 먹고 운전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구체적인 내용까지 메릴랜드주가 규정하고 있는 내용들을 공부했다.


온라인 교육을 마치고 시험을 보러 갔는데, 시험을 보는 방식부터가 응답하라 1988에 나올법했다. 나는 아내와 함께 가서 시험을 봤는데 특별히 시험을 위해 마련된 장소라고 할 수 없는 책상에 앉아 문제지와 답안지(객관식이었다) 그리고 연필을 주고 10문제를 풀게 했다.


아내가 운전면허 소지자가 숙지해야 하는 술과 약물 관련 규정에 대한 시험 합격 후 받은 증명서


문제를 풀고 바로 직원이 채점을 한 후 바로 그 자리에서 직원이 위의 사진과 같이 '교육을 마치고 시험에도 합격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서류를 발급해 주었다. 사진에 나와있는 것처럼 당사자에게 인적 사항을 적게 하고, 직원은 사인을 해주는 서류였다. 첫 번째로 이런 복고풍(?)의 서류 발급이 신선(?) 했다.


당당히(?) 한 번에 시험에 합격하고, 다음 날 요구되는 서류를 갖춰 운전면허와 자동차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MVA(Motor Vehicle Administration)에 갔다. 고난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쓰여있는 대로 서류를 준비해 갔는데 서류가 부족하다면서 우리를 돌려보냈다. 


메릴랜드 주 솔즈베리시의 MVA 전경


서류 미비를 이유로 거절을 당하기를 두세 번 반복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뭘 어떻게 보강하면 되는지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지도 않았고, 제대로 설명을 해주지 않으니 담당자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인지도 믿음이 가지 않았다. 


재미있는 일은 다음에 벌어졌다. 아내가 거절을 당하고 그냥 돌아가지 않고 번호표를 새로 뽑아 다른 직원이 있는 창구로 가서 한번 더 시도를 해봤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불과 몇 분 전에는 서류가 미비하다면서 면허를 발급해 줄 수 없다던 일이 서류가 다 갖춰졌다고 판정을 받아 면허 발급 절차가 시작됐다. 아내와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기본적인 서류에 미비가 있어 아내만 신청을 했는데 아내는 이렇게 나보다 빨리 면허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MVA의 내부 창구 모습


위 사진은 MVA의 창구인데, 우리나라의 관공서나 은행과 같이 번호표를 뽑고 자신의 번호표와 창구 번호가 뜨면 가서 일을 보면 됐다. 아내의 면허 발급 이후 우리는 관공서에 갈 때마다 새로운 버릇이 생겼는데, 그건 창구에 있는 공무원들의 관상, 인상, 안색을 살피는 거였다. 그리고는 대기하는 자리에 앉아 "저 인상 좋은 분에게 가야 친절하고 원활하게 일을 처리해 줄 것 같다", "저 사람은 아시안계니까 같은 아시아인에게 잘해주지 않을까"같은 대화를 나눴다. 절차나 규정대로 일이 처리되는 게 아니라 공무원의 성향, 기분에 따라 일이 처리된다는 인상을 받으니 갈 때마다 긴장까지 하게 됐다. 


내가 운전면허를 발급받을 때는 더 황당한 일도 겪었다. 영어도 못하는 주제에 영어를 잘하는 아내에게 신세를 지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자랑스러운(?) 남편이 되겠다는 객기로 혼자 서류를 들고 갔다. 서류를 살펴보던 직원이 나와 내 오른편 뒤쪽에 마련된 운전면허 시험 장소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서류는 잘 갖춰진 거 같다. 이제 저기로 가서 시험을 봐라" 


한국 면허와 메릴랜드 주의 면허를 상호 인정하는 협약으로 운전면허 시험을 볼 필요가 없었던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깔끔하게 납득할 수 없는 이유였지만 면허를 발급해주는 권한은 관공서에 있기에 서류를 보강해 오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번거롭게 몇 번씩 왔다 갔다 했지만,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생각에 안 되는 영어로 항의를 시작했다.


"네가 잘 모르고 하는 소리 같은데, 나는 시험이 필요 없다"라고 얘기하고서는 계속 자리에 버티고 있었다. 내 얘기를 들은 공무원도 당황했는지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 선배로 보이는 사람에게 가서 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선배가 무언가 자세히 설명을 하더니 함께 내가 있는 창구로 와서는 나에게 "네 말이 맞다. 너는 시험 안 보고 면허받을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다. 


나에게 잘못 얘기해줬던 공무원은 사과도 한마디 없고, 선배 이야기를 듣고는 면허 발급 절차를 시작했다. 미국에서 안 되는 영어로 내 권리를 찾는 데 성공했다는 뿌듯한 기분도 들었지만, 어떻게 일처리를 이렇게 할 수 있나 싶은 생각이 더 컸다.


미국 관공서가 좋았던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건 한국과 같이 증명사진을 따로 준비해 갈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학교에서 신분증을 발급받을 때도,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을 때도 모두 창구에 설치된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일이 처리됐다. 다른 모든 것들은 미국의 관공서가 한국의 관공서를 배워야 하지만 이 점만큼은 한국에 적용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운전면허 발급을 받으면서 경험했던 MVA의 복불복식 일처리는 자동차를 등록하거나 미국을 떠나면서 번호판을 반납하는 관련된 일을 할 때도 동일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어떤 공무원에게 가야 일이 잘 처리될까를 눈치 볼 필요 없이 예측 가능한 시스템으로 일이 처리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다.


사회보장제도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SSA(Social Security Administration)


MVA와 함께 몇 차례 갔던 관공서는 사회보장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이곳의 공무원들은 다른 곳의 공무원들보다 몇 배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복지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한정된 업무시간 속에서도 자세하게 관련된 정책과 서비스를 설명해주고, 안내해주고, 필요한 일들을 처리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일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느낌은 동일하게 받았다. 나는 사회보장 카드를 발급받았다. 보통 절차가 진행된 후에는 우편으로 카드를 받는 데 1-2주가 소요되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나는 한 달이 훌쩍 지난 후에야 카드를 받아볼 수 있었다. 덕분에 그 사이에 왜 카드가 안 오는지를 문의하러 관청에 가야 했고, 2주 안에 카드를 받지 않으면 해당되는 카드의 신청이 무효화되기 때문에 다시 발급 신청을 하는 일을 여러 번 반복했다. 


미국은 배울 점이 많은 나라임에 틀림없지만, 공무원의 우수함과 관공서의 일처리는 한국이 월등하게 앞서있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의 우수한 행정서비스가 미국에도 수출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면서 좋은 담당자를 만나 원만하게 업무를 처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기원하면서 미국의 관공서를 드나들었다. 일 잘하기로는 한국 공무원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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