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포아빠 Jul 29. 2019

미국, 역사에 집착하는 나라

미국 겉핥기_네 번째

미국은 영국과의 독립전쟁 끝에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 토마스 제퍼슨이 초안을 잡은 독립선언문을 채택함으로써 미 합중국으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미국의 역사가 300년이 채 되지 않은 것이다. 빛나는 5,000년 역사를 내세우며 단군 할아버지가 터 잡으신 이후 대대손손 훌륭한 인물 100명의 위인을 노래로 부르는 우리에게는 시간상으로 보잘것없는 역사다.


좀 더 인심을 써서 존 스미스라는 군인이 제임스타운에 도착해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한 1607년으로 미국의 역사를 봐준다고 해도 이제 갓 400년이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때(1492년)를 시작으로 해도 500년 정도다(인심 많이 썼다).


그런데 미국을 돌아다녀보면 얼마 안 된 나라가 ‘집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역사를 강조하고,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누구도 달리 생각하지 않을 역사적인 도시와 장소는 물론이고 시골 동네에도 역사가 넘친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역사가 아닌 집, 건물, 길이 없을 정도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도 도로와 골목 입구에 ‘Historic Road’, 'Historic District'라는 표지판이 즐비하다.  



워싱턴 D.C 매사추세츠 거리(Massachusetts Avenue)에는 세계 각국의 대사관이 모여있다. 단순히 대사관 건물들이 서있는 것이 아니라, 경쟁이라도 하듯이 각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들과 상징들도 함께 어우러져 있다. 서재필 박사의 동상과 제주 돌하르방을 앞세운 우리나라 대사관과 문화원도 이 거리에 큰 규모로 자리 잡고 있다. 위 사진에서 보듯이 이 거리의 가로등에는 역사적인 구역이라는 표지판이 달려있다. 각국의 대사관이 모인 세계의 축소판이자 치열한 외교전쟁이 펼쳐지는 곳이어서인지, 또 미국인이 아닌 내가 모르는 역사의 현장이어서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특정한 구역을 역사적인 공간으로 만들어 관리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매사추세츠 거리에서 멀지 않은 로건서클(Logan Circle)은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공관인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건물은 최근에 매입과 보수공사를 거쳐 개관했다. 로건서클 주변도 역사와 관련된 스토리를 이어 도보를 통해 둘러볼 수 있도록 지점마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와 안내가 전달되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미국의 역사에서 독립전쟁은 오늘의 미국을 있게 한 사건이다. 그래서 그 역사를 보존하고 교육하는 것은 미국인들에게 매우 중요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사를 대하는 스케일은 남달랐다. 사진은 독립전쟁 마지막 격전지로 미국이 항복을 받아낸 요크 타운의 전쟁터를 안내하는 여행 표지판인데, 걸어서는 둘러볼 수가 없고 드라이브 코스로 삼아야 하는 평야지대를 모두 독립전쟁의 현장으로 보존하고 있었다. 특별한 때에는 전쟁을 재현하는 등의 행사도 열린다고 한다.   



미국의 수도와 역사적인 사건 현장을 벗어나 주(State) 단위에서도 역사라는 단어와 기록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델라웨어(Delaware) 주의 행정수도인 도버(Dover)에는 델라웨어 주가 미국의 연방헌법을 최초로 비준한 주라는 사실을 새긴 표지석이 주청사(의회) 앞에 박혀있다. 밑에는 도버의 오래된 감리교회 건물인데 사진 왼쪽 벽에 붙여진 표지판에서 알 수 있듯 국가가 공인한 역사적 건물(National Register of Historic Places)로 보존 및 관리되고 있다. 최초의 기록을 주도(州都) 한복판에 새겨 넣고, 오래된 건물을 유산으로 보존하는 노력이 엿보였다.



국가와 행정기관뿐 아니라, 민간차원에서도 이런 노력을 하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문화유산을 지키는 비영리 활동인 내셔널 트러스트 활동이 미국에서도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사라질 위기에 처하거나 국가가 관심을 갖지 못하는 문화유산을 매입해 관리하는 활동을 하는 미국의 National Trust for Historic Preservation(NTHP)을 알리는 배너를 메릴랜드(Maryland)의 행정수도인 아나폴리스(Annapolis)에서 볼 수 있었다. 이 단체는 '사라질 위기에 처한 역사적인 장소'를 선정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역사적인 장소와 유산을 지키고, 관심을 환기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내가 살았던 동네에서도 역사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기초자치단체라고 할 수 있는 행정구역인 County의 공공의료 부서의 사무실에는 이 기관이 설립된 연도부터 현재까지를 표기하고 있었다. 사실, 우리가 동네 보건소를 갔을 때 그 보건소가 만들어진 연도를 확인하기 어려운 것을 생각하면, 동네의 공공의료 기관의 설립연도까지 표시하는 태도는 인상적이었다. 


동네에 있는 공원도 역사 공원이라는 표지판과 함께 나들이 나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이방인인 내가 볼 때는 별것 없는데도 이 공원에 있는 목조건물을 만든 사람을 기념하면서 이 공원이 역사적인 공원이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나라의 수도와 독립전쟁의 현장은 물론이고 각 주와 동네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역사가 아닌 곳이 없을 정도로 곳곳을 역사로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미국의 곳곳에서 질리도록 발견되는 'HISTORY' 단어가 새겨진 표지판을 보면서 미국이 가진 자부심과 열등감을 동시에 본다. 비록 짧은 역사이지만 오래된 그 어느 국가와도 비교할 수 없는 힘으로 세계를 이끌어간다는 강대국의 자부심. 스스로 발전시킨 민주주의와 인권을 보편적 모델로 세계에 전파하고 문화와 과학기술로 세계인들의 선망을 받으며, 배우고 취업하고 살기 위해 몰려드는 꿈이 있는 나라가 되었다는 자부심. 짧지만 그렇게 이어져온 시간들이 한순간도 빼놓을 수 없이 모두 이런 나라를 만들어온 역사적인 시간이었다는 자부심. 그런 순간과 장소를 하나도 놓칠 수 없다는 부지런함이 대륙의 발견과 식민지 시대를 넘어 독립선언 이후의 모든 장면과 장소들을 역사로 만들 수밖에 없도록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와 함께, 미국은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스스로의 각성과 힘으로 독립을 쟁취한 신생 독립국가다. 아무리 큰 힘과 세계를 리딩 하는 기술을 가졌음에도 짧은 연륜과 여전히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가진 사회의 치부에 대한 부끄러움과 열등감을 숨길수 없을 것이다. 이를 '우리는 역사적인 나라'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모면하고, 지워가면서 미국인들의 결속력과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것은 아닐까. 미국이 지나온 모든 시간들이 세계 속에 내세울만한 역사였음을 자랑하면서, 빈약한 시간을 모두 역사로 만듦으로써 미국 다움을 만들어가려는 노력. 그것이 모든 것을 역사로 만드는, 눈과 발길이 닿는 모든 곳에 역사라는 단어를 새기는 미국인들의 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개길 때는 개겨야 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