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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포아빠 Jul 29. 2019

신뢰를 얻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간신히 여의도 서식기_ 네 번째

나를 뽑은 사람들이 내 서류를 볼 때부터 나에 대한 신뢰가 팍팍 생겼다면 참 좋았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럴만한 스펙이 내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니는 학교, 토익점수, 컴퓨터 관련 자격증, 각종 공모전 수상, 어학연수 경험 무엇하나 없었다. 이런 스펙들이 실제로 일을 잘하고, 조직에 도움이 되고, 사람들과 조화롭게 지내는가 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기에 그런데 신경을 쓰지 않은 것에 대해 지금도 후회하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모르는 사람을 볼 때 그런 것들이 신뢰감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준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3순위로 들어왔는데 오죽했겠는가. 


의심의 눈초리가 느껴졌다.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않고, 사회경험이라곤 알바가 전부인 이 몸집 큰 청년이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시선들. 당연한 시선이었다. 어느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자리를 잡지 못한다는 느낌은 몸은 거기 있으면서도 이방인 같은 소외감을 들게 하고, 내가 쓸모없는 사람인가 하는 자괴감도 들게 해서 사람을 여러 가지로 위축되게 했다. 그러면서도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과 재능들에 대한 알 수 없는 자신감도 있었다. 신뢰를 받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견뎌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어딜 가든 자랑스럽게 내세울 '정량지표'가 없다는 점은 내게 늘 콤플렉스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인턴이라는 자리가 원래도 위치와 역할이 확실하지 않은데, 뭘 확실히 맡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주는 존재이다 보니 더 힘들었다. 나와 팀을 이룬 보좌관도 뭐하나 객관적으로 특출 난 스펙 없는 애를 붙잡고 일을 하는 게 갑갑했을 것이다. 우선은 시키는 여러 가지 일들을 열심히 했다. 함부로 의견을 내거나, 나서거나 하지도 않았다. 신뢰를 얻은 후에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얘 괜찮네'하는 반응을 받는 계기가 생겼다.


당시에 국민연금과 같은 각종 연기금의 규모가 커지고, 향후 인구감소로 고갈에 대한 우려가 생기면서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주요한 의제였다. 지금도 이 문제는 중요한 이슈인데, 국민연금이 주식시장의 큰 손으로 기업의 의사결정에 주요한 행위자로 등장해 활동하는 것이 그 예이다. 당시에도 연기금은 나중에 다시 기여자들에게 돌려줘야 하는 돈이기 때문에 손해를 볼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투자는 하지 말고, 수익률은 낮지만 안전한 채권에만 투자해야 한다는 주장과 좀 더 공격적으로 투자해서 수익률도 높이고 기금이 가진 사회적 성격을 반영해 기업 지배구조가 건전해지고, 국민경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펼쳐졌다. 


함께 일하는 보좌관이 이에 대해 자료집을 낼 거라고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공무원 연금인 캘퍼스(CalPERS)등의 운용 내용들을 참고로 우리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보겠다는 거였다. 그리고서는 내게 몇 개의 논문과 자료를 던져 주면서 "자료집을 개조식으로 만들건대, 여기에서 제시하고 있는 문제와 해결방안에 대해 Q&A 형식으로 질문 하나당 서너 개의 답을 간결하게 정리하라"라고 했다. 


주제와 내용이 어려워서 막막했고, 내 개인적인 입장과 관점을 가질 처지도 아니었지만 열심히 공부하면서 자료를 읽고, 질문과 답을 정리했다. 허용된 시간이 지나고 정리한 내용을 보좌관에게 내밀었다. 무표정한 표정으로 받아 든 보좌관의 표정이 이내 밝아졌다. "하하 제법인데?" 맘에 드는 모양이었다. 이후에 자료집은 내가 작성했던 부분이 반영되어서 발간되었고, 활용됐다. 


당시 작성했던 내용 중 한 부분


어떤 역할을 했다는 뿌듯함, 함께 일하는 사람의 부드러워진 눈빛에 신이 났다. 조급하고 불안했던 마음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됐다. 이전에도 보좌관(3회에 등장하는 보좌관이 아니라 나와 짝을 이룬 보좌관이다^^)은 내게 친절하게 대해줬지만, 이후에는 더 편히 나를 대해주었고 더 많을 일을 맡겼으며, 진심으로 인생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내가 3순위로 들어왔다는 비화를 들었던 것도 이 일이 일어난 이후였다. 


내게는 지금까지 조직과 사람에 대한 고민이 계속되고 있는데, 점수만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뽑는 것은 과연 온당한가 이다. 물론 내가 시험을 잘 보고, 스펙이 좋고, 자격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면이 분명 있겠지만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 또 다양한 필요를 지닌 조직이 획일화된 평가방법으로 사람을 뽑는 것은 조직의 활력과 발전에 좋은 영향만 미치는 것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정량평가'로 측정되지 않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능력과 역할이 있다는 증거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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