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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포아빠 Aug 01. 2019

도장, 찍어주면 끝이다: 옥새파동

간신히 여의도 서식기_다섯 번째

국회의원의 의정활동에 있어서 절차를 완성하는 것은 국회에 등록해 놓은 도장을 찍는 것이다. 직원의 임명과 면직을 요청하는 일부터, 국회 사무처와 선관위 등에 제출하는 서류 등에 국회의원의 도장이 찍혀야 효력을 갖는다. 의원 도장이 가장 많이 쓰이고, 중요하게 쓰이는 일은 뭐니 뭐니 해도 법안 발의를 할 때다. 국회의 핵심 권한 중 하나인 법안을 발의하는 데는 10명 이상의 국회의원이 동의를 해야 국회 의안과에 제출이 가능한데 법안에 동의한다는 의사표시가 도장을 찍음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잠시 곁길로 빠지면, 국회에서 일하는 동안 도장을 통해 법안을 발의하는 방식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인감도장의 쓰임에서 보듯이 도장이라는 것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다. 많은 업무들이 전자적으로 처리되고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기술적 환경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법안을 발의하기 위해서 수백 부를 복사해서 각 의원실에 돌려 공동발의를 요청하고, 동의를 하는 의원실을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많은 시간을 들여 도장을 받아야 한다. 또 그렇게 자료를 갖춰 국회사무처 의안과에 가면 등록된 도장이 맞는지 일일이 대조를 하느라 시간을 보내고 어쩌다 법안을 철회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다시 공동 발의했던 의원실을 찾아가 철회 도장을 받아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 자료요구의 경우 예전에는 자료요구서를 만들어 도장을 찍고, 팩스로 보냈다가 이제는 '의정자료유통시스템'이 만들어져서 인터넷 망을 통해 요구하는 방식으로 변화가 이뤄졌는데 법안 발의의 방식은 여전히 과거의 방식이 고수되고 있다. 개선이 필요하다. 


여하간 이 도장, 의원실의 옥새를 관리하고 찍는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가는 의원실마다 다르다. 도장을 철저하게 의원 스스로 관리하면서 찍을 일이 있을 때는 일일이 허락을 받고 찍는 의원실이 있는가 하면, 도장을 의원실에 두고 필요한 일이 있을 때 자유롭게 사용하고, 법안에 대한 공동발의 여부도 보좌관 선에서 결정해서 도장을 찍는 방도 있다. 의미가 있고, 상징성이 있는 중요 법안의 경우 최대한 많은 의원의 동의를 받거나, 당론으로 발의를 하기 위해 노력을 하지만 보통의 경우 발의 요건인 10명의 도장만 받아 제출하는 경우가 많은데 급한 경우 이 열 개의 도장을 채우기 위해 보좌관에게 권한이 있는 의원실에 연락을 해서 빠른 시간에 법안 발의 절차를 완료하는 것이 일 잘하는 보좌관의 요건으로 통하기도 한다. 또, 어떤 방이 어떻게 도장을 관리하는지는 친한 의원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도장 찍어주는 걸 거절하는데 가장 많이 쓰이는 레퍼토리가 "나는 찍어주고 싶은데, 도장을 의원님이 관리하기 때문에 보고를 해봐야 한다"다.


내가 인턴으로 일했던 의원실은 도장을 의원실에서 관리하면서 자유롭게 사용하는 쪽에 속해있었다. 그래서 보좌관이 의원실로 들어오는 공동발의 요청에 판단을 해서 도장을 찍어주는 일도 많았다. 어느 날, 어쩌다가 내가 사무실에 혼자 남겨져 있는 순간이 있었다. 어리바리한 인턴 혼자 남아있는 그 시간 하필이면 다른 방 보좌관이 들이닥쳤다. 그리고서는 공동발의 명부가 담긴 파일을 들이밀면서 "의원님들끼리 공동 발의하기로 다 얘기가 됐으니 도장을 찍어달라"는 것이다. "아... 그런가요?"하고 나는 도장이 보관되어 있는 함으로 가서 도장을 꺼내고 행여 도장이 흐릿하게 찍힐까 명부를 책으로 바치고 꾹 눌러 정성스레 도장을 찍어주고 인사까지 깍듯이해서 그 보좌관을 돌려보냈다. 도장을 찍어주는 것은 보좌관이나 의원이 결정하지만 결정이 되면 인턴인 나에게 "오재야 이거 도장 좀 찍어줘라"하고 시키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도장을 찍고, 그걸 복사해서 의원실용으로 하나 챙겨 놓은 것이다. 


큰 실수였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도장을 찍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명확하게 듣거나, 묻지도 않은 상황에서 확인을 하지 않은 채 다른 의원실 보좌관의 말만 듣고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의 공식적 의사 표명 절차인 도장을 찍어준 것이다. 설마 없는 말을 했겠나 순진한 마음이었던 거 같은데, 꼼꼼하고 확실하게 일처리를 하지 않은 커다란 실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에 들어온 보좌관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사후 보고 했는데,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찍어주기로 한 적이 없다는 거였다. 의원님들끼리 얘기가 됐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그 법이 대표발의하는 의원과 그 지역에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법이라서 의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이거 찍어주지 말라는 이야기까지 했다면서 내게 면박을 주었다. 


내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고, 아 이렇게 국회 생활이 끝나는 건가 하는 과도한 생각까지 들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 뒤통수를 치고 도장을 받아간 의원실의 보좌관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인턴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이 아니었다. 이 일이 해결되기까지 몇 시간 동안 그렇게 난처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왜 그랬을까 하는 자책과 괴로움이 일순간에 몰려왔다. 울고 싶었다.


보좌관과 비서관의 노력과 수습으로 수 시간이 지나서 해결이 됐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지옥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구원받은 느낌이었다. 시뻘게진 얼굴도 일이 해결된 후 다시 다시 제 안색을 찾았다. 무엇보다 의원실의 모든 사람들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의원이 알기 전에 일이 수습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조용히 넘어갈 수 없는 일이 될 테니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옥새파동을 겪으면서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꼼꼼하고 확실하게 점검하고, 확인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 인생 사건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부터 나오는 경험이지만, 사회초년생에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심장 떨리는 사고였다. 국회의원의 대외적인 의사결정과 행위는 법을 바꾸고, 예산에 영향을 주고, 여론에 반응하고, 주요 이슈에 입장을 천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렁설렁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말 한마디로 한 순간에 지탄의 대상이 되고, 넘어지는 정치인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사회 초년생은 큰 교훈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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