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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포아빠 Aug 01. 2019

흑인의 역사가 미국의 역사다

미국 겉핥기_다섯 번째

어느 나라와 사회에서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건드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 특히 정치인과 공직자들은 이런 문제를 조심하고, 언행을 삼간다. 친구사이에는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친구의 부모를 욕하거나 가족을 건드리지 않듯이.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정치인 아무개가 “평등한 사회는 애초부터 불가능하고 신분제를 공고히 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정치적으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국민을 통합하는 상징으로 작용하고, 존중하고 기림으로서 사람들의 자부심을 강화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미국에서도 여전히 인종문제가 갈등이 표면화되는 사건이 일어나는 뜨거운 감자 같은 이슈이지만, 적어도 흑인을 노예로 다시 돌려놔야 한다거나 흑인에게 투표권을 주어서는 안 된다거나,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을 정치인들이 입에 담지는 않는다. 물론 흑인들에게도 투표권이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내뱉지 못할 수도 있지만, 흑인이 노예에서 해방되고, 시민의 자격을 얻어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방향으로 발전해온 자유와 평등의 역사가 바로 미국이 전 세계에 자랑하는 미국의 정체성이므로 이를 부인하는 것은 곧 미국을 부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2016년 9월 워싱턴 D.C 내셔널 몰의 한 복판에 미국 흑인의 역사를 총망라한 ‘미국흑인역사문화국립박물관’이라는 긴 이름의 박물관이 개관했다(National Museum of African American History and Culture).


이 박물관은 흑인들이 미국으로 건너온 이래 노예해방, 흑백분리 법에 따른 각종 차별에 대항한 민권운동,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탄생까지의 무거운 역사를 다룰 뿐 아니라 음악, 체육 등의 분야까지 미국에서 흑인들이 이룩한 성취들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박물관 개관식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 외에 전직인 조지 부시(아들)가 참석해 "위대한 나라는 역사를 감추지 않는다. 항상 결함을 직시하고 그것을 바로 잡는다"는 축사를 했다. 그가 행사에 참석해 축사까지 할 자격을 얻은 것은 바로 그가 이 박물관을 건립하는 법안에 서명을 한 대통령이기 때문이었는데 이 점이 퍽 인상 깊었다. 그가 가장 보수적인 남부 텍사스의 백만장자이기 때문이다.


별다른 인권감수성과 흑백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을 것 같은 남부 기득권 출신의 대통령도 흑인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최초의 국립박물관 건립에 흔쾌히 서명한 것이다. 그만큼 이 문제가 미국의 정체성임을 보여주는 일이고, 미국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인권, 자유, 평등의 증거임을 나타내는 장면이었다.


미국이 흑인의 역사를 국가적이고 공식적으로 소중하게 다루고 기리는 것은 다음의 두 장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은 미국 메릴랜드 주에서 노예로 태어났으나 펜실베이니아로 도망해 자유를 얻은 흑인이다. 그는 자신이 자유를 얻은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여전히 노예상태에 있는 흑인들을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북부의 주들로 탈출시키는 일에 헌신했다.


당시, 흑인들이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길을 지하철로(Underground Railroad)라 부르고, 이 길을 인도하는 사람을 차장이라고 불렀는데 노예들이 있는 곳으로 잠입해 이들을 규합하고, 안전하게 탈출시키는 차장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터브먼은 이런 차장의 역할을 가장 잘 해낸 사람으로 흑인들의 인권신장에 평생을 바쳤다.      
        
애초 메릴랜드주의 주립공원으로 설립됐으나 2017년 3월부터 국립공원으로 격상되어 국가와 주가 함께 운영하는 역사유적지가 됐다. 터브먼의 일생과 활동을 전시할 뿐 아니라, 자동차로 흑인 노예들의 탈출 경로도 돌아볼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었다.


프레데릭 더글라스(Frederick Douglass) 또한 노예 출신인데, 노예로는 드물게 글을 배워 자유에 눈뜨고 탈출해 자유를 얻은 사람이다. 그는 연설가이자 언론인으로 노예해방과 흑인 인권 신장의 이론을 설파하고 많은 사람들을 움직인 운동가로 기록된다. 특히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인생 이야기’(Narrative of the Life of Frederick Douglass, an American Slave, 1845)라는 제목의 자전적 책을 발간해 흑인문학을 창시하고, 흑인들의 고달픈 삶을 알린 작가로 당시 흑인으로는 최초로 외국 대사관의 공사로 임명되는 등 정치인이자 외교관으로서도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미국 의회가 내려다 보이는 아나코스타 언덕에 Cedar Hill이라 명명한 집에서 살았는데 그 집이 사진과 같이 국립역사공원으로 보존되고, 많은 사람들이 견학하는 유적지로 운영되고 있다. 나도 미리 해설사의 설명이 있는 투어 프로그램을 신청해 방문했는데 그의 서재, 침실, 식당 등이 잘 보존되어 흑인 인권을 위해 활동한 그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국가가 흑인의 역사를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 보존하고, 기록하고, 교육하는 모습에서 여전한 갈등과 폭력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인종문제에 대해 미국이라는 나라의 입장은 명확한 것임을 확인한다. 미국인들이 무엇이 그들을 만들어 온 것이며, 그들이 가졌고 가져야 할 정체성은 무엇인지 합의하고 있음도 본다. 그래서 국가를 대표하는 지도자와 정치인들도 내심이 어떻든 그것을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내셔널 몰의 아름다운 호수인 타이달 베이신(Tidal Basin) 주변에는 2011년 개관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기념관(Martin Luther King, Jr. Memorial)이 들어서 있다. 미국 국립공원 홈페이지가 소개한 글을 보면 “자유와 평등, 정의를 위해 투쟁한 킹 목사의 업적을 기리는” 장소라고 되어 있다. 그걸 놓치는 순간 미국은 더 이상 미국이 아님을 그 누구보다 미국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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