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포아빠 Jul 25. 2019

개길 때는 개겨야 한다

간신히 여의도 서식기_세 번째

나는 대체적으로 사람들에게 둥글둥글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편이다. 


불편한 얘기를 들어도 상대방 앞에서는 내색을 잘하지 못하는 편이다. 또 그걸 누구에게 풀어놓기 보다도 속으로 앓고 삭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위의 지시나, 평가에 대해서도 토를 달기보다는 받아들이고 웃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다른 이와 부딪히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큰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걸 가지고 다퉈봤자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있기도 하다. 이건 장점이기도 하지만, 단점이기도 하다. 이런 성격에도 도저히 웃고 넘어갈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아무리 좋은 게 좋은 거라도 아닌 건 아닌 때도 있으니까.


인턴이던 시절, 지금의 카카오톡과 같이 업무에 대한 대화와 각종 파일들이 하루 종일 바삐 오가던 수단은 MSN 메신저와 네이트온이었다. 지금의 기억으론 그때가 MSN 메신저에서 네이트온으로 대세가 옮겨오던 시절이었다. 네이트온에는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대화명을 쓰도록 되어있었다. 


일한 지 두어 달 지났을까, 나는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각오와 나 스스로에 대한 기대로 "내 앞길이 구만리다"라는 대화명을 적어놓고 있었다. 그 대화명 때문에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두 명의 보좌관 중 한 명이 그 대화명을 보고는 나에게 "니 앞길이 구만리는 무슨 구만리야, 넌 그냥 인턴이나 하는 게 최대치 같은데 그냥 만족하고 살아"라고 말했다. 그것도 나에게만 대화창으로 이야기한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목소리를 발성해서 말했다. 우선 다행이었던 건 그가 나랑 팀을 이룬 보좌관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함께 일을 하거나, 부딪힐 일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도 될 일이었단 뜻이다(그와 한 팀을 이뤘던 인턴 동기 누나는 몇 달 후 국회를 그만두며 내게 '다시는 국회 쪽으로는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일도 없을'거란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런데 이건 좀 경우가 달랐다. 그 말을 들은 후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이것도 그냥 웃고 넘어가야 하나?, 4급 보좌관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거길래 나한테 이런 막말을 하지?' 등등... 결론은 '그냥 웃고 넘어갈 수 없다'였다. 일을 못한다고 혼난 것도 아니고, 글을 못쓴다고 혼난 것도 아니고, 그냥 내 인생 자체에 대한 이유 없고 맥락 없는 조롱이었다. 그 말이 내 인생에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 헛소리라고 할지라도 허허실실 웃으며 넘길 수는 없었다. 평생 이 모양 이 꼴로 살라는 말이었으니까.  


얼굴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제 인생 아직 구만리 남았는데요?", 그의 눈빛에 당황이 스쳤다. 그는 "아 그래?" 하더니 얼굴이 벌게진 채로 컴퓨터로 눈동자를 옮겼다. 내 자리로 돌아와 대화명도 바로 바꿨다. 그 대화명은 이랬다. "보좌관님, 제 인생은 구만리 남았습니다". 이 대화명을 일주일 이상 바꾸지 않고 썼다. 그가 내게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야 할 때 그는 그 대화명을 계속 봐야 했다. 사무실의 다른 사람들은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는 듯 키득키득 거리기도 했고, 대화명을 본 친구들은 무슨 일 있냐고 묻기도 했다. 


그가 내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 후론 나도 그를 우습게 봤기 때문에 진지하게 대화를 해 볼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내게 국회에서 일하면서 잊히지 않는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로 각인되어 있다.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반면교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직급이 낮다고, 힘이 없다고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아무리 백이 없고, 당장 잘리면 갈 곳 없는 약자라도 소중하고 귀한 한 사람의 인생에 돌을 던지는 일에는 비명을 질러야 하고, 화를 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런 일에도 '내가 약자니까 참자'라고 넘어갔다면 그의 말 때문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 대한 창피함 때문에 정말 나는 거기서 멈춰버렸을지도 모른다. 개길 때는 개겨야 한다.


그때의 나와 같은 '인턴'들의 건투를 빈다.

작가의 이전글 일하는 노인들의 나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