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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 Jul 24. 2024

초록대문집 여름 사이

 삼년 전 네 번째 소설집을 준비하던 때였다. 편집장이 바뀌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별로 관심을 두지 않던 차에 전화를 받았다. 들리는 소문에는 이혼남에 유학파라고 했다. 서영은 단지 귀찮을 뿐이었다. 편집장이 바뀌면 작품에 대해 또 서로 조율하는 시간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서영은 고집이 센 작가였다. 삼 년 전 서영이 그와 처음 만났던 곳이 바로 여기였다. 그 날도 서영이 들어서자 마른 소주를 혼자 마시고 있었다. 그 때는 서영이 불면증에 일주일 째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유학 간 아이들 진학 문제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기도 했다. 그런데 싱싱한 해산물들을 보는 순간 식욕이 막 솟구쳤던 것이다. 산 낙지에 해물탕에 밥까지 주문해서 깨끗하게 비우는 서영을 보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만 보던 그였다. 그 뒤로 가끔 서영이 며칠 째 못 먹고 못 잔다 싶은 기미가 보이면 어김없이 그가 서영을 집 안에서 끌어냈다. 그럴 때마다 메뉴는 다채로웠다. 돌 냄비 위에서 펄펄 끓어대는 생멸치 찌개, 연탄불 위에서 꿈틀대는 꼼 장어, 입 안에서 살살 녹아 사라지는 향어 회. 그는 언제나 서영이 먹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 푹 잤어요?

  - 네!


  그는 드디어 참았던 웃음을 폭발하듯 터뜨렸다. 고른 치아가 한껏 드러났다.      

  - 네, 소리만 정확히 다섯 번이요!     

  서영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연이어 산 낙지가 한 접시 나왔다. 그는 소주잔을 비우더니 서영 앞에 놓인 빈 잔을 채워준다. 술잔을 채우는 것은 언제나 첫 잔 뿐이었다. 그는 더 이상 술을 권하지도 따라 주지도 않는다. 각자 알아서 마시는 것이었다. 그것이 서영에게도 더 편했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배려.      

  - 선물은?     

  그가 불쑥 말을 꺼낸다. 서영은 못 들은 척 술잔을 비웠다. 그는 다시 피식 웃으며 서툰 젓가락질을 하며 꿈틀대는 산 낙지를 건지려 애를 쓴다. 그러다가 포기한 듯 숟가락까지 동원해서 담아 입에 가져다 넣는다. 서영은 새어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전복 하나를 야무지게 꼭꼭 오래 씹었다.      

  - 한 달 동안 긴 생각을 해 봤어요!      

  서영은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해산물들을 부지런히 입에 가져갔다. 이런 상황을 피하고 싶은 심정을 뻔히 알면서도 말을 꺼내는 그에 대한 서운함까지 더해 있었다.     

  - 우리, 결혼합시다!     

  하마터면 서영은 술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술상 위에 불쑥 올려놓았다. 반지 케이스였다. 당황한 표정으로 멍하게 쳐다보고 있는 서영을 보더니 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더니 점점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제는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다. 서영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중년 나이에 이런 상황이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청혼이나 반지보다, 그가 진짜 울음이라도 터뜨릴까봐 겁이 난 것이다. 진짜로 울어버린다면, 서영은 도무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한 기억도 누군가를 위해 밤새 울어본 기억도 이제는 희미한 중년이다. 누군가 때문에 화가 가슴에 응어리졌던 것도 이제 다 기억에 묻힐 만큼 그런 나이다. 그저 흐릿한 눈빛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결혼이라니. 서영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한참 그를 응시했다. 그는 갑자기 소주를 연거푸 몇 잔 마셨다.      

  - 누가 보면, 같이 죽자고 한 줄 알겠소!     

  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외롭고 텅 빈 일상에 그가 유일한 말벗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어쩌면 그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다. 그러나 늘 부유하는 자신의 삶을 누군가와 함께 하기에는 너무 무책임하다. 서영은 자기 삶 안에 타인을 끌어들일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바닥난 양심이나 겨우 추스르며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늘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살아왔다.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양심. 누군가의 인생을 망칠 권리 따위 자신에게는 없다는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소주 두어 병을 비우고서야 술집을 나섰다.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는 서영의 손에 반지를 꼬옥 쥐어주었다.     

  - 평생이라도 기다릴 테니, 버리지나 말아요!     

  서영은 갑자기 가슴 속에 뜨거운 뭔가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울분인지 감동인지 그것도 아니면 화가 그제야 터져 나오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서영을 남겨둔 채 혼자 비틀거리며 비가 추적대는 밤거리를 걸어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서영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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