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글씨를 쓸 때가 자주 있진 않아요. 어쩌다 있지만 마음대로 잘 안 되고, 예쁘게 써야 할 때일수록 안 되네요. 자꾸만 펜이 미끄덩한 느낌이 나요. 오래전엔 글씨 예쁘단 말도 들어 봤는데 필기구가 손에 착 붙는 그 느낌은 이젠 기억 속에서만 존재해요. "에잇, 이건 내 글씨가 아냐!" 하고 다시 써 보지만, 이건 뭐 사람 글씨인지 꼭 무슨 지렁이가 똥을 싼 건지도 모르겠어요.
글쓰기 직전에 홈트레이닝을 해요. 그 둘이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 받아서요. 다른 생각을 하며 내가 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야 오래 할 수 있고, 그러니 머리도 좀 더 잘 돌아가네요. 플랭크일 때도, 푸시업일 때도 있지만 보통은 악력기예요. 현가본드는 그날도 악력기로 천천히 글가본드를 불러내고 있었죠. 딸깍, 딸깍, 딸깍.
악력기가 그날따라 새털처럼 가벼웠어요. 보통 2분 정도 하면 힘든데 그날은 10분을 넘게 해도 힘들지가 않았죠. 엇, 안 되던 게 되네? 기특한 나를 칭찬해 주자. 오늘은 악력 키우느라 고생한 나에게 작은 선물의 의미로 투뿔 불고기나 한판 때릴까? 난 투뿔 불고기는 숯불 불고기의 혀 짧은 소리라고 한 번도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그게 아니라네? 어떻게 생긴 건지 확인도 할 겸, 헤헷. 헤롱헤롱 흐뭇한 표정으로 제 팔을 보니, 제 손에 들려 있던 건 악력기가 아니었어요.
하이고 잉간아, 잉간아, 정말 왜 사니, 왜? 진짜로 땅이라도 파고 들어가서 누워야 할 판이네요. 이런 식의 에러가 저에겐 흔한데, 아직도 저는 세수용 비누와 면도용 비누 구별을 힘들어해서 세수용 비누 하나로 퉁쳐 버리고, 바디로션으로 머리를 감으면서는 무슨 놈의 샴푸가 이렇게 거품이 안 나냐고 화를 낸 적도 많아요. 오래전 군대 가기 전날엔 휴대폰을 가지고 나간다는 게 머리맡에 놓아 둔 TV리모컨을 가져가선 내일 군대 가는 놈한테 하루종일 전화 한 통을 해 주지 않는 모든 인간들을 원망하다 급우울해져서 펑펑 울었던 적도 있죠. 사람들은 저에게 치매 초기라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치매가 아니었던 적이 없어요. 그냥 머리가 많이 나쁘다고 해 두죠.
꽉 채워 놓은 스테이플러 클립을 몽땅 날려 먹고는 악력기를 집어 들고 다시 시작했죠. 제게 벌을 주고 싶어서 평소보다 두 배를 낑낑거리며 더 했어요. 이 루틴(이라 쓰고 사색이라 읽어요)이 없이는 글을 쓸 수 없어요. 한바탕 중노동을 하고는 악력기를 내려놓고, 이제부터 쓸 글을 연습장에 스케치했어요. 거기서 정말 내가 쓴 게 맞나 싶은 그 8자가 툭 튀어나온 거죠. 남들이 보기엔 잘 쓴 것까진 아닐 수 있지만, 그 정도도 저에겐 소중했어요.
그렇게 태어난 글이 신박한 브런술의 세계를 아느냥ㅋ (2022.6.21.)이었죠. 처음부터 손글씨를 넣으려는 생각은 아니었어요. 힘이 확 빠진 상태로 글을 스케치한다고 뭔가를 손으로 무심코 쓱쓱 쓰다가 화들짝 놀라서 "앗! 이건 넣어야 돼. 무조건 넣어야 돼!" 이게 된 거죠. 제가 그렇게 글씨를 잘 쓴 적이 여태 없었기도 했고, 어째 좀 장난기 철철 넘치는 느낌의 글씨가 나와서 그 글에 잘 녹아들어갈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뭔가를 잘하고 싶을수록 자꾸만 힘이 들어가는 걸 누가 모를까요. 이때 지도하는 쪽에서 늘 하는 말이 "힘 빼라 힘 빼라"이거죠.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또 힘이 들어가요. 일부러 만든 그 상태는 내 것이 아니니까요.
어쩌면 힘을 빼는 건 "힘 빼자 에잇!" 이래서 되는 게 아니라 있는 힘을 다 쏟다가 힘이 다하고, 또 있는 힘을 다하다 힘이 빠지고, 이게 반복되면 어느 시점부터는 힘이 가득 찬 상태에서도 힘이 빠진 상태의 모습이 나오지만 오히려 더 나은 결과를 내는 그 상태로 수렴하는 건 아닐까요. 운동선수를 조련할 때도 불필요하거나 겉멋이 든 동작을 뺄 때, 긴장된 상황에서 플레이가 위축되지 않게 훈련시킬 때 그 방식으로 하던데요.
글씨 쓰기만 그런 게 아니라, 글쓰기도 그런 것 같아요. 브런치에서 처음 글을 쓴 게 2022년 3월 31일이었죠. 열 달 정도 됐네요. 어제 누가 거기에 댓글을 달아 주셨어요(여러분들이 좋아하시는 COSMO 작가님에요). 덕분에 오랜만에 그때의 저를 보니 힘이 빡 들어가 있네요. 쇳소리가 났어요. 힘 빼라, 70% 힘만으로 써라, 이런 말은 그때도 귀 아프게 들었고 그때도 나름 힘 빼려고 애쓰긴 했어요. 딴엔 뺀답시고 뺀 게 그 모양이에요.
그러고 보니 강연도 그러네요. 처음에는 입직 후 고작 1년 만에 그 막중한 일을 맡은 걸 자꾸 의식하니 '나는 서툴다' 이 생각으로 꽉 차서 저도 모르게 힘이 잔뜩 들어갔죠. 아무리 힘을 빼려고 해도 스테이지에 올라가면 몸이 뻣뻣해져 버렸어요. 어찌나 힘을 쏟았던지 끝나고 분장실에서 관계자에게 '나쁘지 않았어요?'라고 묻는다는 게 "나쁘지 않..."에서 혀가 꼬여 어버버 할 정도였어요. 한참 후에야 알았죠. 그 상태에서 힘을 빼자고 스스로 다짐하거나 남에게 힘을 빼라고 말하는 그 자체가 잘못임을.
"노력하는 자를 이기려면 즐겨라" 과연 그럴까요. 설렁설렁 즐기듯 하면서도 남들보다 잘하는 사람들이 진정 처음부터 힘 빼고 즐겨서 그렇게 됐을까요. 혼신의 힘을 쏟고 힘이 빠진 그 상태가 습관이 되었을 뿐이고, 나중에는 힘이 얼마나 남아있든 그 상태가 그의 기본값이 되었을 뿐이겠죠. 그러니 우리 눈엔 마치 즐기는 것처럼 보일 뿐이겠죠. 그런 상태가 실제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면 그렇게 말하기 힘들 것 같은데요.
다시 글쓰기. 힘 빼고 설렁설렁 쓰는 듯한데도 쓰는 글마다 명글인 사람들이 부럽고 신기했어요. 나도 힘을 빼자. 호이! 시작은 창대하나 마지막은 똥망을 싸지르네요. 되는 듯하다가 원래대로 돌아가 버리는데 어떻게 그분들은 그렇게 힘들이지도 않고 술술 잘도 쓰실까요. 처음엔 신기했지만 이젠 당연해 보여요. 그분들은 온 힘을 쏟다가 힘이 다해 버렸고, 그 상태로 계속 쓰고 또 쓰다가 딱 그만큼의 힘으로 쓰는 상태가 습관이 되어서 그 이상의 힘이 필요치 않다는 걸 그분들의 몸이 알았을 뿐이겠죠. 알을 깨고 나온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요. 힘을 빼자는 건 초보인 저에겐 무리한 주문이기에 오직 그분들이 거쳐 간 길을 따라가고 싶을 뿐이에요.
눈이 녹고, 봄이 오고, 올해의 첫 출강이 곧 있네요. 공직자의 첫걸음을 내딛는 분들 앞에 서는 건 항상 설레고, 몇십 번을 해도 여전히 무겁게 다가오는 일이에요. 공무원은 소극적이고 태만하다는 인식이 있지만 숨어서 묵묵히 고생하는 분들이 있어 대한민국 공직 사회가 삐걱거리면서도 어떻게든 굴러가는 거고, 저는 그 숨어서 묵묵한 분들이 하나라도 늘길 바라면서 나갈 뿐이에요. 저에겐 두 달에 한 번 정도 계속 나가는 일상화된 일이지만 듣는 사람에겐 딱 한 번이라서 저는 단 한 번도 대충 할 수가 없었어요.
어느새 오래됐네요. 오래 한 것치곤 잘하진 못해요. 아직도 힘 빼는 걸 잘하지 못해서요. 하지만 그렇다고 저 자신에게 '힘 빼라' 이런 말은 안 할래요. 잘하고 싶은데 거기서 일부러 힘을 빼라는 그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말인지 이제 저는 알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힘을 뺄 수 있게 만드는 건 힘을 빼라는 누군가의 가르침도 아니고, 힘을 빼겠다는 스스로의 결심도 아니고, 오직 힘이 다한 그 상태로 계속 뭔가를 하고 있는 상태에 머물다 그게 습관되기까지의 기나긴 기다림임을 이제 저는 알기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