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1년에 평균 84.7병의 소주를 마신다고 한다. 정말? 암만 생각해도 난 2병이 넘지 않는데. 넉넉히 2.7병 마셨다고 쳐도 82병 남네. 내 82병은 누구 입으로 들어간 거지?
평균을 그렇게 왕창 갈아먹는 것도 모자라서 이 엄청난 양의 소주를 어딘가의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털푸덕 얹어줄 정도로 나는 술이 싫었다. 사람들 말로는 계속 먹다 보면 맛을 안다던데, 아무리 먹어도 내 입엔 그냥 병원 소독용 알코올이다(그리고 그 맛을 굳이 알려고 애써야 할 까닭도 모르겠다).
그러다 하루 종일 비가 와서 프로야구도 취소된 몇 년 전의 그날. 호기심에 혼술이란 것을 해 보고 싶었다.
소주를 사 왔다. 오징어회도 사 왔다. 소주잔은 필요 없다. 뚜껑 따고 한입 꼴깍. 우욱, 써... 땄으니 다 먹긴 해야지. 숨을 가다듬고, 두 모금... 아까보단 낫다. 세 모금... 오징어회를 초장, 된장, 와사비 간장에 번갈아 찍으며 조금씩 같이 먹는다. 으음, 나쁘지 않은데? 내가 알던 병원 알코올 맛이 아니잖아? 네 모금... 헤헤, 다섯 모금... 헤헤. 어느새 한 병을 꼴딱 다 마셔버렸다. 뱅뱅 핑글핑글. 헤헤, 헤헤 :)
이번엔 옛날통닭과 맥주다. 맥주는 다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저것 마셔 보니 서로 똑같은 게 하나도 없다. 소주처럼 뱅뱅거리는 느낌은 없지만 호쾌하게 들이켜 식도가 뻥 뚫리는 느낌(특히 에일류)이 끝내준다. 여럿 틈에 섞여서 관심도 없는 얘기 알아듣는 척하며 적당한 타이밍에 고개 끄덕거려 주며 홀짝거릴 때의 그 맛이 전혀 아닌데?
다음은 와인이다. 코르크 뚜껑 '퐁' 빠지는 소리. 감미롭다. '통통통~' 첫 잔 따를 때 나는 소리. 몽환적이다. 와인잔에 키스하듯 입술을 가져간다. 달다! 보랏빛 잔에 비친 내 얼굴을 본다. 아니 내 눈빛이 이렇게 스위트했었나? 와인잔을 쳐다보고 살짝 윙크를 해 본다. 아이고, 오른쪽은 잘 되는데 왼쪽은 왜 안 되지? 강아지처럼 헤헤거린다. 찹찹찹 헤헤, 헤헤... 육체와 영혼이 0.5cm 분리되었다가 합쳐진다.
너, 나 좋아하지.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
... 모르겠어. 그런 것 같기도...
그럼 보여줘.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눈을 감아야겠니?
어쭈, 요시키 기습적으로 소설가 모드도 있네? 너 술 싫어하잖아?
아니. 어쩌면 내가 싫었던 건 술이 아니라 술을 앞에 놓고도 정신줄 놓아 버리지 못하고, 관심 없는 얘기 억지로 듣고 있어야 하고, 적당한 타이밍에 적당히 반응해야 하고 그렇게 모든 걸 남의 페이스에 맞춰서 끌려가는 그 상황은 아니었을까. 술은 죄가 없다. 술은 억울하다. 술은 그냥 맛있을 뿐이다.
앗. 다 마셔 버렸다. 헤헤 좋다. 내가 와인 750ml 한 병을 꼴딱 마셨단 말인가? 포도주스도 750ml는 어려운데!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냥 흘러나와 버리는 이 눈물은 뭐지. 에이 씨, 나 왜 이러니 바보같이. 나 지금 슬프지 않은데...
나는 먹는 속도가 느리다. 달리는 거랑 수영하는 거, 그 둘 빼고 모든 게 느리다. 그런데 예전에 1년 정도 함께 했던 팀장님. 나는 식사를 그렇게 빨리 하는 사람을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다. 구내식당에서 호기심에 폰으로 몰래 시간을 재어 본 적이 두 번 있는데 한 번은 1분 55초, 또 한 번은 2분 02초. 그야말로 인간도 아니다.
한동안 나는 그 속도에 억지로 맞추곤 사무실로 뛰어와서 막힌 속을 찬물로 눌러 내리고 끙끙 괴로워하는 게 일이었다.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그냥 내 속도로 먹자니 1/3도 먹지 못한 밥을 다 버리고 일어나야 했고, 이것도 안 되겠구나 싶어서 2분 동안 먹을 만큼만 식판에 떴는데 무슨 애기 밥 같다. 그러다 어느 날 그가 툭 던지듯 묻는다. "원래 소식하는 편인가?"
아, 이 분은 내가 왜 이러는지 몇 달 동안 한 번도 궁금했던 적이 없구나. 이런 질문에 자세하게 답할 필요 없다. "네, 좀..." 그러자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묻는다. 바로 떠오르는 게 없어 대답을 못했다. 뭔가 먹고 맛있게 느꼈던 기억이 어릴 때 이후 없는데, 난 정말 먹는 것에 별 관심이 없는 걸까 싶었다.
그런데 와인 한 병 마시기에 도전하던 그날. 그래도 자그마치 와인씩이나 되면 그럴듯한 요리도 있어야지. 재미 삼아 뭐라도 만들어 보자. 필리핀에선 알리망고라는 게요리가 천하제일 진미였는데,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해 볼까?
꽃게 2마리(대), 파슬리, 월남쌈용 칠리소스, 레몬, 견과류, 마늘, 벌꿀을 준비해 주었어요.
꽃게를 손질해 주었어요. 단단한 집게다리는 둔기로 두들겨 주었지요. 옆집에서 무슨 대낮에 못질을 하냐고 뭐라 하네요(그럼 한밤중에 하니? 치잇...).
꽃게를 튀겨 주었어요. 반죽은 닭 튀길 때보다 약간 묽은 정도가 좋고, 한꺼번에 왕창 때려 넣으면 기름 온도가 확 내려가서 맛있게 튀겨지지 않아요. 군대에서 단체급식 청어 튀김이 비린 것도 그래서죠.
이건 악마 고양이(a devil cat)랍니다. 싱싱한 꽃게 속에 잠들어 있지요. 하지만 아무리 싱싱해도 등딱지를 조금만 잘못 해체하면 바로 사라지고 말아요.
등딱지에서 내장을 파내고 튀김가루+간마늘+후추로 반죽해서 다시 등딱지에 꽉꽉 눌러 넣었어요. 등딱지는 물이 많이 나와서 튀기면 기름이 폭발하니, 튀기기 전에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두는 게 팁이죠.
월남쌈 소스를 물과 1:1로 희석해서 파글 파글 끓이고, 자작하게 졸아들면 튀겨 놓은 꽃게를 투하해서 센 불에 재빨리 휘리릭 볶아 주어요. 이때 벌꿀 1스푼을 재빨리 넣어 주지요. 졸아든 소스로 코팅되면 불을 끄고 편마늘, 견과류, 다진 파슬리를 토핑해서 완성해요.
사실 요리에 정답이 있을까요. 그냥 이건 배가본드식일 뿐이죠. 각자의 노하우로 배리에이션을 주시면 훨씬 더 나은 요리가 나올 것 같아요.
헤헤, 헤헤. 맛있다. 그렇게 750ml 와인 한 병이 동났다. 배 터지겠다. 언제부턴가 뭔가 진짜 맛있었던 기억이 없고, 내가 먼저 뭘 먹자 이런 말 하는 법이 없고, 이런 나를 보고 모든 사람들이 먹는 데는 관심이 통 없어 보인다고 하길래, 나도 내가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나 보다. 맛에 눈뜨지 않은 사람이 요리에 자발적으로 손대는 일은 있기 어렵다. 내가 좋아하는 한 작가님은 "나는 세상에서 내 글이 제일 재밌다"라고 쓰셨는데 나 그 마음 알 것 같다. 난 내가 만든 음식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참 이상하지. 한우도 랍스터도 회식으로 먹으면 맛없던데, 그건 왜 그랬을까?
어릴 때부터 글쓰기가 싫었다. 좋은 기억이 없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시나브로'라는 단어를 써서 문장 만들기였는데 '나는 시나브로라는 말의 뜻을 모른다'라고 답했다가 뒈지도록 맞았고, 군대에서는 병영일기를 의무적으로 쓰게 했는데 그런 걸 의무화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군바리는 사람도 아니다'라고 잔뜩 자학해 놨다가 불시 검열당해서 또 뒈지도록 맞았다. 직장에선 무슨 문서만 만들어 올리면 공포의 빨간펜으로 "엣지있게! 시크하게! 이래서 빠꾸 당하는 나날이 장기간 반복되니 뭔가 글을 써야 하는 일이 생기면 무서웠다.
그런데, 최근에야 알았다. 나는 글쓰기를 무척 좋아하는 놈이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남의 기준과 속도에 맞춰야 한다는 그 하나가 빠지니 모든 게 180도 달라져 버렸다. 브런치 에디터 창을 열고 한땀 한땀 뜨개질하듯 쓴다. 강아지처럼 좋다고 헤헤 헤헤거린다. 재밌다. 어쩌면 내가 진짜로 싫었던 건 글쓰기가 아니라 특정 상황이었을 뿐이었고, 나는 아주 오랫동안 착각을 해 왔는지도 모른다.
요즘 내 모습을 보면, 이게 흔히들 말하는 번아웃 아닐까. 그런데 번아웃도 단순히 격무나 과로보다는 자기 삶의 하나에서 열까지를 남의 페이스에 맞춰 끌려다니는 데서 오는 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혼술 혼밥을 원하고 혼자 여행을 원하는 이유가 뭘까. 내가 할 수 있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 일인지 그것조차도 비정상적 행동으로 보는 시선이 많은 걸 보면 우리 사는 세상의 공감능력이 약간은 아쉬울 때가 있다.
어쩌면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뭐가 문제인지 알고 있는 듯하다. 내 로망이 무인도에서+반려견과+채집/어로 활동을 하면서 사는 것이니 말이다(기약 없는 거 알고 있습니다. 백만 년 후가 될 수도 있어요. 와하하하).
번아웃은 뭐 누가 고쳐 줄 거고, 내가 신경 쓰고 싶은 건 나 자신을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기다. "난 ○○○는 별로 안 좋아해"라고 말하기 전에 며칠만 참아 보기로. 누군가가 나에게 "너는 □□□하잖아?" 이러는 거 싫으면서 정작 나는 나도 모르게 그러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안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즐거운 게 또 있는지 찾아 보자. 어쩐지 내 삶에 숙제가 하나 생긴 느낌이지만, 온전히 나의 페이스로 가는 일이라 조금도 짐스럽지 않다.
< 글, 사진 : 배가본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