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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Jun 15. 2023

배가본드 선수 보호를 위하여

넌 다 좋은데, 말이 너무 없어.


1년에 2~3번 정도 이 말을 듣는다. 내 딴에는 말은 되도록 많이 하지 않는 게 좋다고 보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사람들은 그 이유에는 관심이 없더군. 그리고 세상은 어지간해서 말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현란하게 말을 잘하는 사람을 더 원하더군. 당장 밖에 나가도 말 잘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학원은 많지만 말을 안 하는 방법 가르치는 학원은 어디에도 없으니(사실 그게 더 어려운데).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넌 다 좋은데, 문제가 뭐냐면... (          )" 이런 패턴으로 날아왔던(+날아오고 있는) 말들이 그것 말고도 여럿 있었다. 위의 빈칸에 들어갔던 말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면 이렇다.



"너는 다 좋은데... (             )"


너무 예민해.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데에 시간이 걸려.

한 가지에 꽂히면 그걸 너무 깊이 생각해.

너무 멋을 안 내.

자기 PR시대인데도, 스스로를 적극 홍보하질 않아.

사람을 좀처럼 안 믿어.

쿨하지를 못해.

새로운 것이나 환경에 적응이 늦어.

뭐든 빨리빨리 못해.

기지와 센스가 부족해.

섬세하지 못하고 디테일에 약해.

아니다 싶을 때 빨리 놓지 못해.

좀 또라이 기질이 있는 거 같아.

MBTI가 INFP인 게 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는 걸 못해.

그런데 또 이상한 게 어떨 땐 지나치게 좋게 좋게 넘어가려 해.

끈기가 없어.

사고가 경직되어 있고 유연하지 못해.

창의적으로 새로운 걸 생각해 내는 걸 못해.



너무 부정적으로 해석된 자기 객관화 아니냐 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이건 나 스스로의 생각이 아니라 모두 타인을 통해 들은 말들이었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이 정도니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반면 살아오며 타인한테 '하지만 그래도 이러이러한 점은 장점이야' 이런 말은 들은 기억이 없다.


이런 패턴의 말을 계속 듣다 보면 은근 걱정된다. A가 "넌 다 좋은데 a가 문제야", B가 "넌 다 좋은데 b가 문제야", C가 "넌 다 좋은데 c가 문제야", D가 "넌 다 좋은데 d가 문제야".... 그리고 Z가 "넌 다 좋은데 z가 문제야" 이렇게 되면 결국 "네놈은 a부터 z까지 전부 다 문제다!!" 이거잖아? 그럴 거면 '넌 다 좋은데' 이 말은 그냥 다 함께 빼 주면 안 될까? 아이고 사람 좀 살자.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나만 알고 있는 나의 단점 상당수는 여기에 언급된 적이 없으니. 만약 그것까지 지적해 줬더라면 정말로 털리고 + 털리고 + 거꾸로 뒤집어 털리고 +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털리고 + 해골이 되도록 털리고 + 아주 그냥 똥구녁까지 털려 버렸을 판이다. 그래도 이곳은 나의 대나무 숲이니까, 나만 알고 있는 사실들을 추가해서 나의 단점들을 집대성(우하하) 해 본다.



(단점 - 추가)

공감 능력이 낮다.

뭐든지 배우거나 공부하는 행위가 늘 힘들다.

염치가 없어서 남에게 폐를 끼칠 때가 많다.

머리가 나쁘다.

말이나 글로 생각을 잘 풀어내지 못한다.

누군가를 위로해야 할 때 그걸 잘하지 못한다.

책임감이 없다.

선택과 집중을 잘하지 못한다.

이기적이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시야가 넓지 못하다.

깊게 생각하는 힘이 기본적으로 부족하다.

게으르고, 미루기를 잘한다.

앞을 내다볼 줄 모른다.

이성적 사고를 잘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감성적으로 생각하기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큰일이다. 반도 안 나왔고 싹 다 털면 밑도 끝도 없겠는데. 하지만 선수 보호(?)를 위해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배가본드 선수 큰 부상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선수 보호 차원에서 휴식을... 그런데 나도 참 어지간하지, 이 많은 단점들을 늘어놓는 동안 어떻게 장점은 하나도 떠오르는 게 없을까.


배가본드 선수에게 자비를 (...)

냉정하게 말하면 그들이 옳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실제로 이렇다 할 장점이 없이 무수한 결점으로 도배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보다도 자기 객관화가 더 필요한 케이스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늘 말한다. 자기 자신에게 최대한 엄격해야 한다고. 그리고 원래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라고. 듣기 좋은 말로 너의 장점을 말해 주는 이는 필경 너의 적이요, 결점을 지적해 주는 이가 곧 너의 친구이며 너의 스승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나까지 덩달아 나 자신의 단점 발굴에 동참할 필요까진 없지 않을까. 단점은 내가 가만있기만 해도 남들이 귀신같이 찾아내어 코앞에 대령해 주지만 장점 찾기는 내가 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으니. 단점 찾기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잘하는 일이지만 장점 찾기는 세상에서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니. 내가 어느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는 일, 아니 나 말고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면, 그쪽에 신경을 더 쓰는 게 맞을 테니.


그런데 이러고서 결국 하나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건 지금보다도 더욱 부끄러운 일이 될 테니 숨 좀 크게 쉬고 이담에 마음의 준비가 좀 되면 그때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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