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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Jan 08. 2023

배가본드야 금 캐러 가자!

아이고 또냐. 또 금 캐러 가잔다. 새해만 되면 어김없이 날아오는 소리. 그런 거 안 한다고 하니깐 우리가 직접 삽 들고 가자는 게 아니라 법인 만들고 중장비와 용역을 쓸 거고 우린 사무실에서 경영만 하면 되는 거란다. 뭔 소린고 하니, 사정은 이렇다.




진주만 공습(1941)으로 시작된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전쟁은 초반 일본의 우세로 흘러갔지만 미드웨이 해전(1942)과 과달카날 해전(1942) 등을 거치며 점점 일본 쪽이 불리해졌고, 패세에 몰린 일본은 전병력을 필리핀 레이테만에 집결시킨다.


필리핀에 주둔하던 일본군 태평양함대 총사령관 야마시타 장군은 동남아에서 약탈한 금을 본국으로 수송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바닷길이 적군에 막혀 무거운 금을 실어 나를 방법이 없다. 야마시타 장군은 결단을 내린다. 금을 166 등분해서 필리핀 전역 곳곳에 은닉하기. 이것이 '야마시타 골드'이다.


남국의 정취가 가득한 에메랄드빛 레이테만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일본 입장에서 필리핀이 적의 손에 떨어지면 베트남, 버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 주둔한 일본군은 본토와 수송로가 끊겨 병력을 지원받지 못해 말라죽고, 본토의 일본군은 동남아의 식민지에서 석유, 천연가스 등 자원을 지원받지 못하고 말라죽을 판이니 일본은 그야말로 사생결단으로 레이테만을 사수해야 했다.

레이테 해전 (1944.10.)

<레이테 해전(1944.10.)>. 인류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이 참혹한 해전에서 일본군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이듬해 8월 일본은 패망하고, 야마시타 대장은 태평양전쟁 종전 후 전범재판을 받고 처형당하고 만다.


자, 야마시타 골드는 어디에? 알려진 건 육지 132곳, 바닷속 34곳이라는 것뿐. 166곳 중 이제까지 딱 하나가 발견되었다. 1971년 필리핀의 열쇠 수리공 로헬리오 로하스가 우연히 엄청난 양의 금과 황금 불상을 발견하지만, 황당한 죄명을 뒤집어쓰며 체포되고 보물은 압수당한다(당시 대통령이 마르코스니 말 다했지 뭐 :D). 로하스는 억울하게 감옥에서 세월을 보내고 나중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좌)유일한 야마시타 골드 발견자 로하스  (중)발견된 야마시타 골드 (우)빼앗은 황금불상과 영부인 이멜다 마르코스

훗날 필리핀 민중혁명(1986)으로 쫓겨나는 마르코스 대통령은 미국에 망명신청을 하는데, 미국이 망명을 받아주는 대가로 요구한 것이 이 '야마시타 골드'다. 마르코스는 빼앗은 금을 미국에 몽땅 팔아넘기고 하와이로 도피하지만 고작 3년 후 병사하고 만다(...) 현재는 필리핀 정부에 보증금을 공탁하면 야마시타 골드 탐사 허가를 받고(외국인도 가능), 찾으면 필리핀 정부와 일정 비율로 나눠 갖게 되어 있다. 그래서 누가 찾았냐고요? 말했잖아요, 1971년 그거 딱 하나라고... :P




"아 글쎄 금 캐러 가자니깐!"

"형님, 저는 그냥 조용히 사는 게 최곱니다."

"야야, 요즘처럼 탐지 장비도 좋아졌는데 이거 투자 안 하면 미친놈이야, 기회는 올 때 잡아야지, 하루라도 먼저 시작하는 게 돈 버는 거야"


한번은 작심하고 '형님, 일본이 그걸 그렇게 허접하게 숨겨 놨을 것 같습니까? 설령 얻어걸려도 필리핀이 참으로 퍽도 외국인이 고이 그걸 자기 나라로 가져가게 해 주겠습니다? 땡전 한 푼 고사하고 목숨이나 붙어 있을까요?' 이랬더니 "해 봤어? 넌 왜 맨날 해 보기도 전에 안된다고 하냐? 그게 네 한계야"라 한다. "넌 그릇이 작아 큰일은 못 하겠구나. 남자가 왜 그리 배포가 없냐, 과감할 땐 과감할 줄도 알아야지"라는 말은 덤이다.

아이고 회장님, 왜 그러셨습니까? 사람들이 따라하잖아요.

나도 과감할 때가 없진 않다. 그놈의 야마시타 골드 찾는답시고 현지에 법인 만들고 투자하는 이걸 '과감할 때'라고 보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정작 나한테 뭔가 원하는 건 저쪽인데 저쪽이 바라는 대로 안 한다고 도리어 정신교육(?)까지 받을 까닭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래도 한번 이래 버리면 다시는 그 말은 안 꺼낼 줄 알았는데, 너무 내 기준에서만 생각했나 보다. 연초만 되면 새해 인사가 날아오고 똑같은 말이 이어진다. 2015, 2016, 2017, 그리고... (가만, 지금이 몇 년이지?) 그러고 보니 새해군. 이 사람이 뭔가 또 신년 다짐을 했구나. 아마 부자 되기, 대박 나기 같은 거겠지? 이젠 제야의 종소리만 들어도 두렵다. 또 금 캐러 가자고 연락 올 때가 됐는데. 그리고 예감은 어김없이 들어맞는다. 아무래도 폰 번호를 바꿀 때가 되었나 보다.




새내기 공무원 강연도 어느덧 6년째가 되었다. 나는 창의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콘텐츠 기획에 특기가 있다고 하기까진 어렵지만, 그나마 하나는 알 것 같다. 사람한테는 모든 게 누적되나 보다. 전엔 2시간이 넘어가면 대본이 필요했지만 이젠 3시간도 대본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고, 듣는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이젠 나 스스로 만족할 정도까지는 되어 있으니.


그런데 이게 뜻하지 않게 몇몇에게 알려진 게 화근이었다. 자기가 어딘가에서 출강 의뢰를 받았다며 조언을 구하는가 싶더니, 이것저것 묻다가 나도 모르는 주제를 제목만 두루뭉술하게 설명하며 자료를 만들어 줄 수 있겠냐 하는데 정작 자기는 무엇을 말할지 그다지 고민조차 해 보지 않은 사람도 있었으니.


어떻게 거절을 표현할지 고민해서 정중히 거절해도 '그 정도로 네가 대단하니까 이런 말도 하는 거지'다. 그걸 갖추기 위해 들여 온 게 대단하다는 게 아니라 자기한테 쉽지 않은 걸 쉽게 하는 것처럼 보여서 대단하다는 말에 가까움을 알기에 이런 식의 칭찬은 기쁘지 않다. 차마 뱉지 못하는 한마디가 목젖까지 올라왔다 내려간다. 당신은 보이는 것만으로 그렇게 말하지만, 그동안 내가 혼자서 몰래 뭘 어떻게 했는지 안다면 그게 전혀 대단해 보이지 않을 거라고.


필리핀 있을 때 알던 사람, 전 직장 동료...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한테서 여기저기서 인사라고 연락 와서는 결국 뭔가 부탁하거나 같이 해 보자는 말로 이어진다. 스마트 스토어, 강의 아웃소싱, 홈쇼핑 창업... 누구는 자기가 뭐를 맡을 테니 너는 뭐를 맡아서 같이 해 보자, 또 누구는 너는 투자만 하고 일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다 할 거다... 다들 먹고 살기 힘든 건 맞나 보다. 심지어 작년 이맘때 이후 연락도 없던 사람들의 신년 계획에 내가 들어가 있을 정도니깐.


서로가 생각하는 친소관계에 온도 차가 있을 때는 불편하다. 많이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나를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할 때는 난감하다. 거절해도 얼마 후 똑같은 얘기로 또, 또, 또... 지금의 생활에 충실하고 싶다고 해도 내 삶의 철학을 이해해 주는 척하면서 결국 뭔가 같이 해 보지 않겠느냐로 이어진다.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으면 그때부턴 그 사람 자체를 피하게 된다.


내겐 남에게 뭔가 부탁하거나 같이 뭔가 해 보자고 하는 게 어렵다. 어쩌다 그런 말을 하려면 오래 속앓이를 해야 가능하다. 선택은 상대방의 자유지만 그걸 말하기까지의 어려움, 그리고 나라도 거절당했을 때 당연히 있을 서운함을 생각하니 누가 나에게 뭔가 부탁하거나 함께 해 보자고 권할 때 거절이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억지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지만, 거절 표현도 내겐 상당한 용기와 고민이 필요했다. 이런 나 자신이 싫었고, '미움받을 용기'가 갖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뭔가 도와달라 하거나 같이 뭔가를 해 보자는 사람들이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오래 속앓이하다 말하는 건 아님을 알게 된 뒤론, 거절이 자그마치 용기씩이나 필요한 게 아님도 이젠 안다. 열 번을 들어줘도 한 번을 못 들어주면 '섭섭해' 이게 되니, 내가 뭔가 응해 주는 게 상대에게 지극히 당연한 게 되는 상황만은 만들지 않으며 살고 싶다.


폼나는 새해 계획 대신 조용히 전화번호부와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정리해 본다. '너는 왜 계획이 없니?'라는 말을 귀가 아프도록 듣고 살아왔지만 나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고 싶을 뿐이다. 계획이 없는 게 아니라 다른 식으로 계획할 뿐이다. 그게 '○○를 하자'보단 거의 '□□를 하지 말자'라는 식이라서 계획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다.


어쩌면 미니멀리즘이란 물질뿐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유효한지도 모른다. 인연 맺기에 헤프지 말고 진실한 인연에만 집중하라는 법정 스님의 가르침을 되새겨 본다. 새해가 되면 희망으로 부풀어야 할 텐데, 언제부터인지 해가 갈수록 어른이 점점 줄어 가는 그 느낌이 어딘가 쓸쓸하고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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