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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렌콩 May 10. 2020

셋쌍둥이 막내의 한아름 이야기

김애란 작가의 "두근두근 내인생"을 참 재밌게 읽었다. 그리고 그 소설을 영화화한 "두근두근 내인생"도.

수 년전, 배우 송혜교와 강동원 주연으로 개봉한 그 영화를 보고 울고 웃었다. 부모보다 빨리 늙어가는 선천성 조로증에 걸린 아들과 아들보다 젊은 부모의 이야기는 소설이나 영화나 모두 특별했다. 그 때를 계기로 시작 했었다. 소설과 영화 속 아름이가 자신의 엄마아빠의 젊은 시절을 소설처럼 써 내려갔던 것처럼, 나 또한 나의 엄마 아빠의 유년 시절을 상상하며 소설처럼 끄적이곤 했다. 

유년의 추억이 담긴 평전 같은 그 소설은 95%의 진실과 5%의 허구를 담은 자전적 에세이를 시작해 본다.


<셋쌍둥이 막내의 한아름 이야기>


"와 네가 그 만화방 딸내미였구나!"

친구와 만화책방에서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린 시절 우리집이 만화방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니 친구가 반색하며 외쳤다.

"셋쌍둥이에, 만화방 딸내미까지 진짜 만화같은 삶이네!"


‘자소설’이라고 불리는 취업용 자기소개서에 소설에 나올듯한 요소를 꽤 당당하고 솔직하게 적을 수 있다는 사실은 꽤 좋았다. 이왕 이렇게 태어난 거, 차라리 맘껏 떠벌려서 유별남이라도 뽐내야지 싶었다. 덕분에 나는 위 표현대로 자기소개서에 몇 줄이라도 더 적을 수 있는 꽤 특징적인 장점을 가졌다. 취업을 할 적에도 담당자들이 가족관계에 대해서 물을 때면 그저 조심스레 사실적인 부분들을 내뱉었다. 내 말에 인사담당자들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내게 몇 번이고 되묻곤 했었다. 

 ‘정말로 셋 쌍둥이예요? 둘 아니고, 셋?!’

  그날 나는 만화카페에서 어린 시절 읽었던 만화책들을 열심히 들추었다. 일본 판타지 만화가 시노하라치에의 ‘하늘은 붉은 강가’나 그 누구나 알고 있는 사토후미야의 ‘소년탐정 김전일’, 그리고 우리는 벌써 커서 교복을 벗고 성인이 되었건만 아직까지도 중학생 소년에서 멈춰있는 ‘명탐정 코난’까지. 친구의 두 손에 들려있던 ‘데스노트’까지 합하면 전부 일본만화이지만 요즘 열심히 성장하는 웹툰이나 훌륭한 한국 만화가들의 만화 모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특히 지금은 애니메이션으로까지 개봉하게 된 만화가 이빈의 ‘안녕 자두야’까지. 

  어린 시절 그토록 좋아했던 만화 캐릭터는 바로 자두였다. 그 시절 나는 자두와 또래였으므로 자두에게 감정이입하여 그야말로 함께 울고 웃었다. 몇 개월마다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던 그 만화들을 정말 열심히 읽었다. 투명한 비닐포장지에 싸여져 있는 만화책을 먼저 뜯어 읽을 기회가 무진장 많았다. 만화방 딸내미가 겪을 수 있는 특혜 중에 특혜였다.

  어린 나는 만화 속 자두의 머리스타일, 전매특허 도넛 모양의 양 갈래 머리를 수도 없이 따라했더랬다. 머리빗과 방울 두 개를 들고 쫄래쫄래 엄마에게 다가가면 엄마는 언제나 방울을 입에 문채로 정성들여 머리를 땋아주었다. 엄마 입에 물려있던 수많은 방울들, 그리고 양 갈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아주 잠깐 고였던 그 침묵들도. 그때 엄마가 묶어주던 손짓은 어찌나 매섭던지, 그때를 떠올리면 두피, 더 나아가 관자놀이까지 느껴졌던 그 뻐근함. 

 ‘엄마~ 아파!’

 ‘가만있어 봐. 잘 쨈매야지!’

  전라도 사투리를 찰지게 내뱉던 엄마의 목소리는 마치 등짝 스매싱과 흡사했다. 그동안 나는 우리 엄마만 유별난 줄로만 알았는데, 성인이 되고나서 친구들과 나눈‘머리 이야기’에도 모두 무릎을 치며 공감했다. 왜 엄마들은 딸들의 머리카락을 꽉 묶어주었을까. 마치 런웨이에 서는 모델의 짱짱한 포니테일처럼 높이 꽉 묶어주던 그 손 기술(?)들을. 엄마들의 그 매서운 손기술 덕분에 어린 우리들은 모두 눈이 치켜 올라갔더랬다. 아마도 열심히 크느라 이리저리 뛰어 다니고 부산스럽던 우리들의 부주의로 머리칼이 자주 흘러내려 몰골이 지저분해질 것을 고려한 손기술이었을 것이라고 잠정 결론지었다. 캐릭터의 머리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할 정도로, 그 당시 만화는 내 삶의 전부였다.

  바야흐로 내 어린 시절, 세상에서 제일 말 안 들어서 공식 미움을 한 몸에 받던 일곱 살 무렵 엄마가 운영했던 만화 책방의 이름은 ‘한아름책방’이었다. 그 당시에는 한아름의 뜻도 몰랐었는데, 조금 머리가 크고 나서 책방의 간판 명을 읊조리면 너무도 어여쁘고 순수한 이름에 깜짝 놀란다. 아름답다라는 미의 발음과 흡사한 ‘아름’은 두 팔을 둥글게 모아 만든 둘레라는 뜻으로 책을 한 아름 안고 있다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우리 가게 한아름은 소설책이나 각종 잡다한 책, 성인만화, 비디오를 빌려주는 대여점의 일종이었다. 그 당시, 만화책 한 권을 빌리는데 지불되었던 금액은 은색 백 원짜리 동전이 도합 두 개 혹은 세 개였다. 만화책 한 권을 빌리는데 새콤달콤이나 껌 값과 동일한 금액이었다. 만화는 물론 애니나 웹툰 사업이 크게 발달한 요즈음 만화적인 가치는 예전과 몹시 다르다. 때문에 헐값에 읽었던 그 시절의 만화들이 뭔가 조금 애처롭다.

  그날 나는 엄마에게 한아름 책방 이야기를 꺼냈다. 


 “갑자기 한아름 책방은 왜?”

 “그냥, 문득 생각나서. 그때 만화책 엄청 많이 읽었었는데.”

 “너희들은 엄마 덕에 하루 종일 만화책만 읽었지.”

  말을 마친 엄마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려있다. 

  “엄마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왜 하필이면 수없이 많은 가게 중에서 만화 책방을 했었어?”

  “왜긴. 엄마도 만화책은 추억이었으니까.”

  “추억?”

  “내가 얘기 안 했었나? 네 아빠랑 만화 책방에서 처음 만났잖아.”

  나는 엄마의 그 대답에 흙 밭에서 탐스러운 노다지를 캔 듯한 황홀함에 휩싸였다.

  “뭐야, 완전 로맨틱하잖아? 더 자세히 말해 봐.”

  

그날 엄마는 아빠와의 연애 담에 대해서 상세하게 털어놓지 않았다. 다만 나는 그 말 뒤로 슬그머니 안방에서 묵직한 가족 앨범 몇 권을 들고 내 방으로 향했을 뿐이었다. 

  엄마 아빠의 연애 사진, 그리고 내 어린 시절 기억에 깊게 맞닿은 한아름 책방의 추억, 나는 위 사례를 계기로 엄마 아빠의 단편 소설을 적어 보고자 계획하고 만다. 노트북 안 하얀 워드에 몇 줄의 문장을 시작으로 줄글들을 순조롭게 이어나갔다. 




‘만화책’은 우연 같은 ‘인연’ 을 싣고

  4남매의 장녀였던 엄마는 갓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한 풋내기 소녀였다. 공부는 곧 잘했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야간부 산업체특별학급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때문에 낮에는 회사 공장에서 열심히 미싱을 돌리고 야간이 되면 학교에 나가 원하는 공부를 했다. 
  엄마는 시간이 날 때마다 만화 책방에 앉아 열심히 만화책을 읽었다. 그 당시 만화책들은 종이와 잉크가 몹시 후졌지만, 그 작은 책에 흠뻑 빨려 갈 정도로 세상에서 제일 재밌었다. 
 ‘이렇게 재밌는 건 정말이지 영원히 없을 거야.’
  특히 만화가 김형배의 ‘태권브이’나 ‘황금날개’, 만화가 김영하의 ‘수퍼보이 최고봉’은 너무너무 재미있어서 읽던 부분을 유심히 읽고 또 읽었다. 엄마는 만화책을 읽을 때마다 어깨에 올려져있던 근심 걱정들이 말끔하게 사라졌다고 했다. 그 당시 TV나 인터넷, SNS가 전무후무했던 시절이었으므로 엄마는 그토록 재밌는 건 영원히 개발되지 못할 거라는 귀여운 생각마저 품었다. 아무튼 회사일과 공부를 도맡던 장녀는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건 ‘만화책’이라고 꿋꿋이 믿던 아직은 어린 소녀였다.
  때마침 그 어린 엄마의 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바로 만화책방 가운데 나무 의자에 앉아 몰래 만화책을 훔치던 군인아저씨, 바로 아빠였다. 아저씨의 가방에 살풋 보이는 만화책 겉표지에는 여자의 헐벗은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앳되고 순수한 소녀 엄마와 달리 아빠는 순수한 소년은 절대 아니었다. 좋게 봐줘야 청년이었던 아빠는 불법적인 절도를 자처하는 시커먼 군인 아저씨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쯧쯧쯔.’
  엄마는 만화책을 읽다말고 마음속으로 힘껏 혀를 찼다. 얼마나 한심했던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모션까지 저절로 튀어나왔다. 엄마는 만화 책방 주인아주머니에게 절도 목격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려다가 곧 그만두었다. 엄마는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훔치는 그 혈기왕성한 성인물에 왠지 모를 묘한 안쓰러움을 느꼈더랬다. 한심함은 곧 안타까움으로 변모했고, 엄마는 성인만화를 훔치는 아빠의 모습을 애써 무시 한 채 읽던 만화책에 다시금 집중했다. 아무튼 엄마와 아빠의 첫 인연은 바로 그 만화방에서의 시작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달콤함이나 로맨틱함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다른 곳에서 달콤한 인연을 마주한 엄마는 그 뒤로 아빠와 연인이 되었다.

  엄마는 어느 날 셋 쌍둥이를 나란히 재우고 겨우 숨을 돌린다. 부부는 오랜만에 도란도란 대화를 나눈다. 주제가 어떤 걸로 튀었는지 모르겠지만 만화책 이야기가 나온다. 만화 책방에서 성인만화를 훔치던 치기어린 과거의 기억을 당당하게 내뱉는 아빠의 말에 엄마의 머릿속에 잠시 잊혔던 과거의 기억이 섬광처럼 빛났다. 덩달아 그 당시 목격했던 한심한 군인 얼굴이 불현 듯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마침, 그 당시 둘이 거주했던 동네도 비슷했었으니 그 만화 책방은 엄마의 단골 책방이 분명했다.

 “여보, 혹시 군복 입고 훔쳤어?”
 “…어떻게 알았어?”

  아빠의 동그란 두 눈을 들여다보는 엄마는 몇 년 전 마주했던 그 강렬한 기억에 웃음이 픽 새어나온다. 엄마는 자신이 그렇게 웃고 있는 지도 모르는 것처럼 해맑게 웃는다. 그리곤 한 손으로 아빠의 머리통을 아프지 않게 살며시 쥐어박는다. 
 “으이그, 이 웬수야. 나한테 들켰었잖아.”
  영문을 모르는 웬수 아빠는 엄마의 장난 손짓, 함박웃음 가득한 그 얼굴 표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엄마는 웃겨죽으려고 하고 웬수는 알쏭달쏭한 눈빛이다. 그 웬수가 엄마의 연인이 되고, 남편이 되고, 세 아이의 어엿한 가장이 되었다. (그리고 7년 뒤, 막내 한명을 더 낳아 총 4남매가 되었다. 마치 엄마의 진짜 형제들처럼) 


애 셋을 낳고 정신없이 육아에 돌입한지 어언 9개월이 훌쩍 지난 것 같다. 손가락을 헤아리다가 얌전히 토끼처럼 누워있는 셋 쌍둥이를 들여다본다. 저렇게 세상모르게 자고 있을 때는 영락없이 천사 같다. 한명이 울면 나머지 두 명도 따라 울었다. 출산과 육아는 엄마도 처음 맞이하는 일이었다. 한 명의 생명이 아닌, 세 명의 생명을 길러내는 책임도 정말, 처음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엄마는 얌전히 잠든 천사 같은 쌍둥이들이 조금은 무서워진다. 

 ‘실수해서 아이가 잘못 되면 어쩌지?’
  엄마는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덜컥, 해 버린다.  사실 얼마 전, 엄마는 이유도 모르게 빽빽 울어대는 아이 셋을 안고 남 몰래 울음을 터트렸다. 남편은 회사에 출근했고, 친정 엄마는 아이들을 돌봐주다가 얼마 전에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이제 진짜 홀로 육아를 담당해야 초보 엄마는 고작 스물여덟 살이었다. 우리 셋 쌍둥이는 엄마 앞에선 엄청 크고 거대한 산이었다. 그것도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는 경이로운 생명.


  엄마에게 셋 쌍둥이는 처음이었다. 처음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유난히 배가 부른 덕에 두 명의 쌍둥인 줄로만 알았고 초음파를 살피던 의사선생님도 두 쌍둥이의 사실을 알려주며 축하를 건넸다. 제 뱃속에 들어있는 아이들이 두 명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지만 엄마는 사실, 조금 걸리는 게 있었다. 바로, 태몽이었다.

  엄마는 임신하고 한 달 뒤에, 뱀 세 마리를 목격하는 꿈을 꿨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니 모두들 태몽이라고 입을 모았다. 태몽인 건 그렇다손 치더라도 어째서 두 마리가 아니라 세 마리였을까. 엄마는 꿈결에 정신없었으며 워낙 뱀과 같은 파충류를 싫어했으므로 순전히 잘못 봤거나 오해했으리라고 단언했다.
  그 이후로 예정일보다 삼일 이상 빨리 터진 양수에 급하게 병원에서 제왕절개 수술을 받았을 때, 희미한 기억 속에서 들려오는 의사선생님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봉합을 할 때 발견한 작은 발, 뱃속 깊숙한 안쪽에서 꺼낸 딸 아이. 즉 두 명이 아니라 세 명의 아이였다. 아빠와 할머니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엄마도 일순 무척 당황했지만 일단 가족들이 너무도 기뻐했으므로 절로 마음이 기뻤다. 다시금 희미해지는 기억 속에서도 그때 태몽에서 발견한 뱀 세 마리는 제 착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더불어 그동안 뱃속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이가 둘이 아니라 셋이었다는 사실에 뭔가를 깨달은 듯이 마음속으로 외친다.
   -어쩐지 너무너무너무 힘들다 했어.
  엄마는 처음이라 몰랐던 것이다. 동시에 다행이라며 안도한다. 그동안 임신과정이 너무 힘들어 투정부리고 싶었는데, 그 투정들이 모두 오버스러운 엄살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기운이 주욱 빠진다. 더불어 세 아이 전부 손발 모두 정상이라는 사실에 기쁨이 뒤엉킨 복잡한 눈물을 흘린다. 그토록 궁금했던 성별도, 원하던 딸이 둘이나 생겨서 왠지 기쁘다.


엄마는 제 근심 걱정과 달리 잔병치레 하나 없이 셋 쌍둥이들을 건강하게 길러냈다. 어느 정도 키우고 나서 살피니 한껏 모아놓은 목돈, 아빠와의 상의 아래 그토록 좋아했던 만화 책방을 차렸다. 지인이 운영하던 도서대여점을 아주 저렴한 값에 양도 인계 받은 것도 큰 몫을 했지만 아무려면 상관없었다. 항상 심심해하는 세 아이들에게 재밌는 만화책을 많이 읽혀 창의적이고 발상적인 아이디어를 키워두고 싶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건강하게 자라주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fin-


  나는 거기까지 작성하고 마지막 종지부를 찍었다. 셋 쌍둥이들의 좌충우돌 우여곡절 같은 이야기들, 엄마의 사랑을 받아먹고 자라 또 다시 엄마, 혹은 아빠가 되는 쌍둥이들, 그 성장은 아직까지도 시작 될 것이다. 언젠가 위 단편처럼 만화처럼 개구지고 재미나던 이야기들을 직접 써내려가고 싶다. 셋 쌍둥이 막내가 풀어내는 이야기를 한아름 가득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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