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by 발렌콩

길었던 여행에서 돌아왔다. 당연했던 일상으로 복귀했고, 언제 여행을 다녀왔던건지 모를 정도로 자연스럽게 평소의 일상으로 귀화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는 숨이 가쁠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내 편협하고 조악했던 인간관계에서 어느덧 불현듯이 찾아주었던 새로운 지인들, 혹은 조금은 더 돈독해진 친구들을 만나느라 아주 바빴다. 만남을 공유하고, 서로에게 할애 해 주는 시간만큼이나 각자의 내밀한 이야기를 조금씩 끄집어냈다. 나는 꽤 솔직하고 싶었고, 내게 들려주는 그네들의 이야기도 꽤 진솔한 편이었다.

술이랑 커피를 자주 마셨다. 오랜만에 마주한 이들 앞에 놓인 맛있는 음식들을 마음껏 먹을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씹어서 넘길 수 있는 음식보다도 액체를 자주 들이켰다. 쾌활하거나 잔잔한 음악을 자주 들었고, 나도 모르게 잠에서 자주 깼다. 원래도 깊이 잠들지 못했지만 최근엔 잠이 얕아서 하루에도 네댓번은 깨어났다. 꾸던 꿈은 조금씩 희미해졌다. 꿈 속의 짙었던 스토리와 뼈대는 어느덧 완벽하게 사라져 뼈대조차 남지 않았다. 꿈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고마움과 당연함과 다행스러움의 그 어딘가.

근 십칠 일 이상을 빼곡하게 지냈다. 꼭 어디든 나갔고, 하루도 빠짐없이 머리를 감았고,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이야기들을 건넸고, 많은 목소리들을 들었다. 정적이고 조용했던 내가 이렇게 많은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었다니,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매주 토요일에는 N과 함께 춤을 추러 학원에 갔다. 사방에 설치된 전신 거울 앞에서 손과 다리를 뻗고, 자주 회전하거나 굳은 몸을 유연하게 만들기 위한 스트레칭을 했다. 일정하고 반복적인 유산소 운동만 시작했던 헬스와는 완연하게 다른 느낌이다. 안무 습득력이 빠른 어린 아이들 틈에서, 나보다 어리지만 야무지고 예쁜 선생님의 몸짓을 따라서 동작을 열심히 반복하곤 했다. 귀를 가득 메우는 매혹적인 음악 소리도, 거울속에 비친 내 익숙하면서도 낯선 전신도, 요즘 나는 내 눈앞에 보이는 이 낯선 잔상들이 놀랍고도 신기하다. 모든 게 신기함의 일색이다.

타국에서 맞은 의미있던 생일도, 익숙했던 서울의 추운 공기와 달리 서늘하고 시원해서 좋았던 베트남 공기, 적당한 백색소음과 모르는 언어를 듣고, 조악한 거리를 걷는 것도 좋았다. 동으로 불리는 '베트남 돈'도 망설임 없이 마음껏 쓰던 은근한 사치도 좋았다. 캐리어에 블루투스 키보드를 챙겼음에도 꺼내지조차 못했다. 순간을 기록하고 꼴값같은 사색도 마음껏 부려보고 싶었지만 그건 돈 쓰는 것보다도 더 지독한 사치였다.

몇 주전에 봤던 사주의 내용들을 천천히 곱씹어본다. 빨리 죽을 수 있는 단명 사주일 경우, 복채를 다시 되돌려 준다고 했다. 내심 긴장하며 내민 5만원은 다행스럽게도 다시 돌려받지 않았다. 사주에 불이 많은 만큼 똑같은 불, 혹은 불에 태울 수 있는 나무가 많은 사람을 만나라고 조언 해 주셨다.

다양하고 새로운 시간들을 보낸 요즘, 오랜만에 켜 놓은 노트북으로 이렇게 일기를 기록하니 난잡했던 마음도 조금씩 정리가 되는 듯한 느낌이다. 그동안 내뱉은 많은 말 덕분에 활자로 기록할 문장들이 반절은 사라졌지만 후회는 없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