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우울을 이야기 할 때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도 흘러 넘쳤다. 날카로운 물건에 긁힌 상처의 붉은 선 위, 파인 부위 만큼 점성있는 진물들이 퐁퐁 새어나는 것처럼. 다친 마음에서 새어나는 목소리가 꽤 또렷했다. 마른 상처 위에 살풋 돋아난 딱딱한 다갈색 딱지처럼. 때문에 같은 단어와 표현을 반복하며 일기장을 적어 내렸다. 일기장의 내용들은 결국 본질적으로 똑같은 주제를 내포한 자기 위안이었다. 가치없는 문장들에 불과했지만 이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던 것 같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위험하고 난감한 다른 일에 집중 못 하게 하는 방어적인 행동이었다.
최근에는 몇줄의 일기를 제외하고, 쓰고 있던 것들을 조금씩 다듬고, 한번도 안 읽어봤던 것처럼 새로이 읽어본다. 고등학교때 썼던 신파를 아주 야하게 바꿔서 내용을 이어보는데 그마저도 낯뜨거워 잠시 중단 해 본다. 대신 몇 권의 책을 번갈아가며 읽는다. 동아리때 교수님이 선물 해 주셨던 파카 조터 샤프로 열심히 밑줄을 긋는다. 볼펜이 아닌 샤프라서 언제든 지울수 있음에도 단 한번도 밑줄 그은 문장을 지워본 적은 없다. 어느덧 4년이 지났음에도 새것처럼 깔끔하다. 내가 샤프를 받았을 때 다른 동기는 손바닥 크기의 몰스킨 노트를 받았다. 그때 내게 필요했던 건 그런 노트였기 때문에 그게 너무 부러워서 그와 똑같은 크기의 미니 노트를 4권이나 구입하여 지금도 곧잘 사용하고 있다. 한권은 단어 사전으로, 한권은 예전 대행사에 다닐때 업무 미팅용으로. 나머지 두권은 서랍 어딘가에 박혀 있다.
우연히 지인들이 쓴 글을 읽었다. 허락받지 않고 내 관심으로 찾아봤는데 그렇게 쉽게 발견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한명은 웹소설로 고양이를 모티프로 삼은 판타지 소설을 쓰고 있었고, 나머지 한명은 독립 잡지의 일환으로써 고독이 짙은 일기를 쓰고 있었다. 그네들이 뭔가 기특해 보였다. 열심히 집중하고 적어내렸을 문장들이 한줄한줄 정성스럽다. 그런데, 전자는 발랄하고 후자는 우울하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개의 글을 살피니까 뭔가 마음이 묘해졌다. 후자의 지인에겐 파카조터 샤프를 선물 해 주고 싶었고, 전자의 지인에겐 몰스킨 미니노트를 선물 해 주고 싶었다. 전자의 발랄함과 후자의 우울함을 서로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 균등한 완급조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