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는 달리고 있던가?
달려라 아비, 소설의 제목은 털이 수북한 다리를 묘사한 표지의 귀여운 삽화처럼 친근하면서도 쉽다. ‘달려라 아비’ 마지막에 붙은 귀여운 단어, 마치 동물의 이름에서나 쓰일 법한 ‘아비’가 무엇인지는 이 책의 제목인 첫 단편을 읽자마자 ‘아버지’를 부를 때 쓰이는 ‘아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흔히 할머니들이 ‘애비야’, ‘아비야’ 부르듯 쓰이는 그 아버지들이 과연 이 소설 속 에서 어떻게 묘사될까, 많은 호기심이 일었다.
아버지는 그림자 같은 존재가 아니었던가.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실상, 많은 이들에게 그러했을 것이다. 이 단편을 전부 읽자마자, 그 의문증이 비단 내게만 국한되지 않는 다는 것을 여실하게 느꼈다. 김애란 작가는 다양한 아버지들을 그대로 표현했고, 편견 없이 담담하게 묘사했다. 지극히 평범한 주인공들을 통해서 일상생활에서 느낄 법한 사유를 무겁지 않고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게, 자극적이지도 않게 그저 덤덤하게 표현했다. 대체적으로 따스한 이야기들이었다. 아버지는 있을 듯 하지만 없을 듯한 존재이기도 하다. 소설은 버젓이 ‘아비’라는 단어를 제목에 올렸지만, 정작 소설 속에서는 그 극명한 제목만큼이나 아버지의 존재가 확실하지는 않다. 오히려 있는 듯 없는 듯한 느낌만이 강했다. 그러나 그런 태연하기까지 한 그 문장과 느낌 덕분에 소설 속 ‘아비’는 더욱더 아련하게 다가왔다. 그리하여 침착하고도 잔잔하게 ‘아버지’를 떠 올릴 수 있게 했다.
아버지는 펼쳐진 책의 빈 공간, 여백 같은 존재이다.
우리를 지탱하는, 아주 필요하지만 한편으론 불필요 해 보이는 그런 존재. 앞서 작성했던 문장 속 그림자 같은 단어처럼 그야말로 ‘그림자’ 같은 우리들의 아버지.
소설은 부자나 부녀에 국한하지 않는다. 소설 속 주인공은 여자이기도 하고 볼이 빨간 어린 소녀, 때로는 어른 같은 소년, 아이인 척 하는 성인 남자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읽었을, 읽을, 많은 사람들이기도 하다.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우리의 자화상인 주인공들은 남에게서 들으면 지독히도 불행할, 타인으로부터 안쓰러운 동정을 받아 마땅할 사연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에 절대 굴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태연하고 즐거울 만큼 담담하다.
가령, 단편 '달려라 아비'에 나온 일명 ‘사생아’인 주인공은 미혼모인 ‘딸’인 자신을 절대로 가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긍정적이고 활기차기까지 하다. 그건 미혼모를 낳은 제 어머니의 덕분이다. 안쓰럽고도 우울한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그녀가 품는 이야기는 무척 긍정적이어서 마치, 블랙 코미디를 보는 듯이 재밌기 까지 했다. 뜬금없이 웃겼고 느닷없이 슬펐다. 십 수 년 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먼 타지에서 날라 온 아버지의 편지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것조차도 아버지가 작성하지 않은, 영어로 쓰인 낯선 이야기들. 아버지의 자식이 보내온 유품 같은 아버지의 마지막 이야기는, 이야기로 풀어보자면 그저 비참하기만 하다.
미국에서 결혼한 아버지가 이혼을 당하고 위자료를 주지 못해서 그 대신 주말마다 잔디를 깎는다. ‘전 부인’이 되어버린 여자의 집에서 말이다. 그 여자는 곧 운동장만한 잔디밭이 있는 사내와 결혼했고, 아버지는 최신식 자동 가솔린 잔디 깎이 기계를 선물한 여자의 호의를 거절하곤 굳이 창고 속에 차지한 구식 잔디 깎이를 고집하며 그 정원을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여자의 새 남편과 싸움이 붙었고, 묵묵히 잔디를 깎던 아버지가 새남편의 욕을 참지 못하고 그 기계 그대로 남편에게 돌진했다고 한다. 피를 본 새 남편은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했고, 겁이 난 아버지는 그때 창고 구석에서 발견한 새 잔디 깎이 기계를 발견하곤 그곳에 올라타 그대로 도로를 질주한다.
‘아버지가 평생 미안하며 살았다고, 그리고 엄마, 그때 참 예뻤대......’
주인공은 단 한 번도 마주하지 않았던 제 아버지를 떠올리며 선글라스를 씌어준다. 그러면서 ‘이젠, 아마 더 잘 뛰실 수 있을 것이다.’라며 그 우울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따뜻하게 웃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마지막을 읽는 순간엔 나도 모르게 절로 따뜻한 웃음이 지어졌다. 이 소설집에 실린 아홉 개의 단편들이 모두, ‘아비’로만 이루어지진 않았다. 제목, ‘영원한 화자’나 ‘노크하지 않는 집’은 끊임없이 ‘나’라는 인물을 탐구한다. 그게 부정적이던 긍정적이던 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질문하며 가감 없이 답한다. 물론, 나를 밝혀내기 위해서 실제로도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타인을 파헤치기도 하며 이용하기도 한다.
독자를 의식하지 않은 문장의 흐름 덕분에 소설은 더욱 더 생생한 잔상으로 다가왔다. 지나치게 담대한, 뜬금없지만 생생한 이야기는 소설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잠깐씩 잊게 해 주었다. 분명 주인공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지만 그 이야기의 장면 앞에 우뚝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이 책은 제가 당신에게 매우 딱딱한 얼굴로 보내는 첫 미소입니다.”
라는 마지막 장의 작가의 말처럼 딱딱하지만 따뜻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작가의 정진하는 힘, 더불어 언제나 이어질 행보가 궁금해지게 만드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