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편의 단편이 실린 이 소설들은 제목만큼이나 유려한 느낌이 두드러졌다. 결코 눈에 확 튀거나 독특한 소재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다룬 것은 아니었지만 깔끔하고도 정확한 문장들과 묘사들의 느낌은 치밀하며 빈틈없이 단단했다. 잔잔하게 흐르는 이야기들은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어떤 익숙한 친밀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건 바로 여성작가 특유의 '농밀함’이었다.
그러나 비단, 여성성의 느낌으로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고정관념처럼 느낄 수 있는 유약함이나 섬세한 조직으로 짜인 레이스 같은 느낌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인물들의 깊은 양상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들과 주제들은 첨예했으며 도리어 적절하고도 골고루 안배되어 있는 느낌들은 남성성이 막 풍기는, 어린이의 시절을 갓 지난 ‘소년’의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남성성은 그저 설익지만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단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표면상으로 드러난 기법으로는 캐릭터들의 이름에 있다. 이 소설 에선,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이름들이 정확히 드러나지 않은 채로 K, J, S, Y같은 알파벳으로 명명되어 있다.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이름이 주는 효과는 절대로 단순하지만은 않을 터인데 굳이 이렇게 명명되어야 했는지의 판단은 독자들마다 다를 테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느꼈다. 감성적으로만 느껴질 수 있는 단점을, 이런 소소한 부분에서 완급을 조절 할 수 있는 효과를 거두었다. 제목에서 예를 들자면, 작품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표제작인 소설의 제목은 전혀 이성적이지는 않다. ‘아름다움’과 ‘멸시’라는 단어들로 이루어진 문장의 제목은 비교적 감성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단어들로 배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목으로 버젓이 올린 그 단어들이 주는 효과는 감성의 느낌으로만 작품 전체를 직관하며 독자 스스로 은연중에 응당 치부했을 터이다.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을 알파벳으로 명명함으로써, 감성적일 수 있는 틀에서 한 발 물러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작가 특유의 여성적인 문체와 묘사가 주를 이룬 이 소설에서 만약, 독자 스스로 친근하게 발음할 수 있는 ‘이름’들로만 붙였다면 좀 더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 더불어 소설 자체가 느끼해졌을 것이다. 소수의 이름과 알파벳의 명명은 적당한 비율로 서술되어 있어서 읽기 수월 했다.
단편을 읽고 나서 전체적인 느낌으로는 마치 진중하게 흐르는 잔잔한 클래식 감상처럼 편안했다. 그러나 강한 기시감과 천편일률적으로만 흐르는 편안함은 아니었다. 오히려 편안함을 기틀로 한 낯섦이 자못 진지했다. 입때껏 느껴지던 여성 한국 문학의 기시적인 느낌과는 사뭇 다른, 그러나 완벽하게 다르지만은 않는 낯설음이었다. 바로 인물들이 이끌어가는 이야기들에서였다.
가장 첫 번째로 수록된 <의심을 찬양함>이란 소설은 우연과 우연이 겹쳐지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핵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더욱 작위적일 수도 있지만 작가 은희경은 태연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독자의 초점을 돌린다. 쌍둥이 아파트와 쌍둥이의 캐릭터, 우연으로 치부되는 필연 혹은 내면과 이면이라는 큰 틀로 분위기를 꽤 긴장감 있게 조성하며 이야기를 이끈다. 캐릭터들이 느끼는 감정들과 점차 번지는 갈등의 양상을 아주 섬세하면서도 치밀하게 표현했다. 점증되는 사건들은 인간과 동류의 만인들이 느낄 수 있는 예각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이야기를 이야기답게 정지 없이 이끌어 내는 것, 주인공인 유진에게 설명하듯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사뭇 진지하고도 철학적이었다. 형을 이야기하면서 풀어내는 그 이야기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결코 중요치 않다.
아주 길게 이어지는 대화들로 하여금 일반적인 소설에서 드러나는 ‘보여주기 방식’ 보다는 ‘들려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쩌면 고도화된 ‘보여주기’인 셈이다. 대화로 풀어내는 문장들에서 독자 스스로 상상할 수 있는 요소와 여지가 충분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설정들은 마치 외국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마냥 어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평소 느껴지지 않는 신신함이 태반이었다.
그래서 더욱 저돌적이었고 다음 단편이 궁금해지는 묘한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책장을 끊임없이 넘길 수 있는 힘이 바로, 패기 넘치는 이 첫 번째 단편이었다.
표제작인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 한다>는 과연 표제작답게 탄탄한 스토리와 주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흡인력이 강해서 금세 술술 읽히기도 했다. 뚱뚱한 외모를 지닌 주인공이 아버지가 자신을 떠나게 된 이유도 결국 본질적인 이유인 자신의 외모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고 결국 지독한 다이어트를 결심한다. 그러나 단순히 다이어트를 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고, 다이어트를 서술하는묘사와 내용들은 리얼하면서도 설득력이 깊었다.
마치 작가 본인이 혹독한 다이어트를 경험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비너스가 벌거벗은 몸으로 조개를 밟고 서 있는 그림은 주인공을 사로잡았고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그림을 집에 걸어두기까지 한다. 슬슬 살이 빠지고 삶에 큰 변화를 느끼고 있을 때쯤 주인공은 급작스러운 부고 소식을 듣는다.
바로 아버지의 부고 소식이었다. 혼외자라는 타이틀 또한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묘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낯선 문상객들과 피가 반만 섞인 친지들 앞에서 주인공은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마주한다. 살이 꽤 많이 빠져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틈에서 주인공은 급격한 허기를 느낀다. 그동안 다이어트 하느라 오랜 시간 금기하던 탄수화물 즉, 국밥 두 그릇을 금세 해치우는 장면은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제일 비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비너스 액자를 소유했었던 주인공처럼 묘하게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극심한 다이어트를 하던 중에 입에 댄 탄수화물은 마치 사막 속에서 마주한 호수처럼 간절했으며, 그 국밥을 먹는 장소는 바로 주인공이 다이어트를 결심하게 했던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이다.
아이러니하면서도 모순적인 설정이었지만 작위적이지는 않았다. 주인공은 마지막 장면에서 두 그릇의 국밥을 순식간에 해치우고, 아버지의 원망과 자기혐오에 뒤범벅되었을 때 상주가 내밀던 신문지 싸인 액자 (즉, 주인공이 소유했었던 비너스로 추정되지만 소설 상에서는 확실하게 명명되지 않았다.) 를 받아들며 굳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나를 멸시한다고’ 마지막에 드러난 문장은 주제와 제목을 확실하게 드러냈다.
아름다움이란 개념이 도대체 무엇이며
그 본질이 중요한지의 판단은 어디에도 없다.
작가는 무심한 듯 늘어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마치 태연하면서도 의뭉스러운 손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온갖 긍정으로만 이루어질 것처럼 느껴지는‘아름다움’이 ‘멸시’라는 강한 부정의 단어로 이루어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다시 한 번 저절로 읊조리는 제목은 탁월했으며, 입에 착 감기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아름다움을 멸시하는 게 아니라,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아름다움은‘나’라는 주체를 뛰어 넘는 하나의 크고 깊은 개념이 되어 버렸다.
이 소설집에서 특이했던 점은, 각 단편마다 제목 외에 부 제목의 단어들이나 문장들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장면이나 느낌을 한 번에 표현하는 단어들은 마치 산문시의 제목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거나 한편으로는 예측해 볼 수 있는 재미를 느끼게 했다. 가령, 소설의 표제작인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 한다>에서 주인공이 비너스의 그림에 사로잡혔다는 문장을 서술 하기 앞서 버젓이 ‘비너스’라는 부제목을 달았다.
소설에서 인용된 소재인 그림, 비너스가 앞으로 어떤 작용을 할 것이며 주인공에게 있어서 어 떤 의미를 가지게 될는지의 ‘복선’ 역할이 두드러졌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이 신문지로 꽁꽁 싸여있는 액자를 받음으로써 비너스의 존재가 결말에서 확고하게 드러난다. 더불어 내용 자체에서 그 액자가 비너스였다는 것을 굳이 명시하지 않음에도 그 액자가 바로 비너스였다는 것을 쉽게 직감할 수 있었다.
<봄눈-비너스-일요일의 전화-일용할 양식-첫 이주일-선택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밥상-마지막 주-잘못 태어난 아이들-비너스>
표제작의 소설 곳곳에 새겨진 부제목들이다. 거의 양끝에서 대립을 이루는‘비너스’는 주제를 더욱 집중적으로 표현하며, 이야기에서 흐르는 근원적인 본질을 은근하게 드러냄으로써 방점 같은 기능을 이루어 낸다. 독자가 은연중에 놓쳤을 법한 주제들을 문장 곳곳에 노출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상기 시키는 것이다. 좋게 표현하자면 ‘힌트’의 기능을 가지지만, 나쁘게 표현하자면 필요 이상의 ‘과잉 친절’인 이다. 이러한 요소들에서 옳고 그른 것은 결코 없다고 느껴진다. 각자의 독자들의 판단과 몫인 셈이다.
다만, 조금 거슬린다고 느꼈던 것은 기법적인 요소가 아니라 바로 쌍시옷들이었다. 오래 전에나 사용했을 법한 단어의 어감들이 꽤 세게 느껴졌다. 유려한 제목과 달리 의외의 표현들이었다. 메씨지, 레스또랑, 씨멘트, 씰루엣등등. 컴퓨터 워드 작업으로 지금 이렇게 타이핑을 하면서도 자동으로 빨간 줄이 쳐지는 저 단어들은 이 소설의 출판 년도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소설이 출간된 년도는 2007년이므로, 현시점으로 보아 약 11년이 흘렀다.
시대에 따라 맞춤법 또한 변한다지만, 다소 촌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쌍시옷들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책 제목이 생각나지 않을 때는 시집을 뒤지곤 한다.’ 라는 문장이 ‘작가의 말’에서 드러났듯이 제목들은 전부 시의 단어처럼 깊이 있게 느껴졌다. 이야기의 힘을 자아내는 기본 요소의 제목들이 꽤 단단했으며, 연관 지을 수 있을 법한 단어들은 정갈하면서 진중한 분위기를 느끼게끔 했다. 작가의 말까지 전부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자꾸만 각자의 주인공들과 지인으로 그려지지만 또 다른 제2의 주인공 같은 알파벳들 (늘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는B, 9번 유형이라는 친구M, P선배)이 슬며시 생각났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조금 희미했었던 그들이 어느 순간, 더욱 여실한 존재로 내게 바투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깊이 있는 하나의 시선과 초점을 무심하게 표현하는 묘사들 또한 도리어 섬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삶에 치여서 마음이 불안정 할 때나, 여유를 즐기고 싶을 때 다시금 펼치고 싶은 단편집이었다.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그네들은 환상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인물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흔히 아는 우리네 이야기, 혹은 지인들의 마치 비화 같은 첨예한 이야기,
다시금 오래도록 곱씹을 수 있는 귀한 책을 발견 한 것 같아서 마음이 풍성해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