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이루어져왔던 규열의 과정들을 우리가 뒤늦게 알아차릴 뿐이다.
영화화 소식과 예고편, 온갖 광고가 쏟아졌었던, 영화 개봉을 마친 베스트셀러 작가 김영하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살인자의 기억법"
'살인'이라는 자극적인 단어가 버젓이 올라간 소설의 제목이 풍기는 느낌을 대변하듯 책의 대표 표지 색상은 짙고 선명한, 채도 높은 핏빛 붉은색이었다. 이 소설이 출시된지는 꽤 되었지만 지금 온.오프 서점에서 화두로 내걸고 있는 이유는 바로 9월 개봉을 앞둔 영화 때문이다. 그것도 배우 설경구와, 김남길, 아이돌 설현이 등장하는 꽤 센세이션한 캐스팅 덕분.
처음 이 소설의 제목을 접하곤, 프랑스 소설가 아멜리노통브의 <살인자의 건강법, 적의 화장법>을 떠올렸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지만, 소설 저변에 풍기는 느낌은 조금 흡사하다. 음침하면서도 고적한, 그러나 김영하쪽이 좀더 더 생동감 있달까.
출판사의 책 소개
정교하게 다듬어진 공포의 기록!
김영하의 장편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너의 목소리가 들려》 이후 일 년 반 만에 펴낸 장편소설로 알츠하이머에 걸려 점점 사라져가는 기억과 사투를 벌이는 은퇴한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올해로 데뷔한 지 19년, 독보적인 스타일로 여전히 가장 젊은 작가라 불리는 저자의 이번 소설에서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지는 잠언들, 돌발적인 유머와 위트, 마지막 결말의 반전까지 정교하고 치밀하게 설계된 모든 것들을 만나볼 수 있다.
30년 동안 꾸준히 살인을 해오다 25년 전에 은퇴한 연쇄살인범 김병수. 알츠하이머에 걸린 70세의 그가 벌이는 고독한 싸움을 통해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공포 체험에 대한 기록과 함께 인생이 던진 농담에 맞서는 모습을 담아냈다. 잔잔한 일상에 파격과 도발을 불어넣어 딸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살인을 계획하는 그의 이야기를 그려내며 삶과 죽음, 시간과 악에 대한 깊은 통찰을 풀어놓는다.
김영하작가는 좋아하는 한국 작가중 10순위에 꼽히는 사람이다. 저돌적이고 거침없는 문장들, 그 기발한 발상과 소설 속 메세지들까지. 김영하의 작품들을 다수 읽었고, 개중에서도 내 마음을 가장 홀린 소설은 바로 <퀴즈쇼>였다.
김영하 작가는 소설을 다재다능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재주가 기발한 사람이다. 김영하의 작품을 읽을 때 마다 느꼈던 건 '아, 이 사람은 천상 작가구나.' 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야기가 진전될 수록, 그 안에 파묻힌 이야기가 더 기대되는, 그리고 그 소재가 고갈되지 않을 것 같다는 묘한 질투심마저 유발된다. 살인자의 기억법, 위 소설은 무척 짧아서 킬링 타임용으로 아주 적합했다.
하지만 뒤이은 영화화 소식은 살짝 의구심이 느껴지는? 조금 날것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 소설의 서사속에서도 그 불균형하고 혼잡한 연쇄살인범 '김병수'를 어떻게 캐릭터로, 영화라는 매개체로 표현할 수 있을지?
사실 정확히는 노파심이었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으므로, 이 노파심이 어떤 경로로 깨어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주연배우, 특히 음침하면서도 과묵하게 표독스럽고 치밀한 살인범을 연기 할 설경구의 연기엔 일가견을 찾아볼 수 있을 듯 싶다.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 위 소설의 최대의 장점은 매우매우 잘 읽히는 점이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은 물론, 살인자의 음침하면서도 명료한 독백들이 꽤 개연성있게 흘러나온다. 짧은 분량도 그 서스펜스에 한 몫했다는 점도.
살인범 김병수의 온전한 기억 속, 첫 살인의 단초는 바로 폭력적인 아버지의 (어쩌면 합당할지 모르는) 살해였다. 지극히 우발적이고, 오랜 세월의 다짐을 입증하듯 친여동생과 엄마의 도움까지도. 하단, 연쇄살인범 김병수의 첫살인의 대목을 옮겨 적어본다.
아버지가 나의 창세기다. 술만 마시면 어머니와 영숙이를 두들겨 패는 아버지를 내가 베개로 눌러 죽였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아버지의 몸을, 영숙이는 다리를 누르고 있었다. 영숙이 나이 고작 열셋이었다. 옆구리가 터진 베개에서 왕겨가 쏟아져 나왔다. 영숙이는 그걸 쓸어담고 엄마는 멍한 얼굴로 베개를 꿰맸다. 내 나이 열여섯 살의 일이었다. 6.25 직후에는 죽음이 흔했다. 자기 집에서 자다가 죽은 남자에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아버지는 늘 악몽을 꿨다. 잠꼬대도 심했다. 죽는 순간에도 아마 나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내 인생은 셋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를 죽이기 전까지의 유년. 살인자로 살아온 청년기와 장년기. 살인 없이 살아온 평온한 삶. 은희는 내 인생 제 3기를 상징하는,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부적 같은 것 아니었을까. 아침에 눈을 떠 은희를 볼 수 있다면, 나는 희생자를 찾아 헤매던 과거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었다.
*
살인이 가장 산뜻한 해결책일 때가 있다. 언제나는 아니다.
*
TV 뉴스에 자꾸 내가 나온다. 사람들은 은희가 내 딸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모두가 저렇게 얘기하니까 내가 틀린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은희가 요양보호사로 성실히 일해왔으며, 치매를 앓고 있는 독거 노인들을 헌신적으로 돌봐왔다고 말했다. 동료 요양보호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은희의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이 거듭하여 나왔다. 그들이 너무 슬피 울어 하마터면 나조차도 은희가 내 딸이 아니라 요양보호사라는 말을 믿을 뻔했다. 경찰은 내 집 주변을 샅샅이 파헤치고 있다. 유전자 검사, 악마 같은 단어들이 흘러간다. 형사를 불러 이제 집 마당은 그만 파고 대나무숲을 파보라고 일렀다. 형사가 긴장된 얼굴로 나갔다. 그때부터는 TV에 대숲이 나오기 시작했다. 언제나 영롱한 댓잎의 노래를 들려주던 나의 대숲이.
"이건 뭐, 그냥 공동묘지네, 공동묘지야."
방수포에 싸인 유골들이 줄줄이 산을 내려오는 것을 보고 동네 사람 하나가 말했다.
소설을 중간중간 다 읽어갈 무렵, 연쇄 살인범 김병수의 토막난, 그래서 마치 절실한 독백이 피력된 일기장과 흡사한 이야기들을 읽을 때 마다, 알츠하이머의 장치가 소설의 기저 곳곳에 잘 스며 들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김병수의 딸 은희도 제정신이 아닌 듯 싶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대화들이 거기 원래 있던 제 자리마냥 배치되어 있고, 문장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태연스레 이어진다. 만일 은희가 제정신이라면 기억을 잃어가는 저주에 걸린 살인범 김병수가 온전하게 제정신이 아니었으므로 그 미세한 균열은 매우 온당하다. 소설이 끝나고 문학평론가 권희철의 해설에도 그 부분을 언급한 게 등장한다.
불확실한 기억을 보완하기 위해 연쇄살인범은 모든 일들을 꼼곰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리고 그것이 그의 세계를 지탱해주리라고 기대했는데, 그 기록 속에서조차 세계는 자기 자신과 불일치하며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 단지 자신이 길렀던 개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개를 길렀다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는 것인지 끝내 확인할 수 없고, 김병수의 세계를 구성하는 작은 디테일 하나가 불확실해지면서 세계 전체가 조금씩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정교하게 짜여진 이 소설은, 조금씩 치밀하게 이야기에 균열을 내면서 김병수의 세계 전체를 붕괴 직전의 상태로 허약하게 만든다. 이 소설이 마지막에 가서야 '이 모든 게 망상이었다'며 이야기를 뒤집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의 한 방울이 붕괴 직전에 있던 대 혼란을 범람하게 만들고 나서야 조금씩 이루어져왔던 규열의 과정들을 우리가 뒤늦게 알아차릴 뿐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 평론가의 이름을 내걸고 지면에 싣는 말 그대로 '해설'이므로 긍정적인 평가는 응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소설이 마지막에 가서야 '이 모든 게 망상이었다'며 이야기를 뒤집는 것은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솔직히 실망을 금치 못 했다는 사실이다. 기억을 잃어가는 '알츠하이머'의 장치는, 개연성 넘치게 꼬았다거나 발상의 전환이 이뤄진 부분이 없고, 매우 온전하게 '알츠하이머'의 장치가 100%이뤄졌고, 그 이뤄진 역할에는 일말의 문제점이 없었다. 그래서 아쉬웠다는 점이다. 소설 속에서 표현된 메타포, 즉 비유로 표현하자면
❛A-'(1)복숭아'를 먹었더니 '(2)복숭아 씨앗'이 나왔다.
❛B-'(1)복숭아'를 먹었더니 ')2(바나나 껍질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나왔다. 심지어 그 껍질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미세한 ')3(입구멍'이 뭐라고 지껄이고 있었다.
날것으로 표현하자면 그렇다. 내가 알고 있는 김영하 작가는 충분히 B까지 수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과감하고 편안하게 A, 그러니까 이렇게 정직하고 당연한 흐름을 선택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소설을 집필한 시절의 작가 개인의 컨디션과 시대적 흐름, 타이밍, 분량과 다양한 기법들, 등등 여러가지 변수가 있을 수는 있지만, 한 개인의 의견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흡인력 넘치게 그 긴장감 넘치는 서스펜스를 놓치지 않고 살인범 김병수의 심리묘사와 사건의 전말을 잘 이끌어냈다는 점은 매우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