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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리쿠의 “꿀벌과 천둥”을 읽고

피아노에 대한 단상

by 발렌콩

일본의 유명 여류 작가 온다리쿠의 “꿀벌과 천둥” 신간 출시와 함께 보다 전폭적인 홍보와 꽤나 빠른 이북 버전 업데이팅까지.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천재들의 불가항력적이고도 감각적인 ‘재능’을 다루는 이야기라니. 당연히 흥미로웠다.


소다 마사히토의 천재 발레 소녀를 다룬 만화 <스바루>를 정말 열중하여 읽었고, 위 만화 전권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심취했었던 기억이 있으니, 초반부터 기대했던 소설이었다. (만일 꿀벌과 천둥이 몹시 흥미진진했고, 다시 한번 이런 부류의 책을 접하고 싶으시다면, 상단의 천제 발레리나 만화책 “스바루” 격하게 추천합니다. )

덧붙여 제목에 버젓이 올려진 ‘꿀벌’과 ‘천둥’ 이라는 자연으로 이뤄진, 그러나 두 단어끼리 확실하게 매칭되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에 호기심도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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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소설은 ‘음악가’, 즉 ‘천재 피아니트스트’들의 한 유명 콩쿠르를 중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900 페이지에 달하는 중 장편인 만큼, 등장인물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소설 속에서 등장한 콩쿨 메인 주인공들과 주인공들을 바라보는 그네들. 주인공들의 피아노 연주를 엄격하게 심사하는 심사위원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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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을 자주 읽지는 않는다. 특유의 담담한 문체와 은은한 분위기를 좋아하지만 그간 한국 소설을 좀더 많이 읽느라고, 온다리쿠나 에쿠니가오리,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정도의 유명 작가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 소설이 아닌 이상은 많이 읽지는 못했다. 작정하여 일본 문학을 기피하지는 않았지만, 캐릭터에 몰입하기에 긴 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인들의 이름으로 성별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등장인물에 빠르게 집중 하기 어렵다. 마침, 위 소설 속에서도 콩쿨에 함께 참가한 한국인들의 이름을 두고, 성별을 분간하기 어렵다고 했으니. 그건 이름에 익숙치 않은 외국인들에게 모두 해당되는 공통 사항일테니. 때문에 위 소설을 읽기 전에 반드시 빠른 몰입도를 위하여 하단, 출판사에서 제공한 북트레일러 영상을 먼저 참고하는게 큰 도움이 될 듯 하다.



온다리쿠 - 꿀벌과 천둥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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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대상 2회 수상의 영예를 안긴 『꿀벌과 천둥』. 첫 구상으로부터 12년, 취재 기간 11년, 집필 기간 7년의 시간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써내려간 작품으로, 온다 리쿠의 새로운 대표작이 되었다. 일본 하마마쓰시에서 실제로 3년마다 열리고 있는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무대로 인간의 재능과 운명, 음악의 세계를 아름답게 그려낸 소설이다.

출판사 줄거리 : 한때 천재 소녀로 불렸지만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무대를 떠났던 에이덴 아야. 유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히는, 줄리아드 음악원 출신의 엘리트 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 음악을 전공했지만 지금은 악기점에서 일하며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28세 가장 다카시마 아카시. 그리고 양봉가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며 홀로 자유로운 음악을 추구해온 16세 소년 가자마 진. 수많은 참가자들 사이에서 이들 네 사람이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자신과의 싸움. 3차에 걸친 예선을 뚫고 본선에서 우승을 거머쥘 사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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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친절하고, 작가는 다정한 사람이다.


소설 첫장을 들추면, 프롤로그나 본문에 돌입하기 전에 이렇게 콩쿨에 표현될 ‘실제 예선 피아노 곡’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제 1차 예선, 제 2차 예선, 3차와 마지막 본선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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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소설 속에 등장한 콩쿠르 과제곡의 명시까지. 마치, 실제 콩쿠르에 객석으로 참석하여 콩쿨 리플렛을 받은 느낌이다. 미술작품 전시회를 감상하기 전에 도록을 펼쳐보는 것처럼.

처음 이 소설의 독서를 결정할 때 가장 우려했던 점은 바로 그거였다. 무용이나 음악, 위 예술을 선사하는 천재들의 총천연색의 활달한 감각들, 눈빛, 손짓, 숨을 고르는 그 타이밍마저도. 저마다의 관객들은 그 고유의 문화를 자신만의 방식대로 향유하고 흡수한다. ‘시각’과 ‘청각’이라는 그 당연한 경로로 그 감각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 그 장치를,

글.

즉 ‘문장’으로 어떻게 표현 할 수 있을지? 만화 스바루는 그나마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기에 몰입이 이뤄지는 편이며, 그림으로 그 감각을 표현 할 수 있다. 물론 글도 그 감각을 표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글은, 상상력과 집중력이 꽤 많이 필요하다.때문에 그런 부분을 어떻게 커버칠 수 있을지 매우매우 궁금했다. 장편의 호흡으로 끝까지 끌고 갈 수 있을지. 의구심 반, 기대 반 이었다.

결론만 이야기하면 꽤 기대에 충족했다. 각 캐릭터가 지닌 고유의 성질과 처해진 환경, 그들의 진중한 사연들로 하여금 뒷부분이 계속 궁금해지는 서스펜스였다. 정확히는, 캐릭터들이 연주하는 클래식 음악들이 궁금하여 자주 독서를 중단하고 유투브에 연주곡들을 검색하곤 했다. 소설에서 표현된 섬세한 문장들과 유려한 묘사에 맞춰 음악과 함께 읽기도 했다.




예컨대 이런거다.

마사루의 마지막 본선 피아노 연주곡, 프란츠 리스트 작곡, 피아노 소나타 나단조를 연주하는 부분에선, 클래식 본연의 향취를 좀더 섬세히 느낄 수 있는 스토리라인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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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

소설 속 발췌 :
30분 가까운 대작으로 어려운 곡이 많기로 유명한 리스트의 곡 중에서도 다양한 기량이 요구되는 최고 난이도의 곡이다. 복잡하고 치밀한 그 구조는 오랫동안 연구의 대상이 되어왔다. 마사루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의도적으로 복선을 깐, 교묘한 구성의 장편소설 같다고 생각했다.

*
청년은 무표정하게 그 비석을 밟고 넘어간다. 시선 끝에 보이는 것은 야트막한 언덕에 퍼져 있는 마을. 교회의 첨탑과 오래된 성벽이 유서 깊은 풍족한 마을임을 알려준다. 청년은 말이 없다. 하지만 그 눈은 매섭게 한 점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다…….
그렇다, 이것은 몇 세대에 걸친 업보가 얽힌 비극. 여러 사람들의 의도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뒤엉킨다. 불온한 도입부에 이어 주제 부분으로 들어간다. 이 땅의 중심에 군림하는 일족의 주요 멤버들이 등장한다. 폭군인 아버지, 그 자리를 노리는 그의 동생들, ...............현재진행형이고, 불화의 씨앗은 이미 뿌려졌다.
*
조금 유치한 이야기지만 19세기 낭만주의 시대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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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덴 아야

소설 속 발췌 :
콩쿠르를 만끽한다. 확실히 나는 '콩쿠르'를 새로 발견했다. 다양한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즐거움. 당야한 참가자의 배경을 보는 재미. 콩쿠르가 갖는 그런 즐거움을 발견하고 청중으로서 '만끽'해왔다.
하지만 그 '만끽'은 마사루가 말하는 의미와는 다르다. 가장 오래 당사자로 있을 수 있다. 그가 말하고픈 것은 참가자로서, 음악가로서 그렇다는 뜻이다. 경쟁 자체를 만끽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글쎄, 나는 다르다. 참가자로 '만끽'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그저 관객이었다.
아야는 마음이 점점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중력이 몸을 묵직하게 짓누르고, 좌석이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감각.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 걸까?
지금껏 회피했던 의문이 새삼 떠올랐다.
*
청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은 쾌감을 주었다.
어머니도 만날 수 있었다. 우주까지 날아오를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달아나기만 했다. 내 안의 공포에서 눈을 돌리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귀중한 체험을 했다.
새삼 음악이 얼마나 멋진지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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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죽음 이후로 피아노에서 멀어졌던 에이덴 아야가, 천재 소년 가자마 진의 마지막 본선 연주곡을 듣고 비로소 자신의 음악에 대한 주관과 목적을 찾고 깨닫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모든 것을 갖춘 탄탄대로의 피아니스트가 피아노가 전부인, 순수하게 음악이 전부라고 외치는 (피아노가 없는) 가자마 진의 본질적인 페르소나를 절감하게 되는 그 순간들.

결국 에이덴 아야는 가자마 진을 통해 비로소 자신과 본인의 음악성을 깨닫게 되고, 본선 마지막 무대에서 음악의 길을 결정한다. 다시 되돌아기로.

가자마 진

소설 속 발췌 :
밖으로. 밖으로.
진은 성에서 나와 시원하게 뚫린 곳으로 나갔다. 발밑에 느껴지는 풀의 감촉. 광활한 초원이다. 저 멀리 초원을 걸어가는 호프만 선생님의 모습이 보인다. 뒷짐을 지고 살짝 고개를 숙인 채로 천천히 걸어간다.
밖으로. 밖으로.
어떻게 하면 데리고 나갈 수 있을까? 음악을, 넓은 곳으로?
진은 선생님의 뒷모습을 쫓아갔다.
선생님. 기다려요
바람이 분다. 뺨을 어루만지는 빛을 느낀다.
밝지만, 침침하다. 빛은 느껴지지만 어딘가 어렴풋하다.
*
그때 뚝뚝 소리가 난다.
진은 선생님을 쫓아가지 않고 소리가 나는 쪽을 보았다. 도가시가 나뭇가지를 자르고 있다. 그 날카로운 전지가위를 들고 엄청난 속도로 갯버들 가지를 잘라내 품에 끌어안는다.
최대한 빠르게.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말하는 도가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원은 순간이고, 순간은 영원이다.
진은 눈을 반짝 떴다.
성대한 박수.
*
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 한 점 없이, 비가 조용히 떨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천둥이 나직하게 울고 있다. 겨울의 천둥.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끓어올랐다. 번개는 보이지 않는다.


피아노에 관련된 이야기를 읽다보니 자연스레 피아노에 대한 사연을 지닌 친구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불현듯이 가끔씩 떠올렸던 그 이야기들.

전형적인 '순수 예술'은 엄연히 금전적인 관계에 얽매인다. 즉, 돈이 많이 든다는 얘기다.

물론 피아노 뿐이랴 ,미술, 악기를 다루는 음악, 발레. 정통이 존재하고 감각을 표현하는 예술은 스승이 전부라고 했다. 훌륭한 스승에게서 레슨을 받고, 입시라는 전형을 거쳐야만 한다. 특정 규격에 '평가'라는 잣대를 부여하며 이뤄지는 그것들엔 시간은 물론, 돈이 많이 든다. 위 소설 꿀벌과 천둥의 주 무대였던 콩쿠르에 주기적으로 참석하며 좋은 성과를 내야 한다.

그 애는 음대를 원했다. 피아노를 치는 곳에 가고 싶어했다. 피아노를 전공하고 싶었는데, 넉넉치 않은 형편과 가족들의 반대로 인해 피아노를 포기하고, 같은 과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다. 피아노 대신 글을 쓸 거라고 다짐했던 듯 싶었다. 그러나 결코, 피아노는 그애에게 '아픈 손가락'이었다. 글을 쓰면서도, 자주 피아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피아노 얘기를 할 때면 그애의 큰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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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생각나는 일화 하나는 음대 입시에 피아노를 치기 전에, 앞 번호의 사람이 쳤던 그랜드 피아노 건반 위의 뜨뜻미지근한 땀을 닦는 일이었다.

"피아노에 땀이 묻는다고?"

딱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만 피아노를 배웠던 내게는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얗고 검은 건반들 위에 반들반들 할 정도로, 그 액체가 흘러 내릴 정도로 땀이 묻는다는 것이었다. 꽤 냉혹한 평가가 치러지는 긴장 연속의 공간에서 쉴새없이 손가락을 움직이느라 피아노 건반 위에는 늘 타인의 땀으로 번들거린다는 것.

"유독 손에 땀이 많은 다한증이 아니었을까?"

도저히 믿기지 않아 물어보면, 자신도 그 수많은 실기장 피아노들에 손땀을 묻혔다고 답했다. 땀을 닦으며 자연스레 동화되는 그 긴장감과 절박함.

언뜻 생각하면 당연하겠지만 그 당시엔 어쩌면 그렇게 놀랐을까. 한편으론 나또한 그랬던 적이 있었을까? 키보드에 땀이 묻을 정도로 절박하고 긴장감이 감도는 문장을 치기 위해 열심히, 노련하게 손가락을 놀렸던 적은?

지금까지도 간간이 연락은 하지만, 안타깝게도 졸업하고 지금까지도 그 애의 피아노 연주를 실제로 들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글을 쓰다, 일본어를 배우다가, 캐나다로 워홀을 떠나다가, 급기야 스물넷 정도의 어린 나이에 피아노 학원의 실장으로 근무했던 경험까지도.

꿀벌과 천둥을 읽고나서 다시금 되새기는 이야기들, 피아노에 남은 미련을 늘 조그만 방울처럼 달고 다녔던 그 애처럼. 다시금 떠올려보니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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