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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렌콩 Aug 04. 2018

영화 캐롤

퀴어라는 명칭도 속박이다

영화 캐롤을 봤다. 독립영화관을 주로 상영하는 아트하우스에서 예매했는데, 예매하기 전 표 밑에 큐레이터라는 단어가 붙어 있었다. 보통 전시관이나 미술관에서 주로 듣는 단어인데, 의아했다. 따로 어떠한 설명도 명시 되어 있지 않았다.


어차피 관람할 수 있는 시간이 중요했으므로 별 생각없이 개의치 않고 넘겼다. 영화관에 착석했을 때 영화가 막 시작되기 직전에 캄캄한 공간이 환하게 켜졌다. 앞줄에 앉아있던 남자가 마이크를 잡고 스크린 앞 가운데에 서서 큐레이터에 대해서 설명했다. 영화가 끝나고 약 20여분 정도 영화 캐롤에 대한 설명이 있을 예정이며, 영화의 설명에는 정치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니 미리 노파심에 알려드린다는 내용이었다.

  영화 캐롤, 친한 지인 두명의 추천, '여자'의 섬세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는 평으로 관람을 결정했으므로 사실 예쁘고 감성적인 포스터와 다소 간단명료하면서도 강렬한 제목에 이끌렸다. 게다가 섬세하고 세밀한 '시선'이라니, 혼자서라도 꼭 봐야겠다 싶었다.

  동성애 코드, 퀴어가 담긴 영화, 그리고 여자의 세심하고 부드러운 시선, 그 분위기와 느낌.

  퀴어문학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냥 저냥 재밌게는 읽었다. 소설 동아리에서 합평 멤버 한명이 퀴어를 소재로만 소설을 써와서 그때 제일 많이 읽었다. 그때 느꼈던 단상들과 감정들은, 그리고 '동성애'의 코드와 사회적인 시선까지도, 전혀 비난과 비판도 없다.


도리어 나는 그들을 혐오하는 '포비아'를 싫어하므로. 어디선가 읽은 글에서 모든 사람들은, 개중에서도 특히 여자가 60%의 확률로 양성애적 성향을 보인다고 했다. 물론 명확하게 입증되지 않는 수치이지만, 그럴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캐롤을 관람하기 전에, 딱 작년 6월 즈음 친한 동생과 퀴어 영화를 관람 했었다.


비가 아주 많이 쏟아지는 날, 이대 CGV에서 퇴근후에 함께 그 영화를 봤다.

  제목은 <커피 한잔이 섹스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우연인건지, 의도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 캐롤에 등장하는 캐롤의 전애인으로 보이는 '애비'와 커피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애비', 서로의 이름이 겹쳐진 것을 보고 살짝 놀랐다.


동생은 아주 어른스럽고, 성적인 코드를 잘 다루었다. 그 애가 쓴 대부분의 소설은 '성'과 혹은 '욕망'이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에 대해서 우회적으로, 혹은 아주 직설적으로 묘사 되어있었다.


 읽을 때마다 감탄했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치르고 실기를 통해 문예창작학과에 같이 입학했던 동생.(이런 내밀한 이야기를 작성해도 되는건 지 조금은 고민스럽지만)
 


그 동생은 실기시험을 치르는 당시 내 맨 앞줄에 앉았다. 나는 사람을 잘 기억하는 편이지만, 실기 시험장에서 그렇게 예쁘게 머리를 말고, 그 추운 겨울날 치렁치렁 긴 치마를 입고 나타난 그 애는, 그 누구라도 기억할 것이었다. 아무튼, 그 동생에게는 성별을 밝힐 수 없는 절친한 동성애 친구가 있었으므로, 이 영화를 더욱 집중해서 관람할 것이라고 빤하게 예감했다. 어제 봤던 영화 '캐롤'과 '커피'<커피 한잔이 섹스에 미치는 영향: 이하, 커피>를 비교하면, 캐롤보다 커피가 훨씬 야했다. 직설적인 제목과 섹슈얼리티한 분위기의 영화 포스터에서 예감할 수 있듯이, 여자의 섹스 장면이 주를 이뤘다. 

  낯뜨거운 장면들이 직설적으로 이어졌다. 커피의 영화가 끝나고 캐롤의 큐레이터와 마찬가지로 영화 제작사와의 담화가 있었다. 짧은 단발머리 여자는 커피를 언급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같은 성을 사랑하는 레즈와 게이들은, 본질적으로 동성애의 기질을 갖고 태어났으며, 결국 타고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환경적인 요인도 조금은 가담 된 것이다. 물론 아닐수도 있겠지만.' 이와 비슷한 말들이 커피와 캐롤에서 모두 등장했다. 퀴어장르에서 꼭 빠지지 않는 장치적인 편견과도 같았다.


  텍스트로 옮겨 적으니 뭔가 좀더 날카로운 느낌이지만 실제 담화에서는 그렇게 날카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동생은 조금 달랐나보다. 반론의 기회를 달라고 했다. 마이크를 잡고 당당하게 이야기했던 동생의 말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너무도 명확하고 명백한 발언에 그 단발머리 여자가 당황하여 목소리를 버벅거린 것, 자신의 경솔했던 발언을 중화시키기로 하듯이, 결혼하여 딸이 있는, 이성애자인 자신조차도 그런 감정들을 느껴본 적이 있다는 경험을 꺼내놓았다.

다시 본론으로, 영화 캐롤이 시작 되고 처음 등장하는 분위기의 오프닝은 이야기의 중간 지점이라는 느낌이었다. 서로  다른 느낌의 여자 주인공 두명이 묘한 기류는 물론이고 대화를 나뉘는 부분에서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서로 감정을 나누고 헤어졌다는 느낌이 명확했다. 조금은 애틋하면서도 아련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영화가 퀴어 장르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관람했을지라도 필시 사연이 있을것이라고 예감했을 것이다.
 

영화의 연도는 1950년대이다. 꽤 클래식하다. 테레즈와 캐롤의 만남은 아주 일반적이었다. 둘의 첫만남은 여느 평범한 손님과 점원으로, 다를 바가 없었다. 캐롤의 하나뿐인 딸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려고 들어선 테레즈의 장난감 매장에서 둘은 묘한 느낌을 받는다.


  때문에 일반적인 손님과 점원이 나누기에는 아주 살짝 핀트가 깊어지는 목소리가 오갔다. 실수, 다시 정정한다. 사실 목소리가 아니었다. 캐롤와 테레즈의 묘한 시선이었다. 둘은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고, 그 눈빛 대화의 느낌은 꽤 격정적이었다. 결정적인 타이밍은 캐롤이 우연히 두고간 가죽장갑이었다. 글쎄, 이렇게 부려쓰고 다시 찬찬히 생각해보면서도 그게 우연인지, 의도인건지는 살짝 긴가민가하다. 설령 의도라 할 지라도, 잔상의 맥락으로는 '우연'이 맞으므로 결국 타이밍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하지않는가. 타이밍을 좀더 한국적인 단어로 풀어보면 '인연'이다. 유리 테이블에 오롯하게 놓여진 한켤레의 가죽장갑을 내려다보는 테레즈의 시선에서 확고함을 느꼈다.


나는 '사랑의 타이밍'에 대해서 절감했다. 사랑이라는감정이 점철된 '타이밍'은 내겐 꽤 슬픈 말이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슬픈것이겠지만 말이다. 종영한 응팔에서도 정환이가 뒤늦게 덕선이에게 달려갔을 때, 한발 앞선 택이의 등장 뒤에서 나레이션으로 중얼거렸던 그 '타이밍'처럼. 타이밍, 너무 밉지만 내 사랑에도 타이밍이 맞지 않는다면 나 또한 과감히게 포기하리라.

어떤 여자라도 이렇게 매력적인 여자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캐롤의 분위기와 자태는 가히 압도적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배우 김혜수가 뚜렷하게 떠올랐다. 내 멋대로 한국판 캐롤의 배우들을 캐스팅 해 보면서 영화를 봤던 것 같다.


유순하고 부드러운 테레즈,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캐롤, 그 둘의 조합이 잘 어울렸다.


영화 자체는 조용하고 잔잔하다. 어느 흔한 로맨스 영화와 똑같았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퀴어, 동성애 코드와는 차별화된 어떤 내용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사랑을 확인하는, 그 사랑을 키워나가는, 어떤 시련으로 그 사랑을 포기하는 과정까지, 더불어 다시 재회하는 그 순간마저도 통상적으로 불리우는 로맨스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내 오른쪽에 착석한 무리는 모두 여자였는데, 영화 도중 곁눈질로 살폈을 때 모두들 스크린에 집중했다. 반면 남자들은 조금 지루해 하는 듯 했다. 잔상들이 고루하고, 공감도 되지 않을 터였다. (내가 만약 남자라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섬세하고 여성적인 성격의 남자라면 여자처럼 공감 할 확률이 매우 높겠지만.)


  지인은 캐롤을 보고 울었다고 한다. 아이 미스 유, 아이 미스 유. 캐롤에게 건네려던 테레즈의 전화 속 목소리를, 당사자가 듣지 못했던. 그 진솔한 고백 때문에 계속계속 울었더랬다. 캐롤은 정적이고 느릿한 분위기다. 사랑을 잇는 그 감정선도 마찬가지다. 아주 천천히 차오르고, 배우들은 감정이 풍기는 진솔한 분위기를 시선으로 표현한다. 더불어 칙칙하면서도 클래식한 분위기가 돋보이는 촬영 기법 에서조차 배우의 시선 위주로 화면을 이끌어 나갔다.


   캐롤은 분명, 아이의 양육권을 포기했다. 영화를 분명히 봤음에도 마지막에는 전혀 인지 하지 못했어서, 처음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살짝 놀랐다. 그러고보니 맞는 말이었다. 얼마나 좋으면 자기 하나뿐인 딸까지, 양육권과 면접권을 포기해서라도 자기 사랑을 지켰을까. 자기 딸을 위한 장난감을 구입하다가 마주했던 자신의 애인, 테레즈를.

  캐롤, 개인적으로 참 괜찮은 영화였다.


  고백하건대, 퀴어문학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미리 밝혔지만 나는 몇달 전에 퀴어 장르의 단편을 작성했다. 여자가 아닌, 남자와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작성했던지라 감정선이 매우 어설펐지만 말이다. 이런 섬세한 감정선을 배울 수만 있다면, 여러 컨텐츠로 정독하고 고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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