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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렌콩 Oct 02. 2018

김민정 시인<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저자 김민정

출판 문학과지성사

발매 2009.12.10.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 김민정


천안역이었다

연착된 막차를 홀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톡톡 이 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플랫폼 위에서 한 노숙자가 발톱을 깎고 있었다

해진 군용 점퍼 그 아래로는 팬티 바람이었다

가랑이 새로 굽슬 삐져나온 털이 더럽게도 까맸다

아가씨, 나 삼백 원만 너무 추워서 그래

육백 원짜리 네스카페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이거 말고 자판기 커피 말이야 거 달달한 거

삼백 원짜리 밀크 커피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서울행 열차가 10분 더 연착될 예정이라는 문구가

전광판 속에서 빠르게 흘러갔다 천안두리인력파출소

안내시스템 여성부 대표전화 041-566-1989

순간 다급하게 펜을 찾는 손이 있어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게서 따뜻한 커피 캔이 만져졌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던 그 시였던가

여성부를 이성부로 읽던 밤이었다



   제목에서부터 여성적이면서도 묘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이라는 단어와 ‘느끼다’의 단어가 적절하게 조합되어 야릇한 느낌을 풍기기도 했다. 시를 읽는 내내 서서히 성장해 가는 젊은 여자의 일기, 혹은 덜 성숙한 소녀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다소 평범한 단어와 문장을 통해서 드러나는 거침없는 생각들은 피식, 웃음 짓게 만들었다. 여성적인 블랙 유머를 읽는 것도 같았다. 거침없지만 어느 정도 안정적인 말장난과 그에 따르는 묘하고 웃음적인 코드, 섬세하지만 마냥 여성적이지만은 않은 코드, 거침없는 생각 속에서도 오묘한 느낌의 단어들과 솔직한 어떤 것이 적절하게 조합되어 묘한 느낌을 풍겼다. 가볍게 읽히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적절한 수위와 느낌들이 좋았다. 가끔씩 직설적인 단어와 그 돌직구들이 돌진하듯 거침없이 드러났지만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시로 부리는 단어를 적절하게 배치하며 섬세하게 다루는 솜씨가 돋보였다. 그 감각과 센스를 잘 겸비한 시인 같다. 김민정 시인을 교양 수업으로 뵌 적이 있는데 뵐 때 마다 돋보이는 패션 감각과 빠르지만 오목조목한 말 솜씨 등을 통해서 사람 본연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 시만큼이나 무한하다는 것을 느꼈다. 

여성상으로 무척 존경스럽고 당찬 매력이 부러운 시인 이었다. 남자못지 않은 강인함은 거침없는 문장들을 통해서 섬세한 무기로 돌변하여 시적 언어로 단단하게 느껴졌다. 시인답지 않게 (일반 적인 것은 아니지만 여타의 시인과 비교하여) 예쁘고 화려한 미모는 당찬 자신감과 센스가 느껴졌다.

  김민정 시인을 검색해서 읽었던 뉴스 인터뷰의 제목은 내가 느꼈던 어떤 것과 아주 적합했다. ‘날 것의 언어로 ’엄숙‘을 조롱하는 시인 김민정’ 날 것의 언어는 강인한 돌직구와 솔직함을 겸비한 단어일 것이다.

  대체적으로 시들은 어느정도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가벼움을 유발한다. 가볍다고 느끼는 것도 읽는 독자들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무거워 보이는 내면 속에서 가벼운 어떤 것을 이끌어 낸다. 그러한 것들은 도리어 ‘적당한 무거움’을 유발한다. 계속 읽고 싶어지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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