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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lerie Lee May 06. 2022

Ep.2 역경의 시작  

적과의 동침

뉴욕의 파티는 1학년 새내기에게 제2의 전공처럼 느껴졌고, 파티 씬은 학교 밖 교실처럼 느껴졌다. 그래, 이게 바로 으른의 생활이구나! 나는 기숙사 친구들과 함께 세인트 마크스에 있는, 민증 검사 안 하는 술집을 찾아다니는 낙에 학교 생활을 이어갔다. 얼굴 만한 대접에 나오는 마가리타를 마시고, 누군가가 알아낸, 민증 검사를 하지 않는 파티장에 가는 메트로(지하철) 안에서는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1분간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폴 댄스를 추기도 했다. 우리는 길바닥에 누워보기도 하고 고성방가를 하는 등, 그 나이 때에만 애교로 지나갈 수 있는 추태들을 즐기며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나는 좀처럼 우리와 파티에 함께 하지 않는 내 룸메를 배려해서 나무늘보와 같은 슬로모션으로 기숙사 방에 들어와서 잘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때, 내 룸메였던 알렉스가 갑자기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배게를 내 팽개쳤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퀭한 눈으로 이제 막 잠에서 깬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우리 통금시간을 정하자"

긴 정적을 깨고 그녀가 말했다.

"뭐라고?"

"난 예민해서, 아주 작은 소리에도 잠이 깬단 말이야. 요 몇 주간 난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어"

난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더 주의해서 소리를 최대한 안 내보려고 노력할게. 그렇지만, 우리는 1학년이고 모두가 나가서 노는데 너 때문에 나만 빨리 돌아와야 하는 건 좀 불공평한 것 같다."


그렇게 우리의 실랑이는 계속되었다. 나는 내가 파티에 매일 나가는 것도 아니고, 주말에 나가는 것뿐이며 최선을 다해 소리가 나지 않도록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잠이 든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그녀는 끝끝내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렇게 소리를 지르며 복도로 향했다.


"밸러리! 널 죽여버릴 거야!!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난 널 증오해!!"

정말 호러영화에서나 볼법한 소동이었다.


"죽여버릴 거야"라는 고성을 들은 기숙사 친구들은 모두 경악했다. 이후 다행히도 기숙사에 빈 방이 하나 나와서 알렉스는 그곳으로 올라갔고, 나는 방을 혼자 쓰게 되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몇 주가 채 되지 않아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녀의 조우울증이 심각해져서였다고 한다. 알렉스는 내가 생전 처음으로 만난 "(조) 우울증 때문에 약을 먹는" 사람이었다.


뉴욕대학교의 자살률은 미국 대학교를 통틀어 1위였다. 원래는 날씨가 좋지 않은 코넬대가 1위였는데 내가 입학한 년도부터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알렉스가 고향으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고서 중간고사 시험 기간에는 누군가가 학교 도서관에서 자살을 했다. 봅스트 라는 학교 도서관 건물은 가운데가 뻥 뚫린 구조로 되어 있는 특이한 건물이었는데, 모두가 지나다니는 로비 한가운데로 몸을 날려 자살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일이 나와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내게도 충분히 비극적인 일이 생기기 전 까지는.


1학년 마지막 기말고사를 약 2주 앞둔 시점에 Y라는 친구가 전화가 왔다. 우리는 고등학교 때 모의유엔 회의를 통해 알게 된 사이였다. 그 친구는 워싱턴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곧 있으면 연세대 모의 유엔 동아리를 하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이 뉴욕에 온다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만날 때 나와 함께 만나고 싶다고 했다. 또 나와 같은 기숙사에 살고 있는 K라는 친구도 자신의 고등학교 친구라며, Y, K, 그리고 그 연세대 친구까지 함께 술 한잔 하자고 했다.


나는 흔쾌히 Y, K, 그리고 연세대 친구 - N와 함께 어떤 바에 가서 지난날의 회포도 풀고 추억도 회상하며 지냈다. 그 대화 도중 알게 된 사실은 N에게 내가 아픈 상처를 안겨주었다는 사실이었다.


N은 내가 의장으로 참여한 대회에서 결의안을 제출했는데, 그 결의안이 수준 미달이어서 내가 논의 선상에서 배제했다는 것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것은 나만의 결정이 아니었고, 의장단 모두의 결정을 내가 전달한 것뿐이었다. 그렇게 N와 나는 오해를 풀었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 내가 눈을 떴을 때, N은 옷을 다 벗은 채로 내 위에 올라와 있었고, 나도 옷을 반은 벗은 채로 N의 아래에 깔려있었다. 그리고 나는 또 기억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N은 온데간데없었다. 언뜻언뜻 스치는 기억은 굉장히 불미스러운 일들이었고, 첫 경험은커녕 첫 키스조차 해보지 못한 내게 그날 밤은 악몽이었다. 나는 곧장 학교 내 병원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삽입의 흔적은 없다고 했고, 나는 무사했다.


병원에서 나오는데, 갑자기 내 머릿속을 스쳐가는 기억이 있었다. 바로 N이 우리가 기숙사에서 만나 바로 떠나기 전 기숙사 카운터에서 콘돔을 챙기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Y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눈빛을 교환했던 그 기억. 나는 곧바로 Y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잘 모르겠어. 나는 분명히 네가 혼자서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K랑 함께 K의 방으로 가서 잤고, N도 그랬어."


끝까지 Y는 내게 어떤 위로의 말이나, N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분개하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이후로 소위 말하는 우울증과 공황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나를 우울하게 만든 것은 내 첫 키스와 첫 육체적 친밀감의 경험이 강제적인 겁탈로 이뤄졌다는 것뿐 아니라 믿었던 Y가 그토록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말들을 할 뿐이었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파티에 나가지 않았다. 술도 멀리했다. 남은 기말고사 준비 기간에 집중했을 뿐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또 도망이 설루션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정말 비이성적 이게도, "이 모든 게 내가 엔와유 밖에 못 와서. 내가 놀러 다니고 파티를 자주 다녀서 벌을 받는 것. 한마디로 이 모든 것은 내 탓이다"라고 생각했다.


도무지 방으로 들어가서 잠을 잘 엄두가 안 났던 나는 도서관 소파에서, 아예 짐을 싸들고 숙식까지 도서관에서 하고 있는 열혈 중국 유학생들 사이에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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