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길고 얇은 다리를 지닌 소녀가 선두로 운동장을 뛰고 있다. 뒤에는 2등, 3등이 이를 악 물고 선두를 노리고 있고 나마지 달리기를 포기한 아이들은 헉헉 대며 간신히 발걸음으로 올리고 있다.
"안돼! 쟤가 1등으로 들어오게 하지 마!"
선두로 뛰던 소녀는 잠시 주춤한다. 하지만 이내 좀비가 쫓아오는 것 마냥 더욱 세게 달리기 시작한다. 간절하고 처절하게.
10대 동안 나는 나를 향한 다른 이들의 미움을 엔진 삼아 도망 다녔다. 중학교 때는 캐나다로 조기 유학을 갔고, 이후에는 특목고로, 미국 명문대로 도망쳤다. 6년 동안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달린 결과, 나는 왕따 시키던 아이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명문대, 하버드에 합격했다!라고... 하면 좋겠지만, 대학도 고등학교 때 나를 주도적으로 싫어하던 아이와 함께 오게 되었다.
나의 드림스쿨과 거리가 멀었던 곳 뉴욕대학교. 캠퍼스도 제대로 없고, 캠퍼스 대신에 있는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는 대마 향기가 끊이지 않았다. 내 기숙사 방 옆에 있는 미남 흑인, Ali는 매일 밤 머라이어 캐리의 음악을 틀어댔지만 그녀의 고음도 Ali와 애인의 신음소리를 막지 못했다.
길가 신문 가판대의 아저씨가 당시 나눠줬던 신입생 티셔츠를 입고 지나가는 나를 보고 정겹게 한 마디 건냈다. "뉴욕대 신입생이구나! 축하해! 부모님이 자랑스러워 하시겠는걸?"
하지만 나는 아이비리그에는 싹 다 떨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어머니의 표정이 떠올라 우울해지기만 했다.
'전과목 A 받아서 아이비리그로 전학 가자. 조용한 캠퍼스가 있는 그런 곳.'
그렇게 또 한 번의 도망을 준비하던 나는 글 쓰기 수업의 과제를 하러 소호(SOHO)로 향했다. 그곳에는 잘 나가는 신진 디자이너의 옷들이 빛을 뿜어대는 쇼룸이 가득했다. 보그 매거진에서 막 걸어 나온 것 같은 멋쟁이 뉴요커들을 보니, 다들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Lucky Brand에 들어가서 갈색 카우보이 부츠를 신어보았다. 정말 어색하기 그지없어서 실망해 벗으려던 찰나...
"부츠 멋진데?" (Nice Boots!)
고개를 들어보니 훤칠한 키에 매서운 눈매와 콧날을 가진 금발 백인 여자가 내 부츠를 보고 있었다. 나는 수줍게 고맙다고 하고는, 부츠를 벗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굉장히 큰데? 너 모델이니?"
"고마워, 그런데 아니야."
"그래? 넌 모델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네 이름은 뭐니?"
"난 밸러리라고 해."
그녀는 자기 핸드폰을 꺼내더니 번호를 교환하자고 했다. 자신의 모델 친구들이 있는데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부드럽고 상냥한 카리스마에 휘말려 번호를 건넸다.
지루하고 외롭게 공부를 하고 있던 날, 폰이 울렸다.
[알렉산드라 - 메시지 1]
오늘 밤 친구들이랑 미트 패킹 디스트릭트 (Meatpacking district: 뉴욕에 핫한 클럽이 즐비한 거리) 클럽에서 파티를 하는데, 너도 꼭 와!! 모든 비용은 공짜고, 다만 예쁘게만 입고와. XO. (키스와 허그를 뜻하는 은어)
클럽. 파티. 뉴욕. 이 세 글자는 12년간 한국 교육에 절여진 범생이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기 충분했다. 봅스트 도서관에서 방금 나와 떡진 머리에 큰 장스 스포츠 배낭을 멘 채, 워싱턴 스퀘어 파크의 개선문을 지나 쭉 이어진 5번가의 밤거리를 누볐다. 완벽한 드레스를 찾고 싶었다. 이 장면이 영상으로 나온다면 테일러 스위프트의 “웰컴 투 뉴욕" 이 배경음악이 될 것이다.
나는 가장 멋진 드레스를 찾고 싶어서 5번가에 있는 거의 모든 샵들을 다 뒤졌다. 깊게 파진 브이넥에 까만색 태슬 장식이 달린 보라색 드레스를 골랐다. 드레스를 입고, 고데기로 머리를 말고 하이힐까지 신고 기숙사 방 문을 나가니, 아이들의 부러운 눈빛이 마치 카메라 플래시처럼 터졌다. 기숙사 밖에는 까만색 리무진이 서있다. 리무진의 문을 열자 폭죽이 터지듯 음악 소리가 퍼져 나왔고 안에는 알렉산드라와 흥에 취해 있는, 어리고 힙한 외국인 친구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내가 이들에게 환대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 이래도 되나?" 했지만, 일단 차에 탔다.
우리가 도착한 그곳은 분명 레스토랑보다는 아테네 신전에 가까웠다. 벽에는 폭포수가 내리고 있었으며, 넝쿨 식물로 벽과 천장이 꾸며져 있었고 오색 찬란한 레이저 빔 같은 것이 조명을 대신했다. 특히 자신들의 테이블 좌석에 올라가 관능적으로, 하지만 어딘가 어색한 폼으로 춤을 추고 있는 여자들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웨이터들은 끊임없이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주로 급식소에서 밥을 먹었던 나는 처음 먹어보는 꾸덕한 시금치 Dip(찍어먹는 소스)과 칩, 그 외에도 다채로운 고기와 파스타 요리 앞에 정신을 못 차리고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이게 다 무료라고?"
좀 이상했다. 하지만 옆 방의 신음 소리와 도로의 사이렌 소리, 비좁은 기숙사 방, 낯선 룸메이트, 부담되는 양의 숙제 등의 스트레스에 절어있던 나는 그 음식을 내어주는 의도 따위를 굳이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리무진을 타고 2차로 향했다. 클럽이었다. 클럽의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했던 것은 아직 신입생 나부랭이 밖에 안된 대다수의 NYU 친구들은 절대 개인의 힘으로 들어올 수 없어 보일 만큼 고급진 분위기의, 그렇지만 세련된 클럽이었다.
그곳에서도 우리는 따로 테이블이 있었고, 위스키, 와인, 샴페인 등이 무료로 주어졌다. 처음으로 나도 소파 위에 올라가서 샴페인 잔을 들고 춤을 추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수트를 빼입은 능력있는 남자들, 섹시하고 블링블링하게 빛나는 여자들. 온갖 인종의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춤을 추는 그곳은 적막하고 싸늘했던 고교 교실의 분위기와는 180도 달랐다.
‘어쩌면 바로 이게 6년간 도망친 보상이 아닐까?’
어쨌든 나를 왕따 시킨 아이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었다. 묘한 승리감 같은 게 들었다. 나는 샴페인을 들이켰다.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좋아해 주고 나와 마치 어제도 만난 친구처럼 대하는 외국인 모델들과 춤을 추었다. 춤추는 게 지치면,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대화도 나눴다. 비록 이곳에서는 모두 파티를 즐기는 짐승들 같았지만, 낮에는 책도 쓰며 모델 일도 하는 캐씨도 있었고 화학을 전공하며 모델일을 병행하는 남자 모델도 있었다. 우리는 모두 다른 곳에서 왔지만 그 날 만큼은 가족보다 더 친한 사람들처럼 서로를 껴안고 어깨동무를 하며 비트에 맞춰 몸을 흔들어댔다.
"넌 어디서 왔니? 한국? 아, 나도 연세대 교환 학생으로 가본 적 있는데..."
이 이야기를 벌써 세 번째 하고 있는 술에 절은 외국인 아저씨는 월스트리트에서 트레이더로 일한다고 했다. 말로만 듣던 월가의 사람! 영화에서나 보던 직업의 사람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신기했다.
"그 얘기 너무 많이 들었어요. 좀 다른 말로 들이대 보세요"
도도하게 말하는 나 자신 또한 기분 좋게 낯설었다.
뉴욕에서 첫 클럽 파티가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무엇보다 알렉산드라가 오늘 내게 했던 말이 귀에 자장가처럼 울렸다.
"뉴욕에서는 모두가 소속감이 없어. 그래서 소속감을 느끼지."
("No one belongs here in New York. That's why everyone belongs here.")
생각해보니 그랬다. 클럽에서 만난 이들은 모두 뉴욕에 살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고향에서 안락하게 정착할 수도 있었으나 기회의 도시 뉴욕으로 왔다. 더 큰 성공의 꿈을 안고서, 이곳에서 다시 한번 새로 태어나고자 하는 이들이었다.
작가의 말: 현재 두가지 버전으로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아직 글이 부족하다보니 어떤 형식이 더 재미있을지 몰라서 에피소드 중심의 글은 [EP.#]로, 에세이 형식은 [X막X장] 이렇게 연재 중인데, 어떤 버전을 더 선호하시는지 알려주시면 글 쓰는데에 많은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