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법칙#1 : 모든 영화의 첫 10분 안에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동안 관객은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한다.
"아, 너무 싫어."
Val 은 플랫아이언(Flatiron) 디스트릭트의 한 브런치 카페에서 플라토의 시학을 호기롭게 펼치고는 5분도 되지 않아서 닫아버린다.
"캐릭터(인물)는 곧 그의 캐릭터(성격)이고, 그 성격에 따라 그의 운명이 쓰인다.
고로 캐릭터는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다..." 라고 플라톤의 "시학"에 쓰여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작 나 밖에 안되는 이유가 내가 "나"이기 때문이라니!
더 싫었던건 나의 시트콤에도 나도 몰랐던 나의 무의식이 투영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영화 법칙 #2 : 주인공은 항상 단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다.
2017년 말 3000불 정도를 들여서 찍은 시트콤 파일럿의 주인공은 "Joo"다.
한국 유학생으로,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패션 인풀루언서 처럼 자신이 실제로 가질 수 없는 것들(우정, 비싼 옷 등)을 실제로 가진 척하면서 자신의 이복동생보다 더 많은 팔로워를 가진 인풀루언서로 거듭나 아버지의 패션 매거진 사업을 물려받고자 하는 야망을 가진 인물이다.
내가 찍었던 시트콤 파일럿에서 그녀는 자신이 고용한 포토그래퍼에게 이렇게 털어놓는다.
"타고나기를 비호감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있어. 장미꽃은 장미꽃으로 태어나고 잡초는 잡초로 태어난 것처럼 말이야. 나도 노력해 봤어. 사람들이 날 좋아하게끔. 그렇지만 나는 그냥 타고나기를 이렇게 태어난걸 뭐 어쩌겠어".
Joo만큼 친구가 없는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27살의 내가 아직도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identity)을 "왕따", "소외받고 오해받는 사람"을 바탕으로 두고 있었다는 점은 자명했다.
나는 왕따 경험의 여파로 인해 인간관계에 있어서 늘 최악의 사태를 고려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잘 놀다가 헤어지고 집에 돌아오면 그 친구가 나를 뒷담 하는 상상을 하고, 상상 속에서 절연까지 하면서 잠에 들어야 속이 편했다. 그렇게 상처받을 것을 대비하고 나서야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Joo 가 사진을 받기 위해서 자신의 치부를 털어놓는 장면10대의 나는 늘 누군가로부터 도망쳤었다. 중학교 때 처음 왕따를 경험하고 나서는 특목고로 도망을 쳐야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쫓아오지 않을 것 같았고, 그 이후에는 미국 명문대로 도망을 치면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쫓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를 싫어하던 사람 중 유독 신경이 쓰였던 사람은 결국 같은 대학교까지 진학했다.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가 압구정의 어느 술집에서 열렸는데 그곳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처음으로 공황 장애를 경험했다. 그때는 그게 공황인 줄 도 몰랐다.
1학년 성적을 잘 받아서 아이비리그로 전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왜 더 열심히 하지 못해서 NYU 밖에 오지 못했을까 라는 자책도 함께 뒤따랐다. 그래서 Joo는 뉴욕대학교에 합격했지만 컬럼비아 대학교에 다니는 그녀의 동생 Jessica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뉴욕에서 처음 머물렀던 곳은 Goddard 기숙사였는데, 시에서 가장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의 커피를 파는 스타벅스 지점의 위층에 자리했다. 가끔씩 재즈 밴드가 그 스타벅스에서 공연을 하는 일요일에는 재즈 음악의 진동소리에 잠이 깼다. 내 기숙사 옆방에는 Ali라는 흑인 친구가 살았는데 그 친구는 내가 봐도 잘생겼지만, 그만큼 애인이 많아서 밤이면 밤마다 신음소리가 났다. 뉴욕대가 아닌 정말 진정한 명문대에 가면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 나는 서서히 뉴욕의 매력에 대해서 알아가고 있었다.
나는 키가 크고, 말랐(었)으며, 동양적인 얼굴을 지녔기에 그 점이 미국에서는 외모적 장점으로 작용했다.
뉴욕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교양 과목 중 하나로 수강했던 라이팅 클래스 교수님의 과제를 하러 소호로 넘어갔다. 카우보이 패션을 파는 샵에 들어가서 부츠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금발의 생머리에 코와 눈이 매서운 젊은 백인 여자가 다가와서 내가 신어보고 있는 부츠가 예쁘다며 한 마디 건넸다. 이후에 Betsey Johnson의 샵에서 또 마주쳤다. 나에게 모델이냐고 물었다. 나는 수줍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그 아이는 내게 "You should be a model(넌 모델을 해야만 해)"이라고 말하고는 내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나는 그 친절한 아이에게 전화번호를 주었고, 그 아이는 내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클럽에서 파티를 하는데, 모든 비용은 공짜야. 넌 오기만 하면 돼!
다만 옷은 예쁘게 입고와!
클럽. 파티. 뉴욕.
이 세 글자는 모든 19살의 마음을 뛰게 하기 충분했다.
나는 그 전날 5th Avenue로 향했고, French Connection에서 보라색에 깊게 파진 브이넥에, 까만색 테슬 장식과 스팽글이 어우러진 드레스를 샀다. 드레스를 입고 기숙사 앞에 기다리니 까만색 리무진이 도착했고, 그 안에는 나처럼 어리고 마른 친구들과 소호에서 만난 친구 - 알렉산드라가 있었다.
우리는 곧장 meatpacking distrcit라는, 클럽이 즐비한 곳으로 향했고 그 근처에 있는 어떤 식당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그곳은 완전한 식당이라기보다는 라운지 클럽에 가까웠다. 멋있는 양복을 차려입은 백인 남성들, 드라마에서 볼 것 같은 멋진 드레스를 입은 외국인 여성들, 벽에는 폭포수 장식, 천장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있었다. 소파 부스 같이 생긴 곳 위에 하이힐을 신고 올라가서 춤을 추는 여자들이 있었고 나는 바로 그 여자들 사이로 들어갔다. 음식이 차려져 있었는데 시금치 라자냐, 감자튀김 같은 것들이 있었고 나는 그 음식들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
그 후로도 알렉산드라, 그리고 모델 캐스팅 에이전트 겸 클럽에 여자들을 데려가 주는 "스카우트" 역할의 마이크와 자주 만났다. 마이크도 꽤나 잘생긴 청년으로 스스로 젊었을 때 모델일을 했다. 그는 모델들의 합숙소에서 같이 살았었는데 2층 침대가 즐비한 뉴욕의 아파트가 모델들의 숙소였다. 마치 한국 아이돌 연습생들의 숙소와 같았다.
다행히 적어도 나에게는 클럽 파티에서 "나쁜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늘 맛있는 음식이 있었으며 끝나고 다정다감한 외국인 친구들과 보통 대학생들은 잘 들어가지 못하는 비싼 클럽에 들어갈 수 있었다. 기숙사 방을 나갈 때면 가끔 복도에서 기숙사 친구들이 나를 부러운 눈으로 보았고, 내 나름대로 그런 시선을 즐겼던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은 부다칸이라는 레스토랑에서 있었는데, 그때 마이크가 처음으로 친구를 데려오고 싶으면 데려와도 된다고 말했었다. Faye라는 흑인 친구는 나처럼 키가 크고 말랐던 흑인 친구였다. 그 친구를 데리고 나는 부다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알렉산드라와 그녀의 다른 모델 친구들이 있었고, 굉장히 긴 대리석 테이블 가운데에는 대머리 아저씨가 한 명 앉아 계셨다. 브라이언은 그 아저씨와 예기를 나누더니 메뉴판에 있는 모든 음식을 시켰다.
나는 이런 커넥션 덕분인지 뭔지, 계속 이런저런 에이전시에서 모델 제의를 받았다. 길을 가다가도 명함을 받았다. 덕분에 외모적인 자신감도 많이 상승했다. 그렇게 나는 표면적으로라도 나를 좀 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명품을 휘감지는 않았지만, 자라나 포에버 21 같은 곳에서 적절한 옷을 골라서 스타일링했고 2학년 때는 영국 재벌 친구가 내 옷에 관한 정보를 물어보기도 했다.
(확실히 영국 재벌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험 공부 삼아 같은 수업을 듣는 친구끼리 그 친구의 "자취방" 에 갔었는데...크고 아주 긴- 대리석 테이블 같은게 있었고, 100인치는 되어보이는 거대한 티비와, 멋진 그림들이 걸려 있는 아파트였다. 심지어 그 아파트의 위치는 브로드웨이 한복판 - 그러니까 빅토리아시크릿이 크게 들어있는 빌딩 근처였다. 당시 나는 정말 작은 방에 룸메와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친구는 적어도 "재벌" 은 되는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는것 같다.)
당시 그런 내 모습 때문인지, 나에게 다가오던 친구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진짜 나를 알고 실망할것 같다는 생각에 오히려 그들을 소외시켰다. 가깝게 사귄 친구들은 친해졌다가도 자연스럽게 멀어지거나 다툼으로 사이가 깨지기도 했다. 이게 모두 "내가 왕따를 당했어야 마땅한 비호감 인물이었기 때문에"라고 생각했다. 마치 Joo 가 그랬듯.
그렇게 20대때 나는 이제 누군가로부터가 아니라, 내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여정을 떠나기 시작한다.
작가의 말: 현재 두가지 버전으로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에피소드 중심의 글은 [EP.#]로, 에세이 형식은 [X막X장] 이렇게 연재 중인데, 어떤 버전을 더 선호하시는지 알려주시면 글 쓰는데에 많은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