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1): 모험의 시작 - 글감이 넘치는 뉴욕 생활

자유로운 영혼들, 개츠비 아저씨, 그리고 빌런 룸메들

by Valerie Lee

영화 법칙 #3: 주인공이 모험을 떠나면 자연스럽게 그를 둘러싼 환경이 바뀐다.


1. 자유롭거나 이상해진 나


날씨는 포근했지만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떻게든 비에 조금 덜 젖어보려 구차하게 박스를 쓰거나, 휘날리는 비바람에 휘청거리는 우산대와 씨름하는 이들과는 다르게, 나는 유유히 산들바람을 즐기는 사람처럼 우산 없이 여유롭게 길을 걸었다.

비 따위가 뭐라고 여태까지 맞지 않으려 애썼던 걸까? .


반스 앤 노블스를 지나면서는 아예 발레 점프로 거리를 뛰기 시작했다. 폴짝폴짝. 턴도 돌았다. 우산을 쓰고 장화를 신고, 입었던 옷이 흠뻑 젖은 채로 기숙사에 도착했더니 스위트 메이트 들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기는커녕 "Looks like you had a great day!" (너 오늘 하루 정말 잘 보냈나 보구나!) 라며 나의 이상한 행색을 기분 좋게 수용해주었다.


이전의 나는 나와 같은 특목고 출신에 스턴 비즈니스 스쿨에서 금융을 전공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 하지만 그 친구들이 대부분 나의 영화과 전과를 "철이 없다"라는 말로 반대했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들이 내 행색을 보았더라면 과연 그렇게 해주었을지 의문이다.


내가 진정한 나의 꿈을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이들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2. 바뀌는 주위 사람들


내가 자유로워진 만큼, 자유로운 예술인의 혼을 가진 이들이 자연스럽게 끌려왔다. 대표적으로 나의 룸메이트였던 Jay가 있다. Jay는 흑인과 백인의 혼혈로, 어메이징 한 음색을 가진 뮤지컬 전공생이었다.


그녀는 정말 연습이 끝난 후 땀범벅이 되고 나서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리고 스위트에서 파티를 열 때면 비욘세의 음악에 맞춰 비욘세로 빙의를 했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그녀와 대화를 나눌 때면 정말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룸메이트 Jay의 현란한 댄스


또한 당시 같이 영화과 전과를 했던 두 살 많은 유학생 오빠가 있었는데, 그 오빠는 내가 생전 처음 한국인에게 들어보는 말을 했다.


"야, A 맞아서 좋은 감독되냐? 그냥 살아. 자유롭게."


예전 같으면 경제학을 선택 과목으로 수강했겠지만, 즉흥 현대무용 수업을 선택과목으로 선택했다. 우리는 허드슨 강 앞에서 파트너와 짠 안무를 가지고 공연을 하는 것으로 중간고사를 치뤘다.


수업시간에는 음악을 틀어놓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서로와 춤으로 교감하며 움직였는데, 나는 그때 여러 사람들을 연결하려는 동작을 많이 취했었다. 여러 사람을 데리고 원을 만든다던가, 여러 사람과 포옹을 하는 동작이라던가...


그때 나는 내 배타적인 성격의 이면엔 많은 이들과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3. 개츠비 아저씨


콜럼버스 서클 역 부근에는 "엘빈 에일리에"라는 유명한 발레 학원/학교가 있다. 그 학원에서 발레 클래스를 듣고 지하철 역으로 가던 도중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유난히 아름다운 파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근처의 나무들도 가을이 되면서 단풍 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예술가 버전의 나는 그런 일상의 소소한 아름다움마저 미친(?) 사람처럼 흡수하려고 했기 때문에 고개를 두리번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 처음 온 사람처럼.


"넌 어디서 왔니?"

고개를 쳐들고 있는 내게 갑자기 누군가가 물었다.

고개를 내려보니 어떤 푸근한 인상의 흑인 아저씨가 있었다.


"서울에서 왔어요. 한국이요."

"아, 그래? 너 길을 잃은 것 같은데, 어디로 가려고 하니? 내가 도와줄게."

"저 여기서 산지 이제 4년이 돼가요.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지하철로 가니?"

"네."

"그럼 같이 좀 걸을래?"


아버지 뻘 되는 아저씨가 나에게 같이 동행하자고 했는데 푸근하고 안전한 그의 분위기에 제의를 수락했다.


"그럼 뉴욕대에서 뭘 공부하고 있니?"

"저 영화 연출이요."

"그래? 영화인으로 성공하려면 게이트키퍼 (Gatekeeper : 문지기, 또는 어떤 분야의 인싸가 되는 길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는 사람을 뜻함.)와 친해져야 해. 파티도 많이 다녀야 하고, 알아두면 좋은 사람들을 알아둬야 해. 그들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이 같은 현실적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은 내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아저씨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졌다.


Screen Shot 2022-01-27 at 3.06.35 AM.png Colombus Circle, NYC


어느새 우리는 콜럼버스 서클 역 근처 스타벅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사람들은 날 개츠비라고 불러."

"개츠비요? The Great Gatsby(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요?"

"맞아."

"왜죠?"

"점차 알게 될 거야."


아저씨는 자기가 사라 포바 (테니스 선수)와 친구며, 앤 해서웨이의 에이전트와도 친한 친구라고 말했다. 그리고 성공한 한국계 미국인 영화인 친구도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자신이 유명한 사람과 친구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실속 없는지 알지만 그때는 이런 어른을 만난 것이 처음이었다.


개츠비는 이번 주 주말에 열리는 MOMA 오프닝 파티에 나를 파트너로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그때서야 나는 약간의 경계심이 생겼다. 그때서 그 아저씨의 쇼핑백이 눈에 띄었는데 세포라(Sephora: 여성 화장품 전문 쇼핑몰)였다. 그래서 그건 뭐냐고 물었다.


"아 이거? 친구 선물이야."

갑자기 개츠비의 벨소리가 울렸다.


"잠시만. 이것 좀 받고. 아, 응응. 미안 오늘은 지금 내가 급한 일이 생겨서 못 갈 것 같아."

"급한일이요? 이제 가셔야겠네요?"

"아, 급한 일 있지. 널 만났지."

"어? 그럼 제가 그 급한 일... 그럼 저 때문에 약속을 취소하신 거예요?"

"응 뭐 그럴 수도 있지. 이게 그 친구 줄 선물이었어 사실."

"아 정말요."


나는 그때부터 쎄-함을 느꼈고 서둘러 대화를 끝내고 집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돌직구를 던지기로 했다.


"내게 원하는 게 뭐죠? 잠자리를 원하는 건가요?"


그는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이렇게 말했다.


"아니, 나는 잠자리 파트너는 많아. 똑똑한 친구들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해. 지난주에는 한국에 카이스트 졸업하고 여기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한국인 여자아이와 센트럴파크 호수에서 배를 타고 놀았어."


그 대답에 나는 뭐라고 대꾸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는 끈질기게 내 번호를 물었고 나는 어차피 연락이 오면 무시할 요량으로 번호를 주었다.

바로 받은 번호로 전화를 걸어볼 것이라 생각했기에 틀린 번호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내 예상은 엇나가지 않았다.


그 이후 계속해서 나에게 연락을 했고, 그 연락을 보면서 나는 솔직히 가도 내가 손해 볼 것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최대한 단정한 차림으로 파티에 도착했다.


개츠비는 쇼핑백을 들고 나를 맞이했다. Macy's 백화점에서 산 드레스 같은 것이 들어있었고, 나는 괜찮다며 - 너무 옷이 많아 둘 곳도 없다며 거절했다. 그날 밤은 Isa Genzken이라는 작가의 오프닝 파티 같았다. 뭔가 중요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고, 개츠비 아저씨의 "친구" 들로 온 다른 어린 여자 아이들도 있었다. 다들 내 또래 같았다.


개츠비 아저씨가 나를 한국계 미국인 영화인 (나름대로 성공한) 친구에게 소개해줬고, 나는 공손하게 인사했다. 하지만 나는 대체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여자아이들은 신나게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지만 나는 마치 길을 잃은 고양이 같이 느껴져서 일찍 집에 왔다.


이후에 영화인 친구가 나를 자신의 스키 하우스에 초대해서 함께 지인들과 저녁을 보내자고 했지만, 나는 그들 사이에서 더욱더 외로울 것 같아서 초대를 거절했다.


만약 내가 철이 들었던 상태였다면, 그런 사람들과 인맥을 형성했었더라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Screen Shot 2022-01-27 at 5.24.42 PM.png Isa Genzken 2013 MOMA (출처: 구글 검색)


어쨌든 몇 번의 거절 이후로 개츠비 아저씨는 더 이상 내게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졸업을 하고 시간이 흘러 뉴욕에 다시 갔을 때, 2017년쯤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코리아타운 길가에서.


이번에는 내가 그 아저씨를 불러 세웠다. 사실 그 아저씨를 너무 자주 길가에서 마주쳤기 때문이기도 했다.


"개츠비 아저씨 맞죠?"

"어? 어.. 우리가 만난 적 있었던가? 어? 기억이 나는 것도 같고.."


나는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쓸쓸한 상태였고 그 아저씨가 풍기는 그 묘한 편안한 분위기의 대화가 필요했던 것 같다.


아저씨 또한 외롭게 지낸다고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들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여자들은 자신을 좋아하고. 나이가 50은 족히 넘어 보이는 아저씨, 이제 60을 바라보는 나이에서 이런 고민을 하고 계시다니...


혹시 아저씨가 좋아하는 여자는 몇 살이냐고 물어보았다. 20대라고 했다.


지금도 나는 그 아저씨를 가끔 떠올린다.


Barclays라는 은행의 부사장이었던 흑인 아저씨. 개츠비.

청춘의 에너지는 오로지 출세에 다 쏟은 채 자신의 데이지를 찾는 아저씨.


자신을 거부하지 못할, 외로움과 공허함 그리고 방향성 상실에 찌든 동양인 유학생 여자들에게 뉴욕 상류사회의 맛을 보여주며 사랑을 몰래 갈구하던 아저씨.


만약 내가 시트콤을 쓰게 된다면 이런 캐릭터를 한 명 꼭 넣고 싶다고 다짐만 한채, 나는 그 아저씨를 이렇게 또 추억한다.


뉴욕은 확실히 저마다의 방식으로 외롭고 기이한 사람들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기이하고 외로운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사는 곳이다.


4. 빌런 룸메들


빌런 룸메 A는 유펜 와튼스쿨에서 뉴욕대에 여름 클래스를 듣기 위해 잠시 기숙사에 머물렀다. 나도 영화과로 전과를 하면서 여름 방학을 이용해 학점을 수강해야 했어서 그녀와 잠시 살았다. 그녀는 인도계 미국인으로, 그녀의 꾸밈새만 보아도 전통적인 인도 가정이 아닌, 이미 어느 정도 미국 주류사회에 자리를 잡은 인도계 미국 집안의 자제 같았다.


엄청난 깍쟁이 일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어느 날 그녀가 방 한가운데에 요가매트를 깔아놓고 절대 이 요가 매트를 넘어서 오지는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왜냐고 물어봤다.


"이 방의 반은 내거고, 이 쪽으로 네가 넘어오지 않았으면 해.

어느 순간부터 네 갈색 머리가 여기에 굴러다니고 있더라고."


솔직히 안 넘어가는 건 상관이 없었지만, 너무나 무례하고 재수 없는 그녀의 태도에 나는 이대로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좋아. 그럼 너도 절대 이 요가매트를 넘어서 와서는 안돼. 그런데 우리 방 출입구가 내 쪽에 있네?

넌 이제 화장실도 못 가겠다."


어안이 벙벙해진 그녀가 씩씩 거리며 방문을 나가려고 했다.

"어? 너 금 넘었어. 다시 돌아가."

그녀는 나를 매섭게 째려봤다.

나는 질세라 요가 매트를 발로 치워버렸다.


그렇게 우리의 기싸움은 끝났다.


빌런 룸메 B는 중국계 미국인으로 스턴 비즈니스 스쿨에 재학 중이었다. 나는 쪽지 시험이나 과제 대신 학기 말 정도에 영화 한 편만 잘 찍으면 되고 그 중간의 교양과목은 다 끝내 놓았기 때문에 스턴 학생들보다는 평소에 누리는 자유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빌런 B의 눈에는 내가 맨날 쇼핑만 다니고 파티나 참석하는 파티걸로 보였을 수 있다. (억울한 건 더 이상 나는 1학년 때처럼 파티에 자주 나가지도 않았고, 모마 오프닝 파티에 간 것이 다 였다. 쇼핑도 주로 SPA 브랜드에서 했다. 심지어 나는 시험 때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내 룸메들이 너처럼 열공하는 애는 처음 본다고도 증언했다!) 한마디로 한국에서 돈 많은 집 유학생이 한량처럼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나는 돈 많은 유학생 축에도 못 꼈다.)


그날도 나는 쇼핑백을 들고 스위트로 향했다.

갑자기 빌런 B가 뜬금없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제까지 너네 부모님이 너한테 돈을 줄 거라고 생각하니? 철 좀 들어."


정말 터무니없는 공격이었다.

목소리와 말투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우월감과 나를 한심하고 경멸스럽다고 생각하는 게 보였다.


그녀가 나에게 그렇게 쏘아붙이자마자 나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서 자라서 미국 대학 왔지? 난 한국에서 네가 한 공부 두 배 해서 여기 왔어. 네가 뭔데 날 무시해?"


쿨하게 말했으면 멋있었겠지만,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지질하게 위의 대사를 뱉었다.

내 인생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평소에 교류도 없던 그 애의 넓은 이마에 침이라도 뱉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


Screen Shot 2022-01-27 at 5.30.02 PM.png 당시 내가 기숙사에 들고 온 쇼핑백 (출처:구글 검색)


지금은 오죽 공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경제적으로 힘든 대학생활을 했었으면 나 정도의 유학생이 부러워서 그런 말을 했을까 싶다. 그렇지만 난 그때까지만 해도 남들이 내가 그들에게 잘 못 한 것이 없어도 내 존재 자체로 나를 싫어하는 것이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란 걸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난 모두가 날 좋아하길 원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날도 나는 이것도 언젠가 글감이 되겠지, 하고 넘겼다.

사실 이 글에 적은 "빌런" 들도 표현만 빌런이지, 그냥 귀엽고 미숙한 어린 친구들일 뿐이니까.


혹시 사소한 인간관계에 상처받고 있다면, 그 상황을 시트콤의 일화로 바라보면 어떨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내 인생의 관객이 된 것처럼 상황을 바라본다면 상처받아서 아파하는 나 자신마저도 귀엽고 웃기게 느껴질 것이다. 이런 에피소드를 겪는 동안 나는 점점 올 A를 받고 유수의 회사에서 인턴쉽을 따내야만 하는 경쟁 모드 멘털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영화과에 전과를 한 후 세상은 더 이상 경쟁을 위한 운동장이 아닌, 내 글감이 도처에 널려 있는 흥미롭고 재미있는 곳처럼 보였다.



작가의 말: 현재 두가지 버전으로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에피소드 중심의 글은 [EP.#]로, 에세이 형식은 [X막X장] 이렇게 연재 중인데, 어떤 버전을 더 선호하시는지 알려주시면 글 쓰는데에 많은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