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웡카의 꿈 이론

by 가담



검은 롱패딩에 이어
흰색 패딩이 인기를 끌 무렵
엄청난 고민에 빠졌었다.


살 것이냐, 말 것이냐.


어두운색보다는 밝은 계열을 좋아하는지라
그리 어려운 고민거리는 아니었지만,
선뜻 마음을 따라가기에는
머리에서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과연 내가 이 순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세상에는 새하얗던 것들이 참 많다.
말티즈 말랑이의 곱슬곱슬한 털,
설렘으로 가득한 함박눈,
종이 위에 덧칠한 흰 색연필이 그렇다.


비가 오고 난 후의 산책길은
걷기 시작한 지 5분도 채 안 돼
말랑이에게 거뭇한 양말을 선물하고,
온 세상을 밝히던 하얀 눈은
여러 발 도장에 의해 점차
고등어 등껍질 같은 회색빛으로 변한다.
하얀 색연필의 영역을
파랑과 검정같이 짙은 색상이
슬쩍 침범하기라도 하면
탁해지거나 힘없이 잡아먹혀 버린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고민 끝에 산 나의 첫 흰 패딩도
소매와 등짝에 알 수 없는 얼룩이 생겼다.


하얀색에 대한 대안이 필요했다.
순수한 하양보다는
약간의 누리끼리함이 더해진
베이지 계열에 눈을 돌린다든지,
혹은 아예 어두운색을 골라버린다.
그러면 새빨간 떡볶이를 먹는다 한들
조금은 안심하며 젓가락질을 할 수 있으니까.


지금껏 가져본 것 중에
가장 눈부실 정도로 하얬던 건
아마도 어린 시절에 꿨던 꿈일 것이다.
어떠한 의도도 없는 그저 순수한 바람,
마치 초콜릿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최고의 달콤함을 만들어보겠다고
다짐했던 어린 웡카의 꿈처럼.


영화 웡카의 주인공인 윌리 웡카는
부자들의 놀이터인 달콤 백화점에
초콜릿 가게를 열고 싶어 하지만,
돈과는 거리가 먼 현실에
금방이라도 포기할 것 같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이때 웡카 엄마의 한마디,
"좋은 일은 모두 꿈에서 시작됐단다.
그러니 꿈을 잃지마"


이제 막 부풀어 오른 꿈은
하얀 도화지 같아서
마음먹는 대로 뭐든 그려 넣을 수 있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과
당장이라도 시작하고 싶은 의욕으로
가득 채우다가도,
의도치 않게 튄 먹물로
온통 물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네가 할 수 있겠어?"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봐 준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러한 시선들이 모여 주춤하게 만든다.
그 무엇보다 가장 짙은 얼룩을 남기는 건
나 자신을 한계 짓는 말이다.
그간 바랬던 꿈이
더 이상 도드라져 보이지 않도록
현실에 대응하는
적절한 보호색을 찾기 바빠진다.


웡카의 친구들이 웡카에게
초콜릿을 팔 수 있는 허름한 공간을
선물하는 장면이 나온다.
보잘것없는 곳이라 미안하다는 친구의 말에,
오히려 웡카는 잠재력이
가득하다며 활짝 웃는다.


웡카에게서 꿈에 대한 정의를 다시 배운다.


샴푸질로 말랑이의 네 발이 더욱 뽀송해지길,
다시 한번 눈이 펑펑 내리기를,
서로 다른 색이 만나
지금껏 없던 오묘한 색감을 만들어내길.
현실에서 마주한 여러 얼룩을
기대와 기회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웡카가 말하는 꿈이라는 걸지도 모르겠다.


본격적으로 꿈을 꾸기에 앞서
얼룩이 묻을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얼룩이 묻으면 세탁하거나,
여차하면 더 근사한 걸로 장만하는
발판으로 삼으면 되니까.
나를 보호하기 위해 치장했던
타협과 합리화의 말을 걷어내니
작지만 분명하게 있는
어떠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웡카의 엄마가 말한
좋은 일이라는 걸 만날 수도 있을 거 같다.


떡볶이를 먹을 때 조심하긴 해야겠지만,
부담을 한결 내려놓은 채
순백의 미를 마음껏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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