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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으면 선명해지는

by 가담



지하철이나 버스로 장거리를 이동할 때
툭하면 손바닥만 한 사각형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게 일상이다.
짤막한 영상을 여러 개 보기도 하고,
긴 호흡으로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새 도착이다.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간혹 엉뚱한 곳에 다다를 때도 있다.
네모난 우주에 편협적인
집중력을 발휘한 나머지
저항할 새도 없이 목적지를 지나쳐버린다.
무중력에 의해 몸이 두둥실 떠다닌다 할만치
고요하게 느껴지는 공간 속에서
안내 방송을 듣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번은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맞은편에 걸려있는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핸드폰만 보는 당신!
가끔은 주변을 살펴보세요.'


지난주에 북촌에 있는 전시회에 다녀왔다.
전시의 제목은 '어둠속의 대화'.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오로지 대화만으로
가득 채우는 체험형 전시다.


6명에서 한 팀을 이뤘다.
함께 간 민이를 제외한 4명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다.
얼굴도 나이도 아는 게 하나 없는,
완벽하게 낯선 이들과 낯선 공간에서
100분이라는 시간을
꼼짝없이 함께 보내야 한다.


유일하게 이 공간이 익숙한
로드 마스터님의 안내에 따라
발을 아주 조금씩 디뎠다.
공기의 냄새를 한 움큼 맡아보고
작은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며,
분명한 형체로 존재하는 무언가를
손끝을 통해 예측해 본다.


벽돌일까?
나뭇잎 같은데?
고무장갑이 아닐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시간 감각도 자연스레 무뎌진다.
어느덧 100분이 흐르고,
전시장을 나서자마자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질문.
'당신은 어둠 속에서 무엇을 봤나요?'


전시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
장장 한 시간 반을 가야 하는
일종의 기차 여행 시작이다.
평소였다면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겠지만,
이번만큼은 핸드폰을 손에 꽉 쥔 채
눈을 감고 주위를 보는데 집중했다.


또각. 또각. 구두 소리,
덩어리진듯한 둔탁한 발소리,
웅성거리는 사람들,
철로를 따라 달리는 덜컹거림,
그리고 옆에 곤히 잠든 민이의
체온에서 느껴지는 부피감과
은은한 섬유 유연제 냄새까지.


귓바퀴를 타고 들어와 뚜렷하게 보이는
역내 방송에 눈을 떴다.
암흑을 통해 펼쳐진 세계와 이질감 없이
맞아떨어지는 풍경이 제일 먼저 반겨준다.
아니, 어쩌면 눈에 비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봤을지도 모르겠다.


어둠 속에서 무엇을 봤냐는 전시회의 질문에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
그 이상의 것'이라고 답하고 싶어졌다.
분명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은 전혀 없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와
제자리걸음인듯한 좁은 보폭으로
함께 헤쳐 나갔던 어둠 속 공간은
어떠한 편견도 묻어있지 않은
입체적이고도 알록달록한 세상이었으니.


어두컴컴한 방바닥에 누워
밤을 지새우며 나눴던 대화가
그토록 진솔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세월이 흘러도 선명한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다.


주변을 살펴보고 싶을 때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것도
꽤나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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