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잘 쓴다고 작사를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작곡보다는 작사가 더 접근하기 쉽고, 그래서 일반인들 중에도 작사에 대해서는 비교적 쉽게 접근하고 시도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평소에 글 쓰는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통 자신도 작사를 해본다면 잘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쉽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작곡/작사/편곡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일반인들이 작사를 해보았다며 평가를 요청하거나 자신의 작사에 곡을 붙여줄 작곡가를 찾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싱어송라이터가 작사를 먼저 하고 거기에 맞춰 스스로 노래를 만드는 경우는 있을 수 있어도 프로 작곡가가 기존에 있던 가사에 맞춰 작곡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프로 작곡가는 단순히 감성과 아이디어만으로 곡을 쓰지 않는다. 어떤 가수에게 매칭될 곡을 쓸 것인지를 먼저 정하고, 해당 가수와 스타일이 맞으면서도 기존과는 다른 약간 신선한 컨셉이나 아이디어가 있어야 하고, 최근 장르나 사운드의 새로운 트렌드를 반영해야 하는 등 장르와 컨셉을 먼저 결정한 후 트렉(반주)을 만들고 거기에 멜로디를 작곡한다. 이렇게 노래가 완성이 되면 그 이후에 가사를 만들게 된다.
현대 대중가요는 리듬이 가장 중요하다. 발라드가 아닌 이상 그루브가 느껴지지 않는 노래는 절대 히트곡이 될 수 없으며, 이로인해 트렉의 비트를 찍을 때부터 멜로디를 만들 때까지 리듬에 대한 치밀한 계산아래 작곡을 하게 된다. 이 작업은 무척 치밀한 계산 아래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 두개의 노트를 마음대로 빼거나 붙일 수 없다. 노트 하나가 추가 되거나, 어떤 박자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노래가 그루브가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트 하나를 결정하기 위해 수 십번, 수 백번을 반복해가며 듣고 수정하는 경우가 많다. 작곡이 이렇게 치밀하게 리듬을 계산하며 이루어 지기 때문에 가사가 먼저 있는 상태로 작곡을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프로세스이다. ('김이나의 작사법' 책에도 동일한 내용이 설명되어 있다. 현재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작사가 중 한 명인 김이나 역시도 작곡가가 만든 멜로디의 노트 한 두개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멜로디 음의 리듬이 살짝 틀어지는 순간 곡의 그루브가 다 무너져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왜 작곡이 먼저 이루어지고 나서 작사가 마지막 단계로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면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프로 작사가가 작사를 할 때 필수적으로 반영되어야 하는 요소들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1. 노래의 감정선과 분위기, 컨셉과 조화가 되어야 하며, 그 노래의 가수와도 잘 어울려야 한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일반적으로 하나의 곡이 나오기까지의 프로세스는 먼저 해당 가수의 새 앨범 컨셉이 정해지고 그 컨셉에 맞춰 작곡가가 트렉을 만든다. 이후에 트렉 작곡가와 탑라이너(멜로디 메이커) 여러 명이 달라붙어 멜로디를 만들고, 그렇게 나온 멜로디 중 가장 좋은 멜로디만 부분별로 뽑아 조합을 하여 하나의 곡이 완성된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작사가에게 의뢰가 간다. 따라서 작사가는 자신에게 곡이 오기까지 그 전단계에서 이루어졌던 가수의 컨셉 선정, 노래의 주제와 감정, 멜로디 특성을 분석하여 거기에 맞는 가사를 붙여야 한다.
작사가에게 가사를 의뢰 할 때 이러한 기본적인 컨셉과 주제 등의 가이드도 같이 전달된다. 그리고 아무리 가사 내용이 좋다한들, 가수와 어울리지 않거나 컨셉과 안맞거나 멜로디의 감정선과 따로 놀게 되면 절대 채택될 수가 없다. 건축사가 건물을 설계할 때 기존에 정해진 땅의 크기와 모양, 건물의 용도, 층의 높이, 예산과 기한 등이 정해진 상태에서 건물을 디자인해야 하는 것처럼, 작사가 역시 기존에 설계된 영역 안에서 창의력을 발현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선 정해진 가이드 라인과 곡의 감정과 컨셉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이후 그 이해한 내용 안에서 최대한의 창의력을 발휘해야 한다. 소설을 쓰듯이 작사가가 조건/제약 없이 자신의 마음대로 스토리를 생각하고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멜로디 메이킹을 하는 탑라이너들은 멜로디를 만들 때 가사가 없는 멜로디만 들었을 때도 그 곡이 애초에 의도한 감정과 분위기가 느껴지는지 신경 쓰며 만든다. 이를 위해 작곡가 역시 마치 연기자가 케릭터에 몰입하듯이 머리 속에 그림을 그리며 감정에 몰입이 되어 노래를 만든다. 그리고 작사가는 자신의 감정에 마음대로 빠져 가사를 쓰는 것이 아닌, 작곡가가 만든 곡의 감정선과 분위기를 완전히 이해하여 해당 감정선과 어울리는 스토리와 가사를 만들어야 한다.
2. 명확한 주제와 감정이 있어야 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냐?"
일기를 제외한 소설, 시, 수필, 논설문 등 모든 글에는 반드시 주제가 있어야 하듯, 가사 역시 주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아마추어가 만든 가사에도 모두 주제는 존재한다. 하지만 문제는 명확한 주제가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화자의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표현이 되지 않은 경우가 발생한다.
한 예로, 연인간의 헤어짐을 주제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헤어짐에도 여러가지 모습이 존재한다. 지긋지긋해서 헤어지자고 하는 헤어짐이 있을 수도 있고, 여전히 사랑하지만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이별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가사를 쓰기 전에 먼저 명확한 주제와 상황, 그리고 이로 인한 구체적인 감정의 형태를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이러한 구체적인 감정과 주제는 해당 가수와 이번 곡의 컨셉, 분위기 등과 어울려야만 한다.
3. 어렵거나 추상적인 주제 말고, 누구나 한 번 쯤은 겪었거나 겪을 법한 식상한 주제를 다뤄야 한다. 하지만 표현은 색다르게. 그래야 사람들이 공감을 하면서도 재미있어한다.
간혹 멋을 부리기 위해 어려운 표현이나 추상적인 개념, 주제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실제 히트곡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누구나 겪을 법한 흔한 이야기가 주제이며, 프로 현장에서는 더 쉽고 직관적인 표현으로 수정해 달라는 요구는 있을 수 있어도 멋있거나 있어보이게를 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나의 예를 살펴보자. 소유와 정기고가 부른 '썸'이란 곡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설래고 감정을 키워나가는 일반적인 상황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런 주제로 만들어진 가사는 수 천, 수 만곡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곡이 다른 곡들보다 더 크게 히트를 칠 수 있었던 요인은 이 곡이 나올 당시 새롭게 유행하고 있던 '썸 탄다'라는 표현을 활용하여 흔하디 흔한 주제가 색다르게 느껴질 수 있었다. 그리고 후렴구의 가사를 보면, "요즘따라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니꺼인 듯 니꺼 아닌 니꺼 같은 나"로 아주 쉽고 공감이 되지만 신선한 표현 방식, 거기에 Rhyme까지 맞춰 듣는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고 재미있어하며 노래가 감길 수 있게 가사가 만들어 진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4. 시시껄렁한 감정을 처음부터 읊조리지 말 것. 처음에는 분위기만 조성하고 후렴구에서 주제와 감정을 드러내라.
처음부터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지 말고, 우선 상황설명을 해야 한다. 첫 소절부터 "나와 헤어져" 또는 "널 너무 사랑해"라고 던지며 시작하는 노래는 거의 없다. 우선 듣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해당 상황이 명확히 그려지고 그래서 감정이 이입될 수 있도록 배경을 설명한다. 그래야 후렴구에 감정이 터져나왔을 때 더 쉽게 감정이 이입되고 노래에 몰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헤이즈의 '돌아오지마'라는 곡을 예로 살펴보자. "아직도 비가 내리면 빗 소릴 비트삼아 너를 끄적이곤 해. 괜찮지 않아 난 내일도 알람이 아닌 그리움이 날 깨울게 뻔해...(중략)" verse의 내용은 화자가 어떤 상황인지 분위기를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후렴구 부분에 가서 "넌 나에게 돌아오지마. 날 보지마. 지나쳐가. 넌 행복해야 하니까 널 닮은 사람과 행복하게 살아"라며 화자의 명확한 감정과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다. 즉 verse에서 화자는 헤어진 남자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이로 인해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자와 자신은 이루어 질 수 없는 인연이고 따라서 내게 돌아오지 말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라고 슬프게 노래하고 있구나라는 이 곡의 명확한 주제와 감정이 후렴구가 되어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다른 사례인 AOA의 단발머리를 살펴보자. 이 곡은 작사와 작곡 모두 용감한 형제 작곡가가 만들었다. 주제는 남자친구와의 헤어지기 위해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런 주제를 '너와 헤어지러 가는 길'과 같은 스타일로 만든다면 너무 익숙하고 제목만 봐도 내용이 뻔해서 호기심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용감한 형제는 헤어짐을 상징하는 다른 소재를 찾다가 여자가 남자친구와 헤어졌거나 헤어짐을 결심했을 때 단발머리로 자른다는 것에 착안했을 것이다.
노래의 verse부분은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떻게 화장을 해야할지 외출 준비를 하며 무척 신경 쓰는 여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직까지는 여자가 무슨 약속 때문에 외출 준비를 하는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자리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후겸구 부분이 되어서야 왜 여자 주인공이 그렇게 외모에 신경을 썼는지를 알 수 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남자친구에게 헤어짐을 고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겠다고 결심을 했던 것이다.
5. 멜로디를 살려주는 발음(업계 전문용어로는 '딕션'이라고 한다.)을 찾아 내야 한다.
똑같은 멜로디라 하더라도 어떤 발음이 붙느냐에 따라 멜로디가 살거나 죽게 된다. 이로 인해 가사를 쓸 때 발음과 멜로디의 상성은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그리고 아마추어 작사가가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 이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곡가 역시 어느 누구보다 자신이 만든 곡의 컨셉과 감정, 분위기를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으나 스스로 가사까지 만들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이유는 바로 딕션에 맞게 스토리와 감정이 있는 가사를 만드는 것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작곡가는 본능적으로 어떤 발음과 느낌이 멜로디와 잘 어울리는지 악상을 떠올리며 알아차린다. 그래서 영어도 일본어도 아닌 이상한 외계어를 활용하여 악상을 떠올릴 때는 본능적으로 딕션을 잘 찾아낸다. 하지만 그것을 스토리가 있는 가사와 우리나라 말에 맞춰 바꾸는 작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사례로 들었던 '썸'의 후렴구 가사는 멜로디와 상성을 이루는 훌륭한 사례 중 하나이다. 이 곡의 후렴구 멜로디는 노래가 좀 더 신선하고 세련되게 들리도록 하는 기법 중 하나인 스타카토 형식의 멜로디를 사용하였다. 짧게 짧게 끊어서 불러야 하는 멜로디를 "요즘따라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니꺼인 듯 니꺼 아닌 니꺼 같은 나" 가사의 "꺼"라는 발음이 잘 살려주면서 후렴구 멜로디가 사람들의 귀에 더 잘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해당 후렴구에 다른 일반적인 가사를 붙여서 직접 불러 비교해 본다면 원곡의 가사가 얼마나 잘 만들어진 것인지 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는 만들어질 수 있으나 시인은 타고 나야한다는 말이 있다. 일반인들은 시인들만의 운율에 대한 감각을 이해조차 하기 힘들고, 단순히 노력을 쏟아 붇는다고 이러한 감각이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작사가 역시 이러한 시인의 특징과 비슷한 면이 많은 것 같다. 단순히 글을 잘 쓴다고 훌륭한 작사가가 될 수 없다. 멜로디의 리듬을 이해하고 음을 더 살려줄 수 있는 발음을 직감적으로 찾아내는 음악적인 센스, 일반적인 이야기를 신선하고 재미있게 표현할 수 있는 아이디어와 끼, 그리고 감정과 스토리를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고 감정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작가적인 능력이 동시에 갖추어져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로 작사가를 지망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3가지 역량에 대한 고민과 노력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