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자의 종류
가치투자는 투자자들의 성향과 배경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지만 크게 두 가지의 방식이 있는데, 벤자민 그레이엄이 정의한 가치투자와 워렌 버핏이 변화시킨 가치투자가 대표적입니다. 벤자민 그레이엄식 가치투자는 내재가치의 중점을 회사의 자산가치에 두고 현실적으로 재계산한 자산가치에 비하여 크게 저평가된, 즉 안전마진이 확보된, 주식에 투자하여 내재가치에 도달할 때 매도하는 것을 주된 방식으로 합니다. 워렌 버핏식 가치투자는 초기에는 벤자민 그레이엄의 방식과 유사했으나 잘 알려진 것처럼 찰리 멍거와의 만남 이후로 내재가치의 중점을 회사의 퀄리티에 두고 투자하는 방식으로 변화해왔습니다.
벤자민 그레이엄의 방식에 사실 해자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해자에 대한 고려 자체가 불필요한 방식의 투자법입니다. 해자의 중요성은 워렌 버핏식 가치투자에서 두드러집니다. 꼭 워렌 버핏의 방식을 따라하고자하는 목적이 아니더라도 기업의 퀄리티를 판단하는 것을 투자의 중요한 요소로 포함시키는 투자자들에게는 해자에 대한 판단은 필수적입니다. 해자에 대한 두번째 이야기인 이번 글에서는 제가 개인적으로 해자의 판단에 있어서 고려하는 해자의 4가지 종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1. 네트워크 효과
첫 번째는 네트워크 효과입니다. 네트워크 효과란 특정 상품에 대한 수요가 다른 사람들의 수요에 의해 영향을 받는 효과입니다. 이 효과는 메칼프의 법칙으로 그 강력함이 발전하는데, 이 법칙은 '네트워크의 가치나 영향력은 구성원 수에 정비례하는 것이 아닌 구성원 수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이론입니다. 네트워크 효과로 늘어나는 구성원은 해당 네트워크의 가치를 빠르게 향상시키며, 더욱 더 많은 구성원들의 가입을 유발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SNS를 대표하는 기업인 메타(구 페이스북)가 있습니다. SNS의 특성상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SNS로 사람들이 대다수 모이게되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SNS는 더 많은 사람을 가입하게 만드는 네트워크 효과를 누리며 이전에는 페이스북이, 지금은 인스타그램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네트워크 효과의 강력함은 해당 상품이 시장규모의 끝자락에 이르기 전까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갑니다. 이러한 네트워크 효과는 현재 많은 플랫폼 기업들이 누리고 있으며, 이 효과를 미래에 누릴 수 있는 기업들이 유망한 기업들으로 주목받습니다.
하지만 네트워크 효과는 강력하면서도 가장 불안정한 해자입니다. 구성원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기하급수적인 가치 상승을 누리는만큼 구성원 수가 줄어들수록 가치의 하락 역시 빠른 속도로 진행됩니다. 위에서 예로 사용한 페이스북의 경우에도 사용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때에는 페이스북을 뛰어넘을 SNS는 앞으로 없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인스타그램의 등장으로 이 가정에 의문부호가 생겼고, 결국 마크 주커버그는 인스타그램을 인수해버림으로써 해자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틱톡이 새로운 경쟁자로 급부상했으며, 이번에는 메타가 인수를 통해 해결할 수 없는 경쟁사인 것으로 보입니다.
네트워크 효과를 누리고 있는 기업이 있는 시장은 신규 진입을 노리는 기업들에게는 분명히 부담스러운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진입장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효과를 통해 큰 성장을 누리는 기업들은 해당 시장의 매력으로 인해 경쟁사들의 진입을 유발하며, 네트워크 효과로만 유지되는 기업은 더욱 혁신적이고 기발한 기업의 등장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내리게 됩니다.
2. 브랜드 가치
또 하나의 해자는 바로 브랜드 가치입니다. 브랜드 가치는 다양한 방식으로 형성됩니다. 명품을 제작하여 판매하는 LVMH같은 기업들은 오랜 기간동안 이어온 장인 정신과 퀄리티가 그 바탕이 되며, 검색 엔진을 제공하여 검색의 대명사가 된 구글(알파벳)과 같은 기업들은 기업이 제공하는 훌륭한 서비스가 그 원천이 됩니다. 브랜드 가치를 형성해온 기업들은 셀 수 없이 많으며 이 기업들은 이러한 브랜드를 통해 더 높은 수익성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LVMH는 지방시, 크리스챤 디올, 루이 비통과 같은 브랜드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데, 이 기업들의 브랜드 이름은 소비자들에게 '명품'이라는 가치로 다가옵니다. 이러한 브랜드 가치는 LVMH 산하의 기업들이 다른 기업들보다 높은 판매가를 형성하더라도 소비자들이 여전히 해당 제품에 대한 수요를 유지할 수 있게 합니다. 실제로 LVMH는 약 70%의 총매출마진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이 수치가 30~50%에 불과한 다른 기업들에 비해 엄청난 수혜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LVMH의 브랜드들은 제품의 퀄리티 향상에 큰 노력을 기울이겠지만 타사와 사실상 같은 효용의 제품을 판매하면서 원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매길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브랜드 가치를 바탕으로 합니다.
브랜드 가치는 네트워크 효과에 비해 쌓아올리는데 걸리는 시간이 비교적 길고 그만큼 파괴적이지는 않지만 견고한 해자입니다. 소비자들은 브랜드 가치를 위해 다른 제품과 서비스보다 더 높은 가격에 사용하는 것을 꺼리지 않습니다. 브랜드 가치라는 해자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어려운 점은 개개인마다 브랜드에 대해 관점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개인적으로 명품에 대한 별다른 가치를 느끼지 못하기에 명품의 브랜드 가치가 저에게 있어서는 해자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수의 시선에서 바라볼 때 이 해자를 조금 더 분명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3. 교체비용
높은 교체비용은 강력한 해자입니다. 특정 제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하는 상태에서 해당 제품이나 서비스를 바꾸는데 높은 비용이 든다면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교체를 꺼리게 됩니다. 이러한 해자는 훌륭한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기업들에게서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많은 대기업들이 ERP 시스템으로 SAP를 차용하는데, 해당 ERP 시스템은 기업 전반의 데이터들을 취합하고 추출하는만큼 기업 내부 관리에 대한 영향력이 높습니다. 기업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SAP의 ERP 시스템은 더욱 더 그 뿌리를 깊게 내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기업들은 SAP에서 다른 ERP 시스템으로의 교체를 꺼릴 수 밖에 없습니다. 설령 다른 ERP 시스템이 더 좋은 성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ERP 시스템을 바꾸는 비용은 거대한 기업일 경우 수백만 달러의 프로젝트가 되며 금전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유지해온 방식을 바꾸기 위해 큰 진통을 겪게 됩니다. 따라서 훌륭한 제품과 서비스를 바탕으로 많은 소비자들에게 뻗어나가는 동시에 교체비용이 높은 경우에는 대체가 상당히 어려운 견고한 해자를 가지게 됩니다.
교체비용은 브랜드가치나 네트워크 효과와 비교했을 때 더 넓고 깊은 해자입니다. 브랜드 가치나 네트워크 효과는 사실상 소비자가 더 이상 제품이나 서비스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을 때 그 결정에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지만 교체비용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선택 자체를 효과적으로 제한합니다. 이러한 해자를 가지고 있다면 기존 소비자는 지속적으로 유지함과 동시에 새로운 소비자들을 끌어들여 시장 범위를 효율적으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4. 진입장벽
진입장벽은 가장 강력한 해자입니다.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성의 둘레에 땅을 파놓고 물을 채워 놓은 것을 부르는 '해자'라는 표현에 가장 적합한 경쟁우위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네트워크 효과는 사용자를 빠른 속도로 모을 수 있고 브랜드 가치는 같은 제품을 더 높은 가격에 팔 수 있게 하여 수익성을 높일 수 있으며 높은 교체비용은 제품이나 서비스에서 벗어나는 것을 제한합니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해자들은 경쟁 그 자체를 방지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높은 진입장벽은 경쟁 자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반도체 파운드리 회사의 대표인 TSMC의 경우 새로운 회사가 TSMC와 같은 사업을 시작하려고 할 경우 엄청난 투자비용이 필요하게 됩니다. 엄청난 기술력을 갖추고, 수 많은 공장을 건설하고, 또 고객을 찾기 위해서는 적어도 수 조 달러 규모의 투자가 이루어져야합니다. TSMC의 경쟁사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기업이 삼성전자인데, 삼성전자 역시 TSMC를 따라잡기 위해 매년 엄청난 규모의 투자를 감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삼성전자 정도의 대기업이 이미 갖추어진 기술력이 있기에 가능한 경쟁이며 신규 진입자가 생기는 것을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중국과 미국 두 국가 모두 반도체라는 중요한 산업을 외국에 크게 의존하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이 부분을 해소하고자 하는데,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두 국가의 국가적인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TSMC의 아성은 가까운 미래에 무너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이 분야 1위인 TSMC 역시 끊임없이 대규모 투자를 하고있다는 점은 신규 진입자 입장에서 더욱 더 진입하기 어려운 시장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경쟁 그 자체를 방지할 수 있는 높은 진입장벽은 가장 넓으면서도 가장 깊은 해자입니다.
정리
많은 기업들이 각자의 경쟁 우위를 통해 위에서 언급한 네 종류의 해자 중 하나 혹은 그 이상을 가지고 있으며, 혹은 네 가지 모두를 가지고 있는 기업들도 있습니다. 또한 많은 기업들이 뚜렷한 경쟁 우위가 없이 기업의 발전을 통해 경쟁 우위를 만들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기도 합니다. 해자는 투자에 있어 필요조건이 아니며 충분조건도 아닙니다. 해자가 없는 기업이여도 충분히 상황과 경우에 따라서 투자를 할 수 있으며 해자가 있는 기업이여도 무조건적으로 투자를 하여 유의미한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자가 기업의 펀더멘털을 중요시여기는 투자자에게 중요한 이유는 해자는 단순히 정성적 개념이 아닌 기업의 성과로 이어지는 요소라는 점입니다. 깊고 넓은 해자를 가지고 있는 기업은 다른 기업에 비해 강력한 경쟁 우위를 가지고 높은 마진이나 낮은 생산비용과 같은 기업의 재무와 손익에 직접적인 긍정적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기업의 펀더멘털에 큰 비중을 두는 저의 투자방식 역시 기업이 가지고 있는 해자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기업이 현재 어떤 해자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그런 해자를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 또한 이 해자가 미래에는 어떤 방향성으로 나아갈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분석하는게 주된 방식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해자는 단순한 정성적 개념이 아닙니다. 많은 투자자들이 회사의 경쟁 우위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 판단을 바탕으로 해자의 유무를 단정짓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해자의 효용성을 분석하기 위해 '해자의 정량화'가 필요합니다. TSMC와 같이 높은 진입장벽을 가지고 있어도 그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대규모의 재투자를 감행해야 하는 경우도 있으며 메타와 같이 현재는 훌륭한 네트워크 효과를 누리고 있지만 새로운 SNS 기업들의 끝없는 출현을 경계하며 경쟁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해자가 기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해해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해자의 정량화'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7/4/2023
Value Investor's Sanct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