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밸류비스 박혜형 Dec 26. 2022

형평성은 선택이다.

특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특권은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 일반 보통 시민(여기서는 내가 강의하는 일반 민간기업의 직장인들임)들은 '내가 무슨 특권이 있냐, 나도 특권 좀 한번 가져 봤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자신은 특권의 '특'자도 해당사항이 없음을 강조한다. 

우리가 보통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대단한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특권이란 무엇인가? 


특권(Priveledge)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내가 번 것이 아닌 자산들의 뭉치로 일상적으로 이로 인한 득이 보장되어 있지만 대게 이를 의식하지 못함.  
e-Cornell 


일부 사람이, 다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이익, 보호를 희생시키고 그 이상의 권리와 이익, 보호를 누림을 가리킨다. 이런 맥락에서는 특권이 행운, 운, 우연의 산물이 아니고 구조적 이익의 산물이다. 지배집단 구성원(남성, 백인, 이성애자, 건강인, 기독교도, 상류층)은 자동으로 특권을 받는다. 지배집단이 권력이 있는 지위를 차지하기 때문에 그 집단 구성원들은 사회적 제도적으로 유리해진다 (Ozlem Sensoy and Robin Diangelo, 2012).


특권의 정의를 살펴보면 특권이라는 것은 일단 눈에 보이지도 않고, 내가 번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체로 이를 의식하지 못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특권인지를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에는 사실 꽤 높은 자기 성찰과 자기 인식력을 필요로 한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하고 있는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재벌가로 나오는 순양가의 자재들이 보여주는 특권의식을 보면 그들은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권을 알고 타인과의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고 권력 남용의 끝을 제대로 보여 주고 있기도 하다. 이 드라마는 재벌가인 순양에 비서로 충직하게 일해 온 하류층 윤현호라는 인물이 순양가에 버림을 받고 죽었다 다시 태어났는데 순양가 막내손자 진도준으로 환생한 판타지 드라마이다. 


1400억이나 날리고도 여전히 당당하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건 다른 이유 없이 딱 하나 순양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거 그건 당신 능력이 아니에요. 행운이지 저 사람들한텐 허락하지 않은 행운. 그래서 스스로 내려올 수는 없을 겁니다. 본인 힘으로 올라간 자리가 아니니까 



 이 드라마에서 재벌집 막내아들로 다시 태어난 진도준이 주식으로 1400억을 날리고도 자신의 잘못을 모르고 협력업체들이 도산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인내심이 없다고 핀잔하는 고모 진화영에게 분노하며 내뱉은 대사이다. 경영능력은 없으며 오로지 순양가의 딸로 태어난 것 그것밖에 다른 이유가 없다는 특권을 명확히 꼬집어 준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인종, 민족, 출신국가, 성별, 성 정체성, 성적 지향, 장애, 외모, 지역 등 수많은 것들이 결정되는데 사실 이러한 것들은 내가 얻어내거나 적극적으로 노력해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주어지는 것들이 많다. 





어떤 사람은 3루에 태어났는데 자기가 3루타를 친 줄 안다. 


자신의 특권을 의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흔히 야구 경기를 빗대어 설명하는 예시 중 하나이다. 

이는 태어날 때부터 어떤 사람은 타석에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1루, 어떤 사람은 2루, 어떤 사람은 3루에서 태어났다. 내가 3루에서 태어나면 내야 플라이(뜬 공)만 치더라도, 번트만 잘 쳐도 홈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 근데 타석에 있는 사람은 다시 홈베이스에 돌아와 득점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홈런을 쳐야 한다. 

1루에 태어난 사람은 무조건 2루 이상의 장타가 나와야 하고, 2루에 태어난 사람도 무조건 안타를 쳐야 한다. 그런데 3루에 태어난 특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3루에서 태어난 줄 모르고, 자신이 잘 나서 혹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잘 된 줄 안다는 것을 설명할 때 흔히 쓰는 예시다. 이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주체가 될 수 있는 기회의 차이인 것이다. 특권 그룹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기회들을 더 많이 보장받고 자기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기회를 누리는 반면 억압 그룹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자기의 삶을 만들어가는 기회들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는 정의가 필요한 것이다. 


사람은 모두 수많은 사회적 정체성에 놓이게 되는데, 나의 경우도 역시 사회적 역할로는 성인교육을 하는 강사, 교수의 역할도 있고, 한 아이의 엄마, 아내, 며느리, 딸로서의 역할도 있고, 친구, 동료의 역할도 있고,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는 지식기업가로 대표 역할도 맡으며 다양한 역할이 있다. 이렇게 수많은 사회적 정체성 속에 나는 특권 그룹에 속하기도 하고, 억압(차별받는 위치) 그룹에 속하기도 하는데, 일반 보통 시민들은 자신이 특권적 위치에는 전혀 놓여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은 한 가지의 역할로만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장애는 있으나 고학력을 가진 남성, 지방대를 졸업했으나 대기업 정규직으로 근무한 여성, 서울에 사는 고학력 부유층 자제이나 성소수자 남성 등 사람은 매우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다양성과 포용성의 시대로 넘어왔고, 다양한 위치에서 한 개인을 바라보는 절대적 기준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한 개인으로서 그 어느 누구도 절대적 위치에 놓인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출처 : 경향신문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작가 김지혜교수는 특권을 '주어진 사회적 조건이 자신에게 유리해서 누리게 되는 온갖 혜택'이라고 했다. 그는 인식하지 못한 특권은 타인과의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요인이 된다고 얘기한다.  평범한 보통사람이라 하더라도 분명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특권적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은 많다는 것이다. 나 역시 다양성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이전에는 특권에 대한 개념을 정확히 알지 못했고, 나 역시 평범한 소시민으로 특권을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다양성에 대한 공부를 하며 내가 가진 특권적 위치는 무엇이고 차별적 위치는 무엇인지 알아봤을 때 나는 생각지도 못한 특권적 위치에 놓여 있는 것, 또한 생각지도 못하게 차별적 위치에 있는 것들도 있다는 것이었다. 

일단 가장 인지하기 쉬웠던 것으로 나는 생물학적 여성이고 성적 취향 역시 여성이라는 점, 비장애인이라는 점, 키가 큰 점, 서울에 살도 있다는 점 등은 생각지도 않은 나의 특권이었다.  이렇게 특권은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조건이라 많은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특권은 가진 자의 여유로서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라고 설명한다. 

특권은 운이 아니라 지배집단 구성원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특권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특권을 의식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출처: Judith Worell and Pamela Remer 


그림과 같이 특권적 요소는 상대적으로 가지지 못했을 때 차별적 요소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차별과 특권을 가르는 기준은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형성된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고정관념을 가졌는지에 따라 차별을 받기도 특권을 누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DEI과정에서 형평성(Equity)에 대한 개념을 설명할 때 항상 나오는 개념이 평등 (Equality)과의 비교이다. 

평등은 모든 사람의 차이와 상황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을 의미하며 균등하게 배분되는 것을 말한다. 평등은 모든 사람을 같은 방식으로 인식하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고 같은 것을 제공한다. 반면에 형평(공정)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며 개인의 차이를 존중하는 것을 의미하며 공정한 분배를 말한다. 형평(공정)은 개인의 차이를 인정하고 개인의 차이를 염두에 두어 사람을 대하는 것으로 사람들의 필요와 요구 사항에 따라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형평은 사실 참 어려운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양극화가 심해져 가고 젊은 세대층으로 차별의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다양성과 포용성의 관심은 지속적으로 어디를 가든 하나의 슬로건으로 내세워 지고는 있으니 실질적으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의 문화를 정착해서 가는 조직이 많지는 않은 대한민국이다. 

젊은 세대의 정의는 Fairness의 의미이고 기성세대의 정의는 Justice이다 보니 세대 간의 인식 차이 또한 다르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차이에 대한 이해를 정확히 하지 않고서는 결국 사회통합이라는 것을 실현하기에는 아주 어려운 상황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어디를 가든 힘의 차이는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 힘의 차이는 자연 발생적이기에 이 힘이 차이를 어떻게 균형을 맞춰 가야 할지 그것을 고민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현실적인 힘의 차이로 인해 발생되는 상황에서 그 현실을 그냥 내버려 둘 것인지, 평등을 선택할 것인지, 형평을 선택할지 고민하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스템적으로 해방을 할 수 있는 근본적인 것을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가 해야 하는 역할일 것이다. 

예전에 화장실에 가면 물을 아끼자라는 포스터가 참 많이 붙어 있었다. 수도꼭지를 꼭 잠가라, 물을 아껴라 라는 말 보다 시스템적으로 손을 대면 물이 나오고 손을 떼면 물이 멈추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가 구조적으로 갖춰야 할 사항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