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 하나로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될 줄이야. 20년 가까이 '커리어우먼스러운' 단발머리를 고수하던 내가 앞머리를 내고 구르프를 말기 시작한 순간, 길거리에서 마주치던 여학생들의 세상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사회생활 초년 시절, 나는 비서실 선배의 손에 이끌려 미용실 의자에 앉았다. "사회인다워 보이게 해드릴게요"라던 원장님의 말씀에 긴 생머리는 싹둑 잘려나갔고, 그렇게 나는 '프로페셔널한 이미지'라는 갑옷을 입었다. 누가 봐도 '전문비서' 같다는 말을 들으며 묘하게 뿌듯해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머리카락 길이=전문성'이라는 수상한 공식을 믿으며 근 20여년간을 살아왔다. 20일마다 한 번씩 미용실을 들락거리며 관리했던 그 단발머리는, 돌이켜 보면 나의 '커리어우먼 코스프레' 도구였는지도 모른다.
첫 임신은 내 단발머리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뻔했다. "염색약은 태아에게 해로워요"라는 말에 자연스레 기르기 시작한 머리. 거기에 앞머리까지 내보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길어진 앞머리는 옆으로 넘어가버렸고, 나는 다시 '프로페셔널한' 단발머리로 복귀했다. 마치 도망친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처럼, 그 짧은 변신의 시간이 무색하게.
인생이란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다더니. 세 번째 유산과 코로나19라는 예기치 못한 사건들은 나를 길고 긴 칩거 생활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내 머리카락은 마치 라푼젤처럼 자라났다. 물론 성까지 내려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 긴 생머리는 마법처럼 나를 젊어 보이게 했다. 늦둥이 엄마인 나는 학부모 모임에서 '선배 엄마' 취급을 받지 않았다. 이게 바로 긴 생머리의 힘인가? 아니면 우리 모두가 가진 편견의 힘인가?
3년간의 장발 생활 끝에 찾아온 변화의 욕구로 앞머리를 자르고, 운명처럼 나는 '구르프'와 만났다. 아, 구르프. 한때 내가 "도대체 왜 저러고 다닐까?"라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던 바로 그것. 이제야 알게 되었다. 여학생들이 등굣길에도, 하굣길에도, 심지어 학원 가는 길에도 구르프를 말고 다니는 이유를.
앞머리의 힘은 마치 주식시장처럼 오르락내리락한다. 아침에 완벽했던 앞머리는 점심시간이 되면 어느새 힘을 잃고, 오후가 되면 완전히 항복해버린다. 그래서 구르프가 필요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10대들의 지혜였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집에서만 구르프를 만다. 아직은 '프로페셔널한' 이미지를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 걸까? 아마도 나는 그녀들처럼 남의 이목을 받는 것이 불편하고, 40대 중반의 여성이 구르프를 말고 다니는 문화는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거리에서 구르프를 한 채 다니는 여학생들을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의 세상에서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니까. 그들만의 '구르프 문화'를 이해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구르프'를 말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직장에서의 이미지를 위해, 누군가는 자신감을 위해, 또 누군가는 그저 예뻐 보이고 싶어서.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말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D&I(다양성과 포용성)를 이야기하는 사람으로서, 이 깨달음은 꽤나 충격적이기도 했고 신선했다. 내가 얼마나 자주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을 함부로 판단해왔던가? 앞머리 하나로 깨달은 이 아이러니한 교훈이라니!
역지사지(易地思之). 초등학교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이 사자성어. 나의 강의에 항상 강조하는 것이 바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앞머리 하나로 이 깊은 뜻을 깨닫게 될 줄이야. 우리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남의 처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진정한 이해는 때로는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지금도 나는 앞머리에 구르프를 말고있다.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교육의 본질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 내 경험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와 다른 것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포용의 시작점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대로 인생이라는 긴 머리카락을 말고, 펴고, 자르고, 다시 말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뻣뻣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며 조금씩 성장해간다.
진정한 포용이란, 거창한 선언이나 완벽한 이해가 아닌, 이렇게 일상의 작은 순간들 속에 피어나는 것임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더 나은 내일을 위한 가장 귀중한 선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