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은 4살 터울인 내 동생이 태어난 해였다. 종종 나의 기억력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데 내 동생이 태어났다고 아빠가 전화로 알려온 그 순간, 다섯 살 무렵의 내 탄식과 반응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시간이 꽤 흐르고 나서 이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세뇌가 정말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겨우 5살인 꼬마 여자아이 입에서 "왜 남자가 아니야?"라고 어리둥절해하며 엉엉 울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성향에 비추어본다면 정말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나는 그때 그랬다. 동생에게는 매우 미안한 말이지만 은연중에 할아버지가 '남동생 생겨야지' 했던 말을 내 뇌가 받아들이고서는 남동생이 태어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반응하고 만 것이다. 우애가 남다른 내 입장에서는 동생에게 죽을죄를 지은 것 마냥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영화 <벌새>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4와는 다른 방식으로 1994년을 다루고 있으며 그 시대를 중학생으로, 혹은 성인으로 살아갔던 이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그땐 그랬지.' 하고 추억에 젖어들만한 요소들을 배치해 두었다. 그때 당시의 나는 겨우 다섯 살에 불과했지만 천방지축이었던 나는 엄마, 아빠 따라서 장례식장에 갔다가 왼손을 난로에 올리는 바람에 화상을 입기도 했으며 한동안 왼손에 진 흉터를 영광의 상처로 안고 살아갔다. 다행히도 세월이 약이라고 그 흉터는 성인이 되고 나서 자연스레 없어졌다. 그렇게 잊힌 흉터처럼 잊고 있었던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영화 <벌새> 덕분이었다.
첫 사랑 하면 늘 떠올랐던 누군가가 있었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깨달았다. 진짜 내 첫사랑은 초등학생 때의 누군가였다는 것을. 부모님끼리 서로 알고 있고 그 아이 누나랑 정말 친했던 나는 종종 집에 놀러 가서 함께 식사를 하고 같이 놀았다. 우리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서로 호감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유치한 일이지만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에 서로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것들을 주고받았다. 3학년, 4학년 때는 같은 반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날이 되면 서로 마음을 전했다. 5학년 때 어떤 여자애가 그 아이한테 호감을 표시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질투 비슷한 감정을 느꼈고 서로 좋아하고 있다는 풍문을 듣고서는 내 감정은 자연스레 정리되었다. 이후 그 아이로부터 그건 사실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늘 그렇듯이 한번 폭삭 내려앉은 감정이 회복되기란 어려웠다. 물론 어린 나이의 내가 그때 그 감정이 무슨 감정인지 어떻게 분석하고 알았겠느냐만은 상경 후, 우연히 초등학교 때 다녔던 영어학원의 친구를 보게 되면서 그 아이의 근황이 몹시 궁금해졌다.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막연한 호기심이랄까. 물론 건너 건너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억지로 다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한 번 만나봤더라면 희한한 감정이 들었을 것이다. 애틋했을 것이고 생경했겠지.
<벌새>에서 중학생 은희는 우유부단해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남자 친구를 위해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을 직접 녹음해서 테이프로 전해주려고 한다. 초등학생 시절, 우리는 친한 친구 혹은 커플끼리 '노팅' 이란 것을 했다. 하나의 노트를 서로 주고받으며 편지를 쓰거나 기억을 아로새기는 일을 '노팅'이라 부르곤 했었다. 수업시간에 딴짓을 한다면서 쪽지를 주고받거나 공책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쓰곤 했는데 그런 모습들이 영화 속에 담겨있다. 뿐만 아니라, '의자매' 열풍이 불어서 언니들이 학급 앞에 붙은 사진을 보고서는 자기 마음에 드는 누군가를 불러서 '의자매'를 맺기도 했다. 엄마와 손잡고 시장을 지나가다 그 언니를 마주치면 거의 90도 가까이 안녕하세요 를 외쳐야만 했던,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우스운 관계. 게다가 학교 마치고 나면 항상 봉봉을 탔던 유년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라서 피식 웃었다.
'결혼은 서로에게 붙박이장 같은 거래.'
벌새에서 좋았던 장면과 대사들이 많았지만 유독 이 대사가 기억에 남았다. 일단 결혼하게 되면 서로가 붙박이장일 정도로 서로에게 사랑이 아니라서 바람을 피우는 거라고. 기가 막힌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가족끼리는 그러는 거 아니라는 둥 판에 박힌 상투적인 말들을 해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는데 붙박이장이라는 표현을 듣고는 빵 터졌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은희네 가정은 화목하지 않다. 싸우다가 풀고 투닥이고 이런 일련의 과정이 밥 먹듯이 반복되는 곳으로 은희의 엄마는 마냥 희생적인 어머니로 그려지지도 않는다. '벌새'를 보는 내내 '청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등장인물들 하나하나에서 인위적이라거나 과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였다. 좋아하는 배우 '김새벽' 덕분인지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가 떠올랐다. 좋은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나면 엔딩 크레디트가 끝나고 나서도 극장에 계속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인데 '한여름의 판타지아' 가 너무 청아해서 내 마음마저 몽글몽글해졌던 기억이 있다. 물론 영화 '벌새'의 전개 방식이나 결론도 예측 가능했던 부분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하게 풀어내지 않은 방식과 담담한 시선에 큰 박수를 주고 싶었다. 영지 선생님을 보면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던 서예학원 선생님이 떠올랐다. 청학동에 사는 서당 선생처럼 생활한복을 입고서는 먹을 갈게 하고 한문을 못 외우면 무섭게 눈을 부릅뜨시곤 하셨던 터라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서예학원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무서워했던 선생님이 밤에 혼자 학원에 남아 계시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만약 서예 학원 선생님이 은희와 영지 선생님 사이만큼 나와 깊은 유대관계에 있었더라면 나는 충격받고 얼마나 깊이 침잠하게 되었으려나. 영지 선생님이 담배 피우는 뒷모습을 보고 은희는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내게도 비슷한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무렵, 선망하는 대학 탐방을 몇 군데 갔을 때 차에서 우연히 본 언니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단발머리에 쇼트 팬츠를 입은 대학생이 거리에서 담배를 당당히 피우며 웃는 게 아닌가. 아니, 이렇게 멋있을 수가! 하며 그 언니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도 저렇게 멋진 여자가 되어야지. 그렇게 다짐했다.
사실 주변에서 극찬하길래 기대를 많이 하고 봤다. 영화 <캐럴> 같을 줄 알고 기대를 잔뜩 하고 <윤희에게>를 보고서는 실망한 나는 <벌새>를 보고 나서는 14살 여중생은 은희에게 내 지난날을 투영해 보았다.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나의 경험들을 하나둘 반추하는 시간을 가졌다. 엄마가 해놓은 감자전을 꾸역꾸역 먹어대는 은희를 보면서 감자전을 랩에 싸 두고는 출출할 때 먹으라고 했던 젊은 엄마가 떠올랐으며 그놈의 대학이 뭐라고 좋은 대학 보내기 위해 텔레비전 볼륨 소리 좀 낮추라는 지난날의 엄마가 떠올랐다. (사실 나 딴짓 많이 했는데 아침드라마, 일일드라마, 주말드라마까지 다 섭렵할 정도로 간 떨려하며 드라마를 봤고 매일 오셀로나 테트리스 하면서 공부하는 척하고 인기척이 들리면 엄청 진지한 표정으로 공부하는 척했는데 우리 엄마는 그렇게 속았다.) 영화 '벌새' 속의 심드렁한 엄마를 보면서 우리 엄마가 극 중 엄마처럼 심드렁하게 내게 무관심했더라면 나도 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1994년은 성수대교가 붕괴되었고 김일성이 사망했고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이 곳곳에 울려 퍼진 엄청난 해였지만 우리 엄마와 나에게는 보물 같은 동생이 태어난 해였다. 1994년에 내 동생을 낳은 엄마도, 1994년생인 내 동생도 1994년을 다룬 이 영화를 보고 좋아할 것만 같다. 저마다 각기 다른 이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