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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보카도 Mar 17. 2020

BBC가 예측한 미래의 모습, 당신은 동의하십니까

드라마 <이어즈&이어즈>가 주는 공포와 충격은 상상 그 이상


킹덤 시즌2가 좋다고들 난리다. 좀비물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나는 귀신만큼이나 좀비를 싫어해서 시즌1도 정주행 하다 포기했다. 시즌2가 시즌1보다 낫다길래 보고는 있는데 그 무엇보다도 넷플릭스 자본의 힘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어마 무시한 좀비떼들이 한 샷에 잡히는데 어떻게 저 많은 엑스트라를 섭외했으며 저 사람들을 어떻게 분장해서 지금 벌판을 달리게 만든 것인가? 하며 역시 월드클래스 넷플릭스 투자 없이는 이 정도 스케일을 찍지 못했겠구나 생각했다. 이후 전투신은 더 대박이라는데 개인적으로 전쟁영화도 좋아하지 않아서 킹덤 시즌2를 정주행 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지극히 내 개인적인 의견이므로 시즌2 정주행에 성공하고 나서 다시 또 내 마음이 바뀔 수 있다. 찬양하는 글을 쓰게 될 수도 있으니 일단 밑밥을 깔아 두기로 한다. 대신, 정주행에 성공했던 영국 드라마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어즈&이어즈>는 고대하고 또 고대하던 드라마였다. 무려 영국 드라마 닥터 후의  작가 러셀 T 데이비스가 대본을 쓴 이 위대한 드라마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주행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1화가 그렇게 신선하지 않았다. 블랙 미러 전 시즌 덕후인 내가 시즌5를 보고 실망했을 때의 심정이랄까. 그래, 1화로 판단하기는 이르다 싶어서 2화까지 정주행 했지만 시원치 않았다. 그래서 반나절 쉬다가 다시 보기 시작했는데 4화에서 포텐이 터지는 게 아닌가. 4화를 보면서 이 드라마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무서운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블랙 미러>의 경우, 가까운 미래라기보다는 2050년 정도 혹은 2100년 정도에 우리 미래의 모습이 그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먼 미래에 대한 드라마라면 <이어즈&이어즈>는 지금 코로나 때문에 강제 방콕을 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고 있는 우리들의 현재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2020년 1월 31일, 3년 전부터 떠들썩했던 영국의 브렉시트가 법적으로 확정되었다. 세계를 놀라게 했던 브렉시트가 하드냐 소프트냐 노딜이냐 등등 여러 말이 많을 정도로 영국의 EU 탈퇴는 세계사적으로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브렉시트가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 역시 크기 때문에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지켜보기만은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2019년에 제작이 되고 미국 HBO에서도 방영이 되었던 BBC산 드라마를 보고 BBC 최고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에서 BBC는 정치적 외압으로 문을 닫고 2030년에 재 개국하게 되는데 브렉시트 이후 자국의 상황을 시니컬하게 바라보면서 앞으로 벌어질 일을 연도별로 담아낸 게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진짜 이 드라마에 제시된 미래의 모습이 머지않아 현실에서 구현될 것만 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6화에 지금의 코로나처럼 신종 몽키 플루가 등장하는 것만 봐도 이 드라마가 얼마나 현실적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스포 주의*********


<이어즈&이어즈>에는 대가족이 등장한다. 그리고 대가족을 음성으로 이어주는 인공지능 señor 이 등장한다. señor은 스페인어로 영어의 Mr에 준하는 말이다.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상당히 매력 있다. 할머니와 손녀, 손자, 외손주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자주 할머니 댁에 모인다. 다리 거동이 불편해서 휠체어를 타야만 하는 로지, 사회운동가 이디스가 손녀로 등장하고 은행 파산으로 100만 파운드를 잃게 되는 금융권 종사자 스티븐과 이민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으로 등장하는 다니엘이 손자로 나온다. 스티븐의 딸이 트랜스 휴먼 수술을 받게 되고 의식을 데이터화하는 데에 관심이 많은 별종으로 천재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면이 있는 캐릭터다. 이 캐릭터가 없었더라면 전체 드라마가 진행되지도 못했을 정도로 이 아이의 비중은 크다. 그리고 다니엘이 사랑했던 우크라이나인 빅터는 안타까운 캐릭터다. 이외에도 스티븐 가족, 스티븐의 외도녀 등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하고 그들의 관계도 촘촘하게 엮여 있다.  


초반부에서는 스티븐 딸이 인터넷으로 '트랜스'를 자주 검색하자 스티븐 부부가 딸을 동성애자로 오인하는데 사실 딸은 트랜스젠더가 아닌 트랜스 휴먼이 되고 싶어 하는 아이였다. 손에 칩을 이식해서 전화 없이도 손짓만으로 전화를 받을 수 있었던 그녀는 이후 더 큰 수술을 감행하고 타인의 정보를 들여다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고모인 이디스의 잠입을 도와주는가 하면 중요한 순간에 대규모 정전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 보통 마블 영화에서라면 초능력을 가져야만 가능할 일이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트랜스 휴먼'이라는 개념만으로 이 능력이 용인된다. 이 드라마가 '동성애'를 '이성애' 급으로 다루는 것을 보면서 순간 띵 했다. 그래도 열려있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드라마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편견 덩어리인지 깨닫게 되었다. 다니엘은 약혼자인 빅터가 영국에서 추방되고 여러 국가를 전전한 끝에 스페인에서 기약 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며 빅터를 몰래 데리고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행동으로 옮기다가 익사하고 만다. 만약 남-남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남자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 주인공을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다가 난파선에 휩쓸려 익사하게 되는 이야기였다면 어땠을까. 얼마나 서로에게 운명이면 저렇게까지 하다 죽게 되는 이런 슬픈 사랑이 다 있담. 하며 눈물을 글썽였을 텐데 사실 빅터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다니엘이 조금은 이해가 안 갔다. 물론 다니엘은 동성결혼 후 이혼을 하고 빅터에게 첫눈에 반한 캐릭터로 등장하며 이혼남이 빅터의 불법체류 사실을 신고하는 바람에 일이 엉키긴 했지만 '그놈의 사랑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하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반성했다. 이성애만이 합법화된 세상에서 이성애자인 줄 알았던 캐릭터가 동성애를 깨닫게 되는 이야기에 물들어서 애초에 동성애가 아무렇지도 않은 세상의 이야기를 아직은 생경하게 받아들이는 나란 닝겐! 동성애 못지않게 페미니즘을 그려내는 방식도 남다르다. 미러링은 남녀 캐릭터 전복에서도 보이지만 싱글맘인 로지의 동양인 아들에게 리본 액세서리를 달아주고 치마를 입히는데(강제가 아니다.)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What The Fuck 이 아니라 '아무거나 입어도 이쁘잖아.' 하는 시큰둥하고도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나를 반성하게 만든 BBC 다시 한번 더 만세!


다니엘의 죽음이 4화에 나오는데 해변에 시체로 남겨진 그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먹먹했다. 빅토르는 담담히 señor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알린다. 빅토르는 다니엘과 사랑한 죄밖에 없는데 다니엘의 형 스티븐은 빅토르 탓으로 돌리며 시스템을 이용해서 빅토르를 난민수용소인 얼스와일로 보낸다. 얼스와일은 트럼프 격으로 선동질을 해대는 총리 비비언 룩이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난민 수용소다. 빅토르는 이디스와 천재소녀의 도움으로 전자파, 와이파이마저 차단되어있던 얼스와일로부터 탈출하게 된다. 이디스의 동지들이 대포로 그 탑을 무너뜨리자 폰을 밀반입했던 수용소 사람들은 폰을 켜고 인터넷이 되는 폰으로 자신들을 억압하려 하는 이들을 촬영하고 실시간 중계되는 화면이 펍에서는 그려지는데 드라마에서 제일 통쾌했던  순간이었다. 딥 페이크, 트랜스 휴먼, 데이터 마이닝, 빅데이터, 성인용 로봇, AI 등 다양한 SF 요소들이 등장하지만 결국 이 드라마의 본질은 '정치'에 있었다. 6화에서 할머니는 이제 돈이 없으니 이 집이라도 팔아서 너네에게 나눠주겠다고 하면서 사회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행동하지 않은 너희들'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인해 하나둘 일자리를 잃어도 '편리하다'고만 생각하거나 씩씩거리기만 했지 어떤 행동을 했냐고 반문한다. 처음에는 천재소녀가 제일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다가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다니엘로 옮겨갔다가 최종적으로는 할머니가 제일 멋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 모든 드라마의 키는 할머니가 쥐고 있었던 것이다.



드라마는 난민 문제를 핵심 문제로 다루지만 난민 이외에도 사회적 약자, 감정노동, 페미니즘, 공유경제, 부당해고, 가짜 뉴스, 은행 파산, 방사능, 핵무기, 싱글맘, 기후변화 등 다양한 문제를 담아낸다. 그리고 말한다. 이 모든 문제를 포퓰리즘 정치가 좌지우지하고 있는 현실이 보이지 않느냐고. 바로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말한다. 난민수용소를 만들고 선동질을 했던 비비언 룩은 결국 수감되지만 이디스의 말처럼, 비비언 룩을 바지사장처럼 여기고 후원했던 배후 세력들은 그녀를 어디론가로 빼돌렸을지도 모른다. 가짜 뉴스가 범람하고 음모론이 범람하는 지금의 모습을 드라마는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괴물 하나를 처치하고 나도 다른 동굴에서 괴물이 태어난다며 반복되는 정치인들의 광대놀음과 시답지 않은 농담과 속임수가 생지옥을 겪게 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이디스의 말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극 중에서 2030년에 BBC는 재 개국하고 프랑스 노르트담 대성당은 재건설되고 피사의 사탑은 무너진다. 이 드라마는 10년 후에 영화 '백 투 더 퓨처' 만큼이나 화제가 될는지도 모른다. 코로나 확진자수가 또 언제 나오고 언제 줄어들지 한 치 앞을 모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코로나 블루에 허덕이는 우리에게 <이어즈&이어즈>는 샤랄라 한 장밋빛 미래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보고 나면 더 우울해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류멸망이나 재난영화를 보며 공포심에 휩싸이기보다 현실적인 이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의 현실이  지금 얼마나 위태로운지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 드라마가 반면교사가 되어 우중충한 우리의 잿빛 미래가 조금은 옅어지길 바란다.



 덧, 솔직히 블랙 미러를 능가하는 드라마라고 인정하지만 맹점이 있다. 천재소녀는 정부 소유물인데 고모 이디스와 짜고 얼스와일 음모를 파헤치는 데에 이 기술을 활용하지만 위기 하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전사태로 인해서  종이책이 다시 각광받는 설정이라든가 벽을 통해 통신망이 전달되는 신기술, 박테리아로 만든 리소토 등 너무 신기하고 재미난 요소들이 맹점을 가려준다. 게다가 스티븐 아내가 남편의 외도에 충격을 받고 마음이 돌아서지만 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식사를 하면서  '우린 늘 비싼 식당에서 밥을 먹었지.'  하며 그때를 그리워하는 스티븐에게  '그런 게 그립지 않아. 당신이 그립지.' 할 때 심장에 전류가 통한 것 마냥 찌릿했다.  천재소녀가 아빠 스티븐의 외도 사실을  알고 딱 한마디  한다. '그녀는 백인이에요?' 백인-흑인 부부로 설정한 것에서 더 나아가 100만 파운드를 날리고 파이브 잡을 뛰어가며 일에 매달리다가 백인과 바람나는 아빠의 굴욕적인 모습, 쫓겨나서 애인네에 머무는데 애인한테도 내 영역 침범 말라며 구박받는 모습까지 이 드라마는 너무나도 암울한 상황을 촘촘하게 그려낸다. 맹점이 아무렇지 않게 보일 정도로 드라마가 너무 매력적이다. 제작진한테 반할 것만 같다. 저도 BBC에서 일하고 싶어요. 연락 주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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